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는 애비게일 슈라이어라는 저널리스트(기자, 자유기고가)이다. 저자의 경력을 통해 이 책의 성격에 대해 가늠해볼 수 있다. 일단 교육 및 심리학 분야의 학자나 상담 전문가,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는 점은 살짝 책 속에 담은 여러 주장의 신빙성에 대한 의심을 하게 한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작가의 이력이 이 책의 장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은 굉장히 논쟁적인 책이다. 자녀 교육에 관련된 수 많은 이론과 집단, 단체에 대한 가열찬 비판이 수시로 등장한다. 이렇게 논박할 상대가 많을 때 학자나 전문가들은 그들 분야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길고 지루한 이론적 설명을 해야 한다. 아마 이 책이 그런 방식으로 내용을 풀어나갔다면 이 정도 분량의 책 1권에 모든 내용을 담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녀를 기르는 수 많은 평범한 부모 입장에서 출발한다. 이론적 정당성보다는 자녀 양육에 꼭 필요한 실천적 내용들로 넘쳐난다. 그래서 부담없이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자기 주장의 근거와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하고 있을까?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과 주장이라도 근거가 없으면 신뢰하기 어렵다. 이런 문제를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나눈 인터뷰로 대신한다. 자기 주장이 이러한데 관련 분야의 학자, 의사, 부모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한다. 학자가 아닌 저널리스트로서 활용할 수 있는 영리한 접근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접근 방법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다음으로 이 책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이 책의 원제목은 [Bad Therapy: Why the Kids Aren't Growing Up]이다. 그대로 직역하여 옮기면 "나쁜 치료법 : 아이들은 왜 성장하지 않는가?"이다. 원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어서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그런데 한글 번역은 한 걸음 더 나아간가. 제목 "부서지는 아이들"은 굉장히 자극적, 도발적이다. 게다가 부제 "다정한 양육은 어떻게 아이를 망치는가?"로 했다. 책의 내용을 제목으로 끄집어내어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면서 '아이를 망친다'는 말로 문제를 더 날카롭게 제기한다. 필자가 출판사 사장이었다면 제목 번역을 이렇게 하자고 제안한 직원에서 보너스라도 주었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려되는 점도 있다. 도발적인 한글 제목으로 인해 책의 판매량은 늘겠지만, 책의 내용으로 인한 사회적 영향력이 너무 감정적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러나 우리 국민과 사회의 필터링 역량을 생각할 때 지나친 우려는 하지 않으려 한다.
이 책의 목차 구성을 살펴보자.
저자의 말. 우리 아이들은 왜 병들어가고 있는가
1부. 독이 된 치료
1장. 부모의 불안을 먹고사는 사람들
2장. ‘치료의 시대’가 불러온 위기
3장. 우리를 속이는 10가지 말
2부. 다정한 양육, 바이러스처럼 퍼지다
4장. 공감과 배려는 어떻게 아이들을 망치는가
5장. 연약한 괴물들의 탄생
6장. 트라우마 제국의 왕들
7장. 아이의 모든 감정을 캐내자
8장. 어린 나르시시스트의 출현
9장. 권위 잃은 부모, 무너지는 아이들
10장. 훈육을 아끼고 약을 먹여라
3부. 우리가 답을 찾아야 할 곳은 상담실이 아니다
11장. 아이의 삶에서 한발 물러날 용기
12장. 삶에 대한 면역력을 키워준다는 것
먼저 1부는 '심리 치료'라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망치고 있는 오늘날 사회적 현실을 고발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1장에서 심리치료가 아이들의 병을 오히려 키운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의원병"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의료 행위자가 치료 과정에서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현상"을 가리킨다. 자기 자녀가 문제 행동을 일으킬 때 부모는 문제의 원인을 몰라 불안하다. 그런 부모들에게 심리 치료 전문가들은 다양한 병명으로 원인을 밝혀준다. 그런데 그런 진단이 오히려 아이들의 마음을 다치게 한다는 내용이다.
2장은 이런 "의원병"으로 인해 청소년의 정신 건강 문제가 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가령 1990~2007년 정신 질환에 걸린 아동의 수가 35배 증가했다. 1950~1988년에 자살한 15~19세 청소년의 비율이 4배 증가했다. 사실 이런 아동, 청소년의 정신 건강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인식은 이미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다.
3장은 아이들에게 의원병을 불러 일으키고, 상황을 악화시키는 대표적인 접근법들을 정리한다. 대체로 이런 내용들이다. 아이들이 부정적인 감정에 집중하면 그 감정으로부터 받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커진다. 심리 치료는 아이들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부정적인 감정에 더 주목하게 하고, 과대포장하여 문제를 악화시킨다.
또한 아이들을 지나치게 보호하려고 한다. 멀쩡한 아이에게 심각한 정신적 장애가 있다고 규정하고, 아이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상담 전문가나 교사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과보호와 지나친 개입의 끝에는 약물치료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성장기 아이들에게 이런 약물치료는 정말 위험하고 잘못된 시도이다.
마지막으로 심리 치료 전문가는 아이들에게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심어준다. 아이들은 심리 치료를 받으며 부모가 자신을 괴롭히는 심리적인 문제의 원인이라고 믿게 된다. 부모를 신뢰하지 않고 심지어 증오하게 만든다. 이는 부모에게나, 아이들에게나 절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2부는 4장에서 미국 학교에서 활발하기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 정서 학습"(Social-emotional Learning)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도록 한다. 많은 교사들이 매일 아침 학생들이 등교하면 그날 학생들의 감정 상태를 표현하도록 한다. 마치 극장에 들어갈 때 매표소에서 '체크인'을 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이렇게 자신의 감정에 주목하고, 표현할 때 여러 가지 부작용들이 생긴다. 이에 대해 이 책은 한 유치원 교사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특히 아이들은 어떤 감정에 집중하면 그 감정을 더 크게 느껴요. 사회 정서 학습이라는 게 꽃 대신 잡초에 물을 줘서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131쪽)
사회 정서 학습이 긍정적인 효과 대신 오히려 학생들의 생활과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만 키우는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주장하는 "상태 지향성"과 "행동 지향성"에 대한 비교다. 행동 지향성을 가진 아이들은 어떤 목표나 과제에 초점을 맞추고 생활한다. 공부나 친구 관계, 놀이 등 아이들은 해야 할 일이 많다. 이렇게 해야 할 일에 집중하면 실패나 스트레스 상황에서 빠르게 집중하며 현재에 충실하게 생활한다. 반면 상태 지향성을 가진 아이들은 내면의 상태, 감정, 과거의 경험에 집중하는 경향을 가진다. 무게 중심이 과거의 기억에 맞춰지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사회 정서학습은 아이들로부터 행동 지향성을 억제하게 하고, 상태 지향성을 극대화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것이 저자가 문제를 제기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5장은 번역된 한글 제목에 나오는 "다정한 양육"에 대한 비판이다. 여기서 다정한 양육을 하는 주체는 학교다. 학교는 학생들의 잘못된 행동을 처벌하지 않고 '회복적 정의'를 우선시 한다.
"'회복적 정의'는 학교에서 학생의 모든 비뚤어진 행동을 도움을 원하는 외침으로 재해석하는 치료적 접근법을 뜻하는 공식 명칭이다."(157쪽)
이런 접근은 문제 행동을 한 아이들이 모두 과거 기억의 트라우마로 인한 희생자로 바라보게 한다. 이런 아이들은 피해자이므로 처벌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런 아이들의 행동을 용인하고 방치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다른 아이들에게 상처나 피해를 주게 된다. 또한 문제아를 피해자로만 규정하고 무조건 도와주려고 하면 오히려 문제아들이 스스로 문제를 반성하고 해결하려는 회복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 결과 아이들은 "연약한 괴물"로 재탄생한다.
6장에서 저자는 아이들을 트라우마의 희생자로 규정하는데 문제를 제기한다. 먼저 트라우마는 뇌와 신체 여러 부분에 영향을 남긴다는 이론에 대해 비판한다. 그 근거는 먼저 트라우마가 신체적 영향을 남긴다는 이론은 참전 용사의 트라우마에 해당하는 것이지 모든 아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쟁터에서 동료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는 찰나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의 트라우마와 아이들이 경험하는 지속적이고 일상적인 트라우마를 동일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트라우마 접근법은 아이들의 기억을 왜곡하여 오히려 없는 상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트라우마 기반 치료'와 '트라우마 기반 교육'은 아이에게 상처가 있다고 가정하고 치료를 시작한다. 그러니 당연히 의원병 효과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211쪽)
7, 8장은 아이들의 사생활뿐 아니라 부모와 가정의 비밀스러운 일도 어떤 주의도 하지 않고 묻는 학교의 설문조사를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설문조사에는 아이들의 내밀한 생각과 감정을 서슴없이 물을 뿐 아니라 부모의 억압적, 폭력적 언행, 심지어 부부관계에 대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런 설문조사는 아이 자신과 부모에 대한 부정적인 암시를 담고 있다. 또한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부정적인 '의원병 효과'가 뒤따른다.
또한 학교의 상담교사나 교사가 '공감'을 강조하며 학생들의 감정 상태에 주목하게 되면, 학생들은 오로지 자기 감정만을 앞세우게 된다. 때문에 다른 학생이나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다치게 하면 그 원인과 이유를 묻지 않고 공격한다. 저자는 아이들이 이전 세대보다 서로를 고발하는 분위기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진단한다. 자기 감정만 내세워 학생들간 상호고발이 난무하고, 그런 고발을 위해 친구가 남긴 글이나 사진 등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요즘 학교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사실 이런 모습은 미국 학교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학교도 마찬가지다.
9장은 부모의 권위가 추락한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 오늘날 부모들은 '좋은 부모'가 되려고 한다. 아이들을 꾸짖거나 체벌하지 않고 공감과 이해, 대화로 좋은 부모가 되려는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과 감정을 최대한 존중하며, 아이들의 선택대로 따르려고 한다. 이는 권위와 책임을 "외주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아이들을 공감하고 존중한다. 아이의 잘못을 제어하려는 부모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는다.
2. 아이들은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다.
3. 부모가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학교에, 상담기관에 데려간다.
4. 외부 기관에서 아이의 문제 행동의 원인을 판단하고 결정한다.
5. 부모는 외부 기관에 자녀 양육의 권위와 책임을 "외주화"한다.
아이들은 이런 과정에서 부모에 대한 신뢰와 존경을 상실한다. 부모로서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부모를 무능하고 무책임한 존재로 인식한다. 그로 인해 부모는 자녀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상실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어른의 권위가 필요하다. 자신에게 분명하게 지켜야 할 규칙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이끌어주는 어른이 필요하다. 부모가 그런 존재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한 아이들은 탈레반이나 극우단체와 같이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고 강요하며, 이를 어길 경우 가혹하게 처벌하는 곳에서 어른의 권위를 찾는다. 아이에게 달콤한 설탕같은 부모가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며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온화하고 부드럽게 양육하면 아이들이 잘 자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아무 증거도 없이 말이다). 꽃이 달콤한 설탕 가루 속에서 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꽃은 흙에서 가장 잘 자란다."(256쪽)
10장은 자녀의 잘못을 훈육하지 못한 부모들이 의지하는 최후의 보루로 '약물치료'를 선택한다고 지적하는 내용이다. 권위의 외주화로 인해 외부 기간 전문가가 처방한 약물을 선택하게 된다. 이런 약물은 불안과 우울을 해결하지만 아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또한 살아가며 꼭 필요한 불안과 우울까지도 갖지 않아 비정상적인 성장을 하게 된다. 이런 약물 치료로의 도피는 분명 부모의 무책임함 때문이다. 아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분명히 부모다. 때문에 외부 기관에서 아이에게 약물 치료를 처방하더라도 무기력하게 그 처방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아이는 약물 치료가 아닌 세상에서 자신의 가장 잘 아는 부모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3부는 저자가 생각하는 올바른 양육법에 대한 소개를 내용으로 한다. 먼저 11장을 살펴보자.
(심리 치료 전문가 등이 제공하는) "온갖 사소한 참견과 무의미한 경고로 혼잡한 우리의 현재 삶에서 더 평온하고 건강한 삶으로 가기 위해서는 '제거'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현재 자녀에게 해주는 모든 것 중에서 약 3분의 1을 제거하라. 아이들은 지금보다 뭔가가 더 적었을 때 훨씬 더 잘 컸다."(324쪽)
저자는 '알아서 자라게 놔두자'고 외치는 "렛 그로"(Let Grow) 운동을 추천한다. 이 운동의 창립자 피터 그레이는 지난 50~60년 간 아동 및 청소년의 독립적 활동이 줄어든 것이 그들의 정신 건강이 나빠진 '주원인'이라고 진단했다. 아이들은 부모, 상담 기관, 학교 등의 과보호 속에서 독립적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겼다. 아이들은 위험하더라도 타인의 간섭이나 보호를 받지 않고 스스로 어떤 일에 도전하여 성취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성취감을 느끼고 행복할 수 있다.
마지막 12장은 전체적인 결론을 제시한다.
"나쁜 것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하라. 상처에 묻은 흙을 깨끗이 씻어내면 몸은 스스로 치유하고 회복하게 되어 있다. 아이를 방해할지 모를 외부 오염 물질(불필요한 정신 건강 전문가, 전자 기기, 감시하고 간섭하기, 약물 등)을 없애기 전까지, 당신은 아이가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 알 수 없다."(368쪽)
이 책에서 소개되는 자녀 양육에 대한 분석과 진단이 우리나라와 너무나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리나라 역시 자녀를 양육하며 '지나친 공감'이 아이들에게 끼치는 부정적 영향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로 인해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이 아주 많아졌다. 이런 '지나친 공감', '다정한 양육'은 가정의 범위를 넘어 학교로 확산되었다. 어쩌면 그로 인해 학교와 교사들이 몸살을 앓고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근본 뿌리는 일부 학부모들이 학교와 교사에 부모와 똑같은 공감과 다정한 양육을 강요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서 학교와 교사, 부모 사이의 갈등을 주제로 더 긴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서는 무엇보다 잘못된 양육 방식으로 인해 병들어가는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다.
아이들은 연약하다. 보호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보호의 방식이 문제다. 온실 속 화초처럼 기르는 것이 진짜 보호가 아닌데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 아이들은 부족함, 어려움, 위험에 어느 정도 노출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런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다.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
이 책은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할 점이 많다. 일단 비판하는 상담 전문가, 학교와 제도, 부모를 극단적인 잘못을 저지르는 대상으로 몰아세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책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만큼의 부모와 관계자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이 책에는 분명히 과장이 있다. 더불어 비판하는 근거가 부족하다.
또한 모든 아이들이 공감과 회복, 용서와 이해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읽혀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직면하거나 위험과 불안을 감수하며 성장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백번 공감한다. 하지만 저자가 비판하는 방식으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치료해야 하는 아이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런 아이들에게도 저자와 같은 접근법으로 양육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녀 양육에 대한 전체적인 흐름과 방향에 대한 비판은 분명 귀기울여야 할 부분이 굉장히 많다. 그런 문제점에 대해 눈을 돌리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게 하는 정도에서 이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