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을 자아 중심적 상태를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강력한 힘이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게 만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상대방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려는 경우가 많다. 타인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폭력 사이에는 얇은 종이 한 장 정도의 차이밖에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타자', 즉 타인을 사랑한다. 사랑은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되어야만 가능하다. 그렇기에 타인이 없다면 사랑 또한 불가능하다. 하지만 때로는 우리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상대방의 존재를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고집만을 내세운다. 이러한 착각은 사랑이라는 가면을 쓴 모든 이들을 파멸로 이끈다. 이처럼 사랑과 착각 사이의 오해로 인해 얼마나 많은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타자'는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철학의 핵심 개념이다. 레비나스는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의 수업을 들으면서 현상학을 연구한 뒤, 1930년에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 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랑스에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처음으로 소개했다.
프랑스에서 철학자로 활동하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레비나스는 프랑스군에 입대해 통역 업무를 수행했으며,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겪었다. 그 결과 나치의 잔학상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는 나치의 악마성을 심각하게 경험하며 철학적 반성과 회의를 시작했다.
레비나스는 독일 철학을 연구하면서 주체 중심적 사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품게 되었다. 그는 서양 형이상학이 주로 주체의 관점에서 존재를 이해하려 한다고 보았다. 즉, 모든 존재는 주체의 경험과 이해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철학적 명제로 잘 나타난다. 이러한 접근은 주체가 세상의 중심이며, 모든 타자는 주체의 이해와 경험을 통해서만 존재 의미를 갖는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예를 들어, 친구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비록 내가 친구의 슬픔이 진짜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더라도, 만약 내가 친구의 슬픔을 강하게 확신한다면, "나는 친구가 슬프다고 생각한다, 고로 슬픔은 존재한다"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주체의 인식에서 비롯되며, 친구의 슬픔은 내가 그 존재를 파악하고 확신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주체 중심적 관점에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보았다. 주체 중심적 접근은 타자를 주체의 동일성 안에 포함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타자를 독립적이고 고유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주체의 이해 체계 안에서만 타자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이를 '존재론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친구는 스스로 슬퍼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타인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의미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친구의 슬픔이 타인의 인정을 받아야만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만약 내 슬픔을 인정하지 않는 친구가 있다면, 그는 나에게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서양 형이상학의 이러한 폭력성을 비판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재론적 폭력의 해악이 단순히 학문적 영역에만 그치지 않고 나치와 같은 악마적인 현실의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자아에서 타자로의 전환
레비나스는 철학적 탐구의 중심을 '자아'에서 '타자'로 이동시켰다. 그에게 타자란 자아와 절대적으로 다르며 독립적이다. 타자는 자아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으며, 자아의 범주를 완전히 넘어서는 무한한 존재이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내가 그를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믿는다 해도 반드시 그런 사람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는 나와 독립된 '타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친구 관계를 유지하려면 친구의 타자성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깨어질 수밖에 없다. 어느 날 친한 친구가 내가 모르는 낯선 말과 행동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알지 못했던 그의 다른 측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친구 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다. 계속 친구가 되려면 그의 낯선 부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우정을 유지할 수 있다.
레비나스는 자아에서 타자로의 전환을 말한 후 '마주침의 윤리학'으로 논의를 옮겨간다. 여기서 등장하는 개념이 바로 '타자의 얼굴'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레비나스는 왜 '얼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얼굴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가장 먼저 접하는 부분이다. 얼굴을 통해 타자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레비나스는 '얼굴'이라는 표현으로 타자와의 관계가 가장 본질적이고 즉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싶었다.
또한 얼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전달할 수 있다. 타자의 표정이나 눈빛에는 말로 표현될 수 없는 많은 의도와 감정, 생각이 담겨 있다. 타자와의 만남은 언어적 소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비언어적 소통의 복잡미묘함을 주고받는다.
마지막으로 얼굴은 인간 신체 중 가장 무방비 상태로 드러나 있는 부분이다. 손이나 팔처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그리고 항상 외부에 노출되어 있다. 즉 얼굴은 '취약성'을 나타낸다. 타인의 얼굴을 대한다는 것은 타인이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우리가 보호해야 할 존재로 나타난다는 의미가 있다.
종합하면 '타자의 얼굴과의 마주침'은 우리가 타자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며 그의 취약성에 대해 윤리적인 책임을 가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이 마주침은 타자와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인식에 타자를 가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타자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단순한 인식에 머물지 않고 타자를 위한 윤리적인 책임을 감당하는 무한 책임의 단계로 도약한다.
결론적으로,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철학은 '나'라는 감옥을 넘어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을 제시한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개인주의와 자기 중심적 사고에 빠져 타자의 고유성과 그들의 필요를 잊어버리기 쉽다. '나'라는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는 사랑조차도 타인을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변질되어 폭력성을 행사하게 될 위험이 크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우리가 타자와의 윤리적 책임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한 이론적 교훈에 그치지 않고, 우리 일상 속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구체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
레비나스의 사상은 현대 사회의 소외와 고립,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윤리적 지침을 제공한다. 타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그들의 고통과 필요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나은 사회를 구축할 수 있다. 이는 단지 개인의 윤리적 성장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연대와 협력을 촉진하여 더 정의롭고 포용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레비나스의 철학은 '나'라는 감옥을 넘어서, 타자와의 진정한 만남을 통해 우리의 인간성을 회복하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윤리적 성장을 촉진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그의 사상은 현대인의 삶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윤리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레비나스의 철학적 통찰은 대립과 반목의 폭풍이 몰아치는 세상이라는 바다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더 나은 인간, 더 나은 세상으로 인도하는 등대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