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도시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당신에게 물들었던 그때가 생각이 났다. 냉정과 열정 사이 속 주인공이 되어 자신만의 쥰세이, 아오이를 마음껏 떠올릴 용기를 주는 이 곳을 사람들은 사랑의 도시라 부른다. 붉게 물든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빛 같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순간 우리는 만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순간을 스치는 것으로만 여기지 않는 성실함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서로에게 다다랐다. 그들은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고 있었다. 내 마음이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며 정성스레 사랑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긴 여정을 걸어온 것처럼 우리도 이 곳에서 마음을 다해 만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당신이 떠올랐다. 여행이라는 핑계를 대본다. 그리고 당신을 마음껏 떠올려본다. 여행이 주는 용감함을 조금 더 가져본다. 어느새 당신은 내 옆에 서 있다.
당신이 떠난 후 나는 귀가 먹먹했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사실 듣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이 싫었다. 타인의 아픔에 적절한 위로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말 같았다. 시간이 흘렀다. 어느새 나도 같은 아픔을 겪은 이에게 별 다를 것 없이 무책임한 위로를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정답이었다.
그때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내 진심을 전할 수 있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당신이 이별을 말하던 때에,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처음 느꼈을 때였다. 그제야. 사랑이 오면 이별도 온다지만 그렇게 한 번에 올 줄은 몰랐다. 사랑은 말없이 성큼 다가왔듯 사랑이 떠나던 순간도 그랬다. 너무 늦게 마음을 깨달은 내가 안타깝고 당신에게 미안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그게 나의 마지막 배려였고 당신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그때 내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다면, 당신을 덜 사랑했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이곳에 함께 서 있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사랑에 있어서는 어떤 가정이나 이유는 없다고 말이다. 물이 흘러가듯 두 사람도 그렇게 흐르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조금 더 이기적이었다면' 하는 가정이나 내가 그를 사랑했던 정도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그래야만 했던 것뿐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일에 이유가 없었듯, 우리가 헤어지는 일도 그랬다. 그것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리도 끝나지 않던 당신과의 시간에서 마침내 이별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문다. 야경을 보기 위해 미켈란젤로 광장으로 가는 길이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베키오 다리를 마주했다. 저녁 빛을 머금은 아르노 강은 베키오 다리를 빛나게 했다. 마치 사랑이 서로를 빛나게 하듯 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행복해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 우리의 시선이 함께 머무는 것은 사랑이었다. 우리가 베키오 다리를 바라보며 사랑을 약속한 것처럼, 오래된 다리는 우리를 보며 사랑을 기억해줬다. 같은 자리에서 수많은 연인들의 사랑을 약속받으며 오랜 시간 머물러줬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 당신에게서 돌아오는 길은 어쩌면 하나의 길이었을지 모른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에 선택은 없었다. 우리의 이별이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그랬다. 나는 그 길을 걸어갔고 그 길을 걸어 나왔다. 다만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는 웃었고 당신에게서 돌아오는 길에는 울었다.
다시는 걷고 싶지 않던 길 위를 걷기로 했다. 긴 시간이 준 다소 무책임한 위로가 나를 다시 걷게 했다. 당신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때의 나를 마주하는 일이었다. 당신을 떠올리는 일은 그때의 나를 기억하는 일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릿하게 스쳐갔다. 그래도 나는 길 위에 올랐다. 당신이 떠나고서야 사랑이 왔음을 알았던 서투른 나를 토닥여주고 싶어서였다. 다음에는 망설이지 말고 마음을 다해보라고 얘기해줬다. 사랑하는 마음을 자연스레 낭비해보라고 얘기해줬다. 무엇보다 값진 낭비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켈란젤로 광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풍경을 즐겼다. 나는 오랫동안 눈에 담기로 했다. 어스름한 때를 지나 어둠이 졌다.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내려와 숙소로 돌아가던 길에 만난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의 악기로 연주를 했다. 삶 곳곳에 예술이 묻어있다. 그들을 바라보는 누군가는 박수를 쳤고 춤을 추며 환호했다. 이처럼 자유로운 곳에서 나도 조금은 흐트러지고 싶었다. 해야만 하는 것들이 많았던 때에서 벗어나 마음이 원하는 것들에게로 따라가 보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필요했다. 여행은 적어도 그랬다.
여행 가방에 하나라도 더 넣어보겠다며 꾹꾹 눌러 담던 옷들과 비상약들 끝에는 이유라는 것이 있었다. 혹시라도 삐져나올까 얼마나 눌러 담았는지 모른다.
각자의 삶만큼이나 다양한 이유들이 우리의 여행에 있다. 어느 여행지에서 그 이유들이 흘러나올지 모르지만 그것들이 나만의 여행을 만들 것이다. 이유가 없을지라도 괜찮다. 어떤 이유든 감정이든 넉넉하게 안을 수 있는 것이 여행이다.
한 번의 여행으로 내 삶에 많은 것들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넉넉해진다. 여행이 나를 안아주던 넉넉함을 기억하며 나도 누군가를 안아줄 용기가 생긴다. 그때의 나를 안아주게 된 것도 여행이었다. 특별한 것을 남기지 않더라도 여행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머물렀던 시간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신에게 닿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순간 끝에서 피렌체를 만났다. 당신을 만난 곳도, 당신과 이별할 수 있었던 곳도 모두 피렌체였다. 사랑과 이별이 한순간에 머물렀던 그때처럼, 나는 이 곳에서 다시 사랑했고 이별했다. 그리고 그때의 나에게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모두 피렌체 덕분이었다.
진짜 위로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분명한 답을 가진 날카로운 위로보다 따뜻한 위로를 찾고 싶었다. 그것이 정답과는 조금은 멀더라도 말이다. 사랑이든, 삶이든, 여행이든 정답만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니니까. 여기저기 헤매던 순간들이 모여 나를 이 곳에 데려다주었다. 이제 그만 헤매고 저기로 가야 한다는 말보다 이곳에서 마음껏 그리워해도 좋다고 했다. 마음을 에는 정확한 위로보다 더디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는 이곳만의 위로가 좋았다.
사랑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이별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필요한 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여기, 피렌체에 오라고 말이다. 넉넉한 품을 가진 이곳에서 마음껏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기를 바란다. 여행이 내게 주던 넉넉한 품처럼 나도 그대에게 여행이 되기를 기도한다.
삐져나오는 마음을 억지로 누르지 말고 흘러가게끔 두어도 괜찮다. 나도 그렇게 흘려보냈고 흐르다가 여기까지 왔다. 마음이 원하는 것들에게로 따라 가보는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 여행이고, 삶이고, 사랑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