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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용팔 Oct 09. 2020

필름카메라, 앵글 속의 과거


아내가 장롱을 정리하다 깊숙한 구석에서 오래된 필름 카메라를 발견했다. 내가 산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아 카메라 종류와 연식을 따져가며 진품명품에 나온 골동품이라도 감정하듯 열심히 관찰한다. 삼성미놀타 라... 검색창을 통해 대충 출시된 시대를 알아본다. 1980.

당시 상황으로 봤을 때 우리 집에서 경제력을 쥐고 있던 단 한 사람, 아버지가 사셨던 걸로 결론이 난다. 이민을 가시기 전 갖고 계셨던 물건들이 여기저기로 분산되면서 카메라는 우리에게 흘러들어온 걸 아내가 잘 보관해둔다고 넣어둔 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천몇백 년 만에 나타나 세상을 뒤집어 놓은 어느 왕릉까지는 아니더라도 족히 10년 이상 빛을 감추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 하기야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고 핸드폰이 대신하고 있는 지금에 필름 카메라를 업으로 하는 사람 아니면 생각기야 할 물건이겠는가.


필름이송레버를 젖히고 셔터를 누르자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묵직함이 손끝으로 전해온다. 오래된 빛바랜 사진 한 장이라도 툭 튀어나올 듯하다. 사진만큼 과거 시간을 신명하게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요즘이야 앨범 뒤져보는 것조차 귀찮고 번거로워 창고 어디쯤 처박아두고 잊고 지내다 가끔 뭔가를 찾으러 들어갔다 우연히 손에 잡히면 펼쳐보곤 하는 킬링타임용 신세로 전락해 버려 때론 사진에 빠져 한참을 그 자리에 있곤 한다. 창고라는 좁은 물리적 공간이 아닌 잊힌 시간이 심어놓은 과거 공간에 머문 체. 고작 몇 그램의 사진 한 장이지만 그 속에 실려 있는 이야기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마치 LP판의 통통 튀는 바늘 소리도 화이트노이즈로 들릴 만큼 생생하게 전달되는 진공램프의 사운드를 듣고 있는 것처럼 그 한 장의 울림은 의외로 크다.


영화를 보다 보면 사진과 관련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몇몇 장면이 있다. 전쟁영화에서 싸우기 전 전우들에게 가족사진을 보여주는 병사는 거의 죽게 마련이다. 병사(남겨진 자)의 가족들(부재)에 대한 그리움은 전사한 병사 주머니에서 발견된 피 묻은 사진이 가족들에게 전달되고 거기에 오버랩 되는 병사의 웃는 모습은 남겨진 자(가족들)의 부재(병사)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멜로물에서 등장하는 사진 태우는 장면 또한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잊혀야 할 상대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이런 장면은 마치 엄숙한 종교의식처럼 행해진다. 재로 변하는 사진이 바람에 실려 날린다든가 플래시백으로 이어지는 행복했던 날들 회상 같은...이런 클리셰를 대할 때마다 매번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는 이유는 사진이 과거 시간 속에 함몰된 기억의 잔상이기에 그렇다. 그렇게 수많은 추억 속에서 작은 편린조차 쉽게 떼어내지 못하게 만드는 이미지에 갇혀버리기 때문에.


우리 시대의 탁월한 문화 감식가인 김화영은 산문집 <바람을 담는 집>에서


 “사진은, 세상의 모든 사진은 시간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저마다의 ‘섬’이다.”


고 했다. 한 장 한 장 꺼내 볼 때 마다 바로 그 자신의 ‘섬’ 속에 갇혀 과거의 심연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 속에 묻혀 있는 이야기는 기억의 저편으로 데려다준다. 가버리고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면 심지어 가난이나 불행조차도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고 했던가? 흑백 질감은 언제부턴가 과거와 동의어가 돼버린 것 같다. 색 바랜 모노톤의 아련함은 어릴 적 어둑신한 동네 골목길 회색 벽과 닮아 있다. 천연색으로 찍었다 해도 그보다 넘쳐나지 않았으리라. 사진을 보면서 “저 때는...” 또는 “그 당시에...” 라고 읊조리는 것은 다시 다가서지 못할 시절을 잊기 위한 의도된 거리두기이면서 동시에 남겨진 이야기가 똬리를 틀고 앉아 있는 마음 한편을 밀어내려는 변명일지도 모른다. 마치 그 사진에 빚진 무언가가 남아있다는 듯이.


오래전 D미술관에서 사진 관련 도슨트 교육을 받았을 때가 생각난다.사진은 뺄셈의 예술이라는 강의를 듣고 고개를 주억거리던 그때에 이런 말을 들었다. 아마추어들은 애초 정한 목표가 없거나 명확하기 않기 때문에 잡아내고 싶은 장면을 정하지 못하고 그것과 관계없이 이것저것 다 사진 속에 담는다는 것이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허겁지겁 다 배 속에 채워 넣는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는 세월의 무게 속에 주위의 모든 것들이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남아 있는 사진 한 장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데 더 보태지 못할망정 있는 것도 빼버려 야 한다니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것도 넣어야 하고 저것도 담아야 하는데.. 알고 보면 사진이야말로 보탬의 예술이 아닌가 싶다.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나 할까? 옛 선인들도 가벼이 살라고 했거늘 60이 다 돼서도 삶이 여전히 아마추어이니 어찌하겠는가.


사각이라는 작은 프레임 안에 고정돼있는 존재의 객관성과 소멸의 주관성. 사진은 그 찰나의 순간, ‘거기에 있었음’ 외에 어떤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는다. 어느 과거 함께 했던 이들이, 그리고 공간들이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사라져 갔는지 알지 못한다. 각각의 삶는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므로. 때문에 순간의 영원성만 간직한 채 그저 우리의 시선만 묵묵히 받아낼 뿐이다.


"우리가 흘러가는 시간의 물결을 거슬러 영원을 소유하고 싶은 소박한 마음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런데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영원히 얼마나 죽음과 닮아 있는가를 섬찟하게 느낀다."

                             -김화영. <바람을 닮은 집> -


사진이라는 과거의 기억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현실에 깊숙이 개입돼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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