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건의 피해자가 있다. 대중은 피해자의 불행에 공감하며 함께 슬퍼한다. 공감은 피해자를 향한 따뜻한 위로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간혹 피해자를 향해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발견할 수 있다. 어떻게 같은 인간으로 불행에 빠진 피해자를 공격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상적 피해자"(ideal victim)란 개념이 있다. 노르웨이의 범죄학자 닐스 크리스티(Nils Christie)는 198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상적 피해자(ideal victim)”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상적 피해자란 사회적으로 ‘도덕적 순수성’이 인정되고, 피해 사실이 분명하여 동정과 지지를 받기에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전형적인 이미지를 뜻한다.
예컨대 힘없는 노인이나 아동이 폭행 피해를 입었을 때, 대중은 이들을 ‘이상적 피해자’로 간주해 즉각적이고 깊은 연민을 표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피해자는 각자의 성격, 환경, 심리적 대처 방식 등이 달라서 대중이 기대하는 ‘피해자다움’ 혹은 ‘이상적 피해자’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피해자가 너무 차분하거나 논리적인 태도를 보일 때, 혹은 사회적 기대(“억울하고 힘든 표정을 짓고 슬퍼해야 한다”)에서 벗어난 정서 표현을 보이면, 오히려 사람들은 그 피해자의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왜 저렇게 감정이 없어 보이지?”라는 반감을 가질 수 있다.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한다. 그런 요구와 기대가 어긋날 때 반감을 가진다는 설명이다.
다음은 "감정 규범 이론"(Emotional Norm Theory)이 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표출해야 한다고 사회적으로 기대하는 감정(feeling rule, emotion norm)을 가진다. 예를 들어 가까운 사람을 잃었을 때 “슬퍼해야 한다”거나, 큰 위협이나 사고를 당했을 때 “두려워하거나 충격 받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식의 사회적 규범이 존재한다.
실제로 피해자가 의연하거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사건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이면, 사람들은 “가짜 같다”거나 “진정한 피해자 같은 느낌이 안 난다”고 평가하여 공감보다는 거리감을 느끼거나 심하면 비난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이는 특히 성폭력 피해자나 가정폭력 피해자 등에 대해 사회적 편견이 깊은 경우에 두드러지는데, 피해 사실을 진술할 때 눈물을 흘리거나 격정적으로 호소해야만 ‘진실’이라 믿는 경향이 보고된 바 있다. 그렇지 않으면 “너무 차분하네, 거짓말하는 것 아니야?”라고 의심을 받기 쉽다.
마지막으로 심리학자 Melvin J. Lerner가 제시한 “공정한 세상 가설(Just World Hypothesis)”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고 싶어 하기 때문에, 불행을 겪은 사람에게서 ‘책임’을 찾으려 한다. 피해자의 태도가 사회적 기대와 어긋나면, “저런 식으로 대응하니 저런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식의 2차 가해나 피해자 비난이 발생하기도 한다.
즉, 피해자가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모습을 보여야 “진짜 억울하고 책임이 없는 피해자”처럼 느끼는데, 논리적으로 말하거나 침착한 반응을 보이면 “어딘가 수상해 보인다”는 부정적 편견이 생길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 또한 피해자의 태도가 기대되는 ‘피해자상’과 다를 경우, “공정한 세상”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편향적 해석을 하여 피해자를 의심하거나 책임을 돌리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회학적, 심리학적 설명을 들으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머리 속을 어느 정도 들여다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객관적, 학문적 이해이지 피해자를 비난하고 탓하는 사람들에게 공감적 이해를 할 수는 없다. 피해자가 그들이 생각하는 피해자다움의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불행 앞에 자신이 가진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인될 수 없다.
먼저 이성적으로 이해한 후에 감성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만 피해자를 대할 때는 달라야 한다. 먼저 가슴으로 그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나중에 피해자가 상처를 조금이나마 치유한 후에야 그 사람이 이성적 판단으로 삶을 재정립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런데 오늘 이런 순서를 지키지 못하는 이들을 보며 깊은 안타까움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