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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Feb 02. 2024

운명은 인과법칙과 같다

  스토아 철학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습니다. 주로 현대인의 각종 감정적 문제에 대한 해결방법을 제시합니다. 슬픔, 분노, 집착, 모멸감 등 부정적 감정을 해결하는 매우 설득력있는 처방으로 다가옵니다. 그 이유는 스토아 철학이 인간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철학책들과 달리 심리치료, 정서이해에 관련된 내용이 더 많습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을 부정적인 감정 치료법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스토아 철학을 반쪽만 받아들이는 셈입니다. 심리 치료는 병리적 심리 증상을 다룹니다. 목표는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반면 철학은 삶 전체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바꾸는 데 목표가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본래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치료하는 처방이자 방법입니다. 잘못된 감정과 욕망에 대한 이해로 인해 불행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삶의 기술’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크게 물리학, 윤리학, 논리학을 다룹니다. 이 세 가지 중 오늘날 스토아 철학을 다룬 책들은 주로 윤리학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에서 세 가지 분야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토아 철학자 크리시포스는 이 세 분야를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스토아 철학 전체를 하나의 정원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이 정원에서 열리는 열매는 윤리학입니다. 윤리학은 행복한 삶의 성취를 돕습니다. 윤리학이라는 열매가 잘 맺으려면 좋은 토양이 필요합니다. 이 토양에 해당하는 것이 물리학(자연학)입니다. 솜씨 좋은 정원사는 정원의 토양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기본이 바로 서야 정원의 풀과 나무를 잘 돌볼 수 있습니다. 논리학은 이 정원의 울타리입니다. 울타리는 정원을 보호합니다. 외부 동물이나 잡초의 침입을 막습니다. 논리학은 정원에 오류가 들어오지 못하는 보호막 역할을 합니다. 즉 사고의 오류를 막아줍니다.


  크리시포스의 비유를 빌려 우리가 스토아 철학을 읽는 이유를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정원에 행복이라는 열매를 맺고 싶어 하는 정원사입니다. 그래서 정원의 식물에 온갖 정성을 쏟습니다. 그런데 정원사의 노력에도 자꾸 식물이 시들시들합니다. 원하는만큼 열매를 맺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식물을 더 정성껏 돌보지만 큰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 정원사에게 스토아 철학자가 충고합니다. 열매를 많이 거두려면 정원의 토양을 돌보라고 합니다. 땅이 건강해야 그 위에서 자라는 식물이 건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정원사는 자기 삶의 정원에서 열매가 잘 열리지 않는 이유를 깨닫습니다.


  그럼 이제 스토아 철학의 자연관을 살펴볼까요? 스토아 철학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고대 철학이지만 자연을 종교적으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초월적 신이 자연을 창조하고 운행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에 기적과 같은 예외적인 사건이 존재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모든 사물과 사건은 자연 속에 존재합니다. 심지어 신도 자연에 속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자연 속 사물은 모두 인과법칙에 따릅니다. 즉 어떤 것은 원인이고 다른 것은 결과입니다. 원인 없는 결과, 예를 들어 초월적 존재의 개입과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제논은 “운명이란 끝없는 인과관계의 사슬이다. 이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운행되는 이유 혹은 공식이다."(Fate is the endless chain of causation, whereby things are; the reason or formula by which the world goes on.)라고 말했습니다. 운명이 곧 인과관계의 사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운명’이라는 말을 비과학적으로 사용합니다. 자연을 벗어난 초월적 신의 개입과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에서 ‘운명’이란 인과법칙입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곧 운명이다 라고 말하는 셈이죠.

사실 과학적 사고를 하며 살아간다는 현대인들도 많은 경우 비과학적 믿음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뭔가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요? 그 문제와 연관된 모든 상황을 이성적으로 따져보고 그 원인을 찾으려 하나요? 아니면 “난 왜 이렇게 운이 없지?”라고 툴툴거리나요? 일이 자꾸 꼬이기만 하면 답답해서 점쟁이를 찾아가거나 부적을 붙이지 않나요? 중요한 시험을 앞둔 자녀를 위해 종교기관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요?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현대인보다 2천년이 넘는 과거의 스토아 철학자들이 더 과학적 사고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요즘 스토아 철학에 열광하는 사람들 중에는 과학자, 실리콘 밸리 기업인과 같이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인지 행동 치료(CBT)도 합리적인 사고와 판단을 강조합니다.


  스토아 철학은 아직도 비과학적 사고와 판단으로 인해 감정이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해 불행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은 생각의 오류와 미신입니다. 이 오류와 미신을 몰아내고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삶을 바라보세요. 그래야 불행을 없애고 행복이라는 열매를 얻을 수 있는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은 행복한 삶의 기술(ar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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