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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영 Feb 04. 2024

2. 스토아 철학은 과학이다

  스토아 철학이 목표로 하는 바람직한 삶이란  ‘자연에 따르는 삶’이다. 이런 삶을 살려면 먼저 ‘자연’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모르는 걸 어떻게 따라 살 수 있겠는가? 스토아 철학을 다룬 책들을 여러 권 읽으면서 이 부분이 이상했다. 저자들이 스토아 철학의 자연관을 잘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관은 건너뛰고 바로 스토아 철학의 인간 본성론으로 넘어갔다.


  스토아 철학의 자연 개념이 무시되는 이유를 짐작해 본다. 영어 단어 ‘nature’는 우리말로 때론 ‘본성’, 때론 ‘자연’으로 번역된다. 자연과 인간 본성의 의미가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으니 ‘인간의 본성’에 초점을 맞춰 설명하고 ‘자연’은 간략하게 다루면 충분하다 생각했을 것이다. 스토아 철학이 아무리 현대적이라 해도 형이상학적, 종교적 표현이 없지 않다. 신, 로고스, 영혼과 같은 개념들이 자연을 설명할 때 등장한다. 현대인들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껄끄럽다. 그래서 있는 듯 없는 듯 살짝 다루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에서 자연 개념은 절대 가볍게 다룰 내용이 아니다.


  스토아 철학은 크게 물리학, 윤리학, 논리학의 세 분야로 구성된다. 이 세 가지는 마치 삼발이의 세 발과 같다. 어느 하나가 없으면 전체적으로 다 무너진다. 이 셋의 관계에 대해 스토아 철학자 크리시포스는 정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스토아 철학 전체가 하나의 정원이라 하자. 이 정원에서 수확되는  열매는 윤리학이다. 열매가 잘 맺으려면 좋은 토양이 필요하다. 이 토양에 해당하는 것이 물리학(자연학)이다. 솜씨 좋은 정원사는 정원의 토양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열매를 길러 수확할 수 있다. 논리학은 이 정원의 울타리다. 울타리는 정원을 보호한다. 외부 동물이나 잡초의 침입을 막아준다. 논리학은 정원에 오류가 들어오지 못하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 흙이 없으면 식물이 자랄 수 없고 열매를 거둘 수 없다. 물리학을 모르면 윤리학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너무 겁낼 필요는 없다. 여기서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을 너무 자세하게 다루지 않아도 된다.


  스토아 철학의 물리학은 현대의 고전 물리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연 속 모든 사물은 인과 법칙의 사슬에 의해 존재하고 변화한다. 어떤 사물이 원인이 되고, 다른 사물이 결과가 되는 인과 관계가 유일한 자연법칙이다. 즉 자연은 초월이나 기적이 개입하지 않는 닫힌 합리적 체계다. 바로 우리가 과학 시간에 배운 그대로의 자연관과 같다.


  자연은 닫힌 체계인 동시에  완벽한 질서와 조화를 갖춘 체계다. 자연 속에는 오류가 없다. 오류가 없으니 당연히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도 없다. 이런 스토아 철학의 자연관이 너무 낙관적인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자연재해로 인해 재산을 잃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이 있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끔찍하고 잔인한 모습을 어떻게 질서나 조화라고 표현할 수 있나? 무질서와 부조리가 넘치는 곳이 자연 아닌가?


  이런 반론에 스토아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에픽테토스는 엔키리디온 8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당신이 바라는 대로 일어나길 원하지 말라. 다만 원래 벌어지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일어나길 원하라. 그러면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자연재해, 재난, 동물들의 잔인한 행동을 보면 우리는 분노하고 원망한다. 우리는 그런 자연의 부조리 앞에서 악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 부조리한 악을 고치려 한다. 자연재해는 도덕을 초월한 자연 현상이다. 동물들의 잔혹성은 그들의 타고난 본성이다. 우리 입장과 기준에서 본 재난이고 잔인함일 뿐이다. 그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을 따르는 삶’이다.


  스토아 철학은 자연을 현대인처럼 과학적으로 이해한다. 물론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여러 가지 차이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차이점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의가 중요하다. 우리는 스토아 철학을 이해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관을 그대로 떠올리면 된다.


  제논은 “운명이란 끝없는 인과관계의 사슬이다. 이로부터 만물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 운행되는 이유 혹은 공식이다."(Fate is the endless chain of causation, whereby things are; the reason or formula by which the world goes on.)라고 했다. 우리는 흔히 ‘운명’이라는 말을 비과학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에서 ‘운명’이란 인과법칙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곧 운명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사실 현대인들도 비과학적인 경우가 많다. 뭔가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불운을 탓한다. 불운을 극복하기 위해 점쟁이를 찾는다. 인과법칙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가 개입해서 자기편을 들어주길 바란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적을 바란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스토아 철학자들은 말한다. 삶을 과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삶을 불행하게 하는 원인은 악마가 아니라 미신과 오류에 빠진 당신들의 생각 때문이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삶을 바라보라. 그렇게 할 때 불행을 극복하고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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