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무심코 던진 말에 상처받은 경험이 있나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지만, 그 말이 자꾸 머릿속을 떠나지 않죠. 추측과 확신 사이를 오가며 상처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밤새 잠을 설쳐가며 괴로워하게 됩니다.
다음 날, 그 말을 한 상대에게 무슨 뜻인지 묻습니다. 운이 좋으면 오해를 풀 수 있지만, 많은 경우 더 큰 다툼으로 번집니다. 솔직한 대화의 시도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게 좋은 거라며 덮어두려 하지만, 마음속의 앙금이 쌓여 감정을 다치게 하면, 결국 간접적인 앙갚음을 하게 됩니다. 상대를 무시하거나 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뒷담화를 하며 복수하기도 합니다.
대화와 소통에 문제가 생기면 삶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통과 대화에 대한 이해는 삶 전체에 대한 이해에 이르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정보와 기술의 발달로 인해 소통의 시대라고 불립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전 세계 어디서나 실시간으로 소통이 가능해졌으며, 이는 개인의 삶부터 기업과 국가의 운영까지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소통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사회적 관계 형성과 유지, 각종 비즈니스 활동, 정치적 참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소셜 미디어와 메신저는 친구, 가족, 동료와의 지속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하여 사회적 유대감을 강화합니다. 기업들은 내부 직원 간의 소통과 외부 고객과의 소통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신뢰를 구축하며, 시장의 요구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시민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정치적 의견을 나누고, 조직화하며, 직접적으로 정치 과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통 기술의 발전과 양적 증가가 진정한 소통의 질적 향상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실한 소통이 단절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메신저와 소셜 미디어를 통한 소통은 짧은 메시지와 이미지 중심의 소통을 특징으로 합니다. 깊은 대화와 소통보다 순간적인 감정의 표출과 반응을 유도합니다. 엄청난 양의 정보들이 쏟아지면서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묻혀버리는 일도 허다합니다. 가짜 뉴스나 왜곡된 정보가 진실을 가리면서 사람들 간의 신뢰는 저하되고 소통의 질은 떨어지는 현상도 허다합니다.
표면적이고 즉흥적인 소통이 주를 이루면서 진정한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이는 감정적 단절, 공감의 부족, 관계의 피상화로 이어집니다. 때문에 사회적 고립으로 인한 정신 건강의 문제를 야기하고,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 잘못되고 편향된 정보로 인한 집단 지성의 왜곡과 같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통의 시대로 특징지워지는 현대 사회는 오히려 진정한 소통이 부족하거나 왜곡되는 소통의 부재로 이어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는 바로 이런 소통의 문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사유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하버마스는 현대사회의 각종 문제들을 진단하며 그 원인으로 대화와 소통을 통한 사회적 이해와 합의의 실패를 들었습니다.
소통 부족으로 인해 사회적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고, 특정 집단이 정보를 왜곡하거나 통제하여 이익을 추구하여 진정한 이해와 합의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소통의 부재로 인해 공론의 장이 위축되고 시민들의 사회, 정치적 참여가 저해되어 민주주의를 약화시킵니다. 소통의 부족이나 부재로 인해 사람들 간 신뢰가 약화되어 협력과 연대의 공동체가 붕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이런 문제들이 모두 대화와 소통의 문제라고 진단하고 해결책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런 노력이 반영된 것이 바로 의사소통 행위이론(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입니다.
우리는 보통 말과 행위를 분리해서 생각합니다. 말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고, 행위는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행동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목적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의 의도와 목적을 공유하고, 공동의 이해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말은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상호 작용을 통해 사회적 행위를 수행하는 도구로 작용합니다.
하버마스는 말이 일종의 행위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는 "발화 행위"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언어를 통해 의도를 표현하고, 상대방과 상호작용하며, 특정한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약속을 하거나 명령을 내리는 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그 자체로 특정한 행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의사소통을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닌 사회적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의 이론에서는 말이 단순한 전달 수단을 넘어, 상호 이해와 합의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행위로 작용합니다. 이를 통해 하버마스는 의사소통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사회적 관계와 규범의 형성에 있어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의사소통 행위이론의 저변에는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이 흐르고 있습니다. 하버마스는 철학자인만큼 현대 사회의 문제를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유했습니다. 그는 현대 사회의 지배적인 사고방식이 도구적 합리성라고 말했습니다.
이 도구적 합리성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 목적 지향적 :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찾는 데 중점을 둡니다.
- 효율성 강조 : 목표 달성을 위한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합니다.
- 기술적 사고 : 과학과 기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 방식입니다.
- 수단과 목적의 분리 : 수단의 효율성을 독립적으로 평가합니다.
하버마스는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이 효율성과 목적 달성에만 집중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사람들을 단순히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경우 인간 소외의 문제를 야기하며, 타인과의 상호 이해와 협력을 가로막아 사회적 연대감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자연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간주하여 환경 파괴와 생태 위기를 초래하며 자신과 다른 신념이나 문화적 다양성과 가치를 훼손하는 문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반면 의사소통적 합리성(Communicative Rationality)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집니다.
- 상호 이해 지향 : 의사소통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통된 의미를 형성합니다.
- 합리적 담론 : 모든 참여자가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 상호 주관성 : 개인의 주관적인 이해가 상호작용을 통해 공통의 이해로 발전합니다.
- 민주적 절차 : 합리적 의사소통 과정을 통해 공정하고 민주적인 결정을 추구합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도구적 합리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됩니다. 즉 오로지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타인을 대하여 생기는 인간 소외나 사회적 연대감 약화 문제는 상호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의사소통을 통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단절로 인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서로의 입장을 존중하며 대화를 나누면서 오해를 풀고 공감대를 형성할 때 의사소통적 합리성이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소통적 합리성은 합리적 담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대화에는 다양한 방해요소들이 개입합니다. 나이, 학력, 직급 등이 높다는 이유로 상대방의 말을 무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한 각종 편견과 허위 의식으로 인해 진정한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대화를 방해하는 이런 요소들을 배제하고 오로지 합리성만을 기준으로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입장과 이익만을 고집하지 않고 상호 작용을 통한 공통의 이해를 도출하고 각 개인의 주관적인 관점이 서로의 이해 속에서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가 민주적인 과정과 절차를 거쳐 합의에 이르는 환경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이제 하버마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대립되는 두 합리성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반영되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를 체계(System)와 생활세계(Lifeworld)로 나눕니다. 체계는 경제와 정치 같은 공식적 제도로 구성되며, 도구적 합리성을 따릅니다. 생활세계는 일상적 상호작용과 문화적 배경을 포함하며, 의사소통 합리성을 따릅니다.
첫째, 시스템(System)은 경제와 행정 조직과 같은 제도적 체계를 지칭합니다. 이 체계는 사회의 물질적 재생산을 담당하는 기능적이고 효율지향적인 메커니즘입니다. 여기에 속하는 경제 시스템은 주로 돈과 같은 매개 변수를 통해 운영되며, 행정 시스템은 국가와 같은 행정 기구로 법률과 규제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공공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둘째, 생활 세계(Lifeworld)는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상호작용하는 영역입니다. 개인들은 이 영역 속에서 의미를 공유하고, 문화적 전통과 사회적 규범을 재생산합니다. 가령 생활 세계 속에서 설날, 추석과 같은 명절을 지키며 세대 간 문화적 가치와 신념, 전통 등을 전달하고 유지하는 문화적 재생산이 이루어집니다. 지역 사회의 동호회 모임, 자원 봉사 활동 등을 통해 상호작용, 관계 형성을 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소속감을 느끼는 사회적 통합이 이루어집니다. 자신과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모인 여러 사회적 단체나 활동을 하면서 사회속에서 자신의 역할과 위치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형성하게 됩니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와 시스템이 상호 의존적이지만, 서로 다른 논리에 따라 운영된다고 주장합니다. 생활세계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기반하며, 사람들 간의 이해와 협력을 강조합니다. 반면, 시스템은 기능적 합리성에 기반하여 효율성과 목적 달성을 중시합니다.
시스템이 생활세계를 지배하고 침투하는 과정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식민화"라고 부릅니다. 경제 시스템이 사람들의 일상 생활에 과도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 개인의 삶의 질과 사회적 관계가 훼손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높은 주거비와 의료비로 인해 가족 간의 유대가 약화되거나,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가 개인의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행정 시스템이 과도하게 개인의 자유와 자율성을 제한하는 경우, 생활세계의 자율적 의사소통과 문화적 다양성이 위축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나친 감시와 규제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자유로운 표현을 억압할 수 있습니다.
생활세계는 시스템의 식민화에 저항하고,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을 기울입니다. 동시에, 시스템은 생활세계의 요구에 맞추어 조정되고 변화할 수 있습니다.
저항의 예로는 교육 시스템에 대한 저항으로 대안 교육 운동을 벌이거나 학생 시위를 하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노동 시스템에 저항하여 노동조합 활동을 하거나 직장 내에서 노동환경을 개선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저항의 예입니다.
시스템에 대한 저항 외에 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원이나 의료기관에서 환자의 경험과 필요에 맞춰 의료 서비스를 조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도시 계획을 할 때 지역 주민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공청회와 워크숍을 개최하는 것도 조정의 예입니다.
하버마스는 현대인들에게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감정적 반응 대신 이성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오해와 갈등으로 인한 많은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이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동등한 발언 기회를 가지고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민주주의가 어느때보다 발전한 현대 사회지만 지금도 나이, 학력, 재산, 계급 등의 이유로 이상적인 민주적 대화 환경이 갖춰지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현대 사회는 경제와 행정 시스템이 역사적으로 어느 때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시장과 공공 영역에서의 대화의 논리가 개인들 간의 사적인 대화에도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버마스는 이를 '생활 세계의 식민화'라고 지칭합니다. 우리의 대화를 이런 식민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대화를 정상화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대화의 해방은 우리의 삶을 진정한 소통과 행복으로 이끌어줄 열쇠가 될 것입니다.
이 글은 이전 포스팅과 같은 주제입니다. 이전 포스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재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