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본래 어떤 적극적 본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악'이라는 이름은 단지 선이 상실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For evil has no positive nature; but the loss of good has received the name 'evil.')(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 중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독립적인 실체가 아닌 "선의 결여" 또는 "선의 왜곡"으로 보았습니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모든 창조물은 본래 선하지만, 그 선함이 손상되거나 부족해질 때 악이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훔치는 것은 기본적인 생존 욕구라는 선한 본성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악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악을 정의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자유의지, 도덕적 책임, 선의 회복 가능성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모든 창조물이 본래 선하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악은 본질이나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선이 부족한 상태에서 발생한다고 했습니다. 마치 어둠이 빛의 부재로 인해 생기는 것처럼, 악도 선이 없어서 생기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벌어진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 학살이나 여러 전쟁의 비극은 단순히 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의도적 선택과 조직적인 선동,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극단적인 악행은 단순히 선의 결여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한 결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통찰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악을 선의 결여로 본다면, 악을 극복하는 방법은 선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무지로 인해 선이 훼손된 결과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생 가능 에너지로의 전환, 지속 가능한 자원 사용, 자연 보호에 대한 교육 등 선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또한, 사회적 불평등은 인간관계에서 선이 부족한 상태를 보여주며, 이를 해결하려면 공정한 분배 정책, 소외된 계층에 대한 지원 강화, 평등한 기회 제공 등 적극적인 선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단순히 악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회복하고 넓혀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악의 부재설은 통찰을 주지만, 모든 악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대량 학살이나 고문 같은 극단적 악행은 인간의 의도와 조직적인 억압에서 비롯된 적극적인 악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철학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 "구조적 악"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구조적 악의 예로는 체계적인 인종 차별이나 경제적 불평등이 있습니다. 이는 사회 구조와 제도가 특정 집단에 불이익을 주며 악을 조장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계층이 지속적으로 사회적, 경제적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구조적 악의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악이 개인적 선택의 결과가 아닌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할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을 부정적인 상태로만 보지 않고, 선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악을 비난하는 데 그치지 말고 선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기후 위기는 재활용, 에너지 절약, 대중교통 이용 등 일상에서의 구체적 행동으로 대응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은 자원 봉사, 기부, 평등한 기회 제공을 통해 선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선이 부족한 상태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더 나은 자신과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