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삶에서 적어도 한 번쯤 이런 질문을 마주한다. SNS 프로필 속 웃는 얼굴, 회사에서 인정받는 능력 있는 모습. 이 모든 것이 나이지만, 과연 진짜 '나'일까? 우리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지만, 그 모습이 진정한 나와 일치하지 않을 때 내적 갈등을 겪는다. 부모님의 기대와 예술가의 꿈 사이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이러한 괴리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는 중세 신학과 철학의 종교적, 초월적인 본질에서 인간 자아의 근본을 찾지 않았다. 데카르트와 같은 합리론 철학자들처럼 타고난 이성적 능력에서 자아 형성의 출발점을 찾지도 않았다. 오로지 경험만이 자아 형성의 출처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백지'(tabula rasa) 상태이다. 그냥 아무 글씨도 없는 하얀 종이와 같다. 이것이 로크의 백지 이론이다. 이 백지 위에 감각적 경험을 통해 글과 그림이 쓰여진다. 그리고 '경험'에 대한 기억이 자아를 형성한다.
즉 로크는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에 '자신이 한 경험에 대한 기억'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우리의 자아 정체성은 '내가 기억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럴듯한 설명이다. 만약 내가 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가 했던 말과 행동에 의해 규정된다.
하지만 나의 본질과 자아는 '내가 기억하는 나'라는 설명만을 따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 문제는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정확한가 하는 문제가 있다. 많은 경우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부정확해진다. 게다가 기억은 왜곡되기도 한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2000년)는 독특한 서사 구조와 깊이 있는 주제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 속 주인공 레너드는 아내가 살해당한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단기 기억 상실증을 앓는다. 그는 새로운 기억을 형성하지 못하고 약 15분마다 기억이 리셋되는 상태다. 그럼에도 아내의 살인자를 찾아 복수하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주인공은 자신의 단기 기억 상실증을 보완하기 위해 메모, 폴라로이드 사진을 모은다. 심지어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등의 방법으로 중요한 정보를 기록한다. 주인공은 과거의 기억을 담은 메모, 사진, 문신을 남겨서 자신의 기억을 보존하려고 한다. 그렇게 기억을 보존해야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레너드의 삶을 시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며 보여준다. 관객들은 레너드와 함께 그의 과거를 퍼즐처럼 조각조각 맞춰가며 진실에 한 걸음씩 접근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레너드의 기억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가 믿었던 사실과 주변 인물들 역시 의심받기 시작한다.
그렇다. 기억은 항상 진실이 아니다. 무슨 창고에 물건을 쌓아두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기억이 아니다. 그 기억은 부정확하거나 조작, 왜곡된 것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만약 기억이 자아라면 기억이 왜곡되면 자아도 왜곡된다. 이런 기억의 왜곡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Henri-Louis Bergson)은 기억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했다. 과거 경험의 잔재가 축적되어 자동적으로 반응하게 하는 '습관적 기억'(habit-memory)과 과거 경험 그 자체를 생생하게 떠올리는 '순수 기억'(pure memory)이다.
베르그손의 기억 이론을 실생활에 적용해보면, 우리의 경험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일상적인 경험을 예로 들어보자.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의 추억을 생각해보면, 순수 기억은 놀이터에서 있었던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모래성을 쌓았던 촉감, 그네를 타며 느꼈던 바람, 친구들과 나눈 대화의 내용 등 모든 세세한 경험이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구체적인 기억들은 흐려지고, 대신 "놀이터는 즐거운 곳이었다"와 같은 일반화된 인상만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습관적 기억에 의한 왜곡의 결과다.
타인에 대한 기억도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자. 순수 기억은 그 친구와 함께했던 모든 순간을 포함한다. 좋았던 일, 나빴던 일, 평범했던 일 등 모든 경험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기억들은 왜곡된다. 긍정적인 경험들만 주로 기억나 "그 친구는 항상 좋은 사람이었어"라고 일반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인 경험들이 더 강하게 남아 "그 친구는 믿을 수 없는 사람이야"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이러한 왜곡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의 뇌는 현재의 생활에 유용한 정보만을 선별적으로 활용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복잡한 경험들을 단순화하여 일반화하는 습성이 있다. 반복된 경험은 자동화되어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기존의 인상에 의존하게 만든다. 게다가 우리는 현재의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곤 한다.
이런 왜곡된 기억은 우리의 현재 판단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친구에 대한 왜곡된 기억은 현재의 관계를 좌우할 수 있다. 베르그손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습관적 기억의 왜곡을 인식하고, 가능한 한 순수 기억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 객관적이고 풍부한 인식을 가질 수 있으며, 타인과의 관계도 더 깊이 있게 발전시킬 수 있다.
결국 베르그손의 이론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기억의 왜곡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여 더 풍부하고 진실된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철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물론 습관적 기억이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두 기억은 각자의 역할이 있다. 습관적 기억과 순수 기억을 각각 사람에 비유해보면, 그들의 역할과 특성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습관적 기억을 '실용적인 일꾼'으로, 순수 기억을 '창조적인 예술가'로 비유해 보자.
습관적 기억은 반복된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자동화된 반응이다. 이를 사람에 비유하면 '실용적인 일꾼'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실용적인 일꾼은 일상적인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반복된 경험과 학습을 통해 다양한 기술과 능력을 습득하고, 이를 일상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한다.
반면, 순수 기억은 개인의 특정 경험을 생생하게 떠올리는 기억이다. 이를 사람에 비유하면 '창조적인 예술가'로 설명할 수 있다. 창조적인 예술가는 깊이 있는 개인적 경험과 감정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독특한 경험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아이디어와 작품을 창출한다.
독창성이 그의 특징이다. 창조적인 예술가는 과거의 특정 순간들을 생생하게 기억하며, 이를 통해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발전시킨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감동적인 그림을 그리거나 시를 쓸 수 있다. 또한 그는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감정을 깊이 느끼고, 이를 표현하는 데 능숙하다. 이러한 감정적 풍부함은 그를 더욱 공감 능력 높은 사람으로 만든다. 창조적인 예술가는 끊임없이 자신을 탐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과거의 경험을 반추하며 현재의 자신을 정의하고, 미래의 방향을 설정한다.
하지만 두 가지 기억 중 현대인에게 부족한 것은 아무래도 순수 기억이다. 순수 기억은 우리의 자아에 따스함과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 틀에 박힌 일상인으로서의 자아로부터 탈출하여 창조적인 예술가와 같은 자아로 창의력이 넘치는 활기찬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보자.
순수 기억은 활력과 창의성을 불어넣는 강력한 원천이 될 수 있다. 옛 사진첩을 뒤적이거나, 예전에 썼던 일기나 편지를 다시 읽어보며 과거의 경험과 감정을 생생하게 떠올려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 즐겨 찾던 놀이터, 옛 친구들과 함께했던 장소 등 추억이 담긴 장소를 방문하여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향기를 맡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과거의 특정 순간과 연결된 감각 경험을 통해 순수 기억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순수 기억을 보존하고 성찰하기 위해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나 떠오르는 생각,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하는 일기 쓰기를 실천할 수 있다. 순수 기억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시나 소설을 쓰는 등 창작 활동을 통해 기억을 표현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보는 것도 좋다. 가족, 친구, 연인과 함께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는 활동이다.
새로운 장소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고, 색다른 경험을 통해 순수 기억을 자극하고 창의성을 키울 수 있다. 평소 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취미 활동을 시작하여 즐거움을 느끼고,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극을 받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얻고,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울 수도 있다.
조용한 곳에서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순수 기억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 명상을 꾸준히 실천하면 좋다. 현재 순간에 집중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알아차리는 마음 챙김 연습을 통해 순수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고 활용할 수 있다.
우리의 자아 정체성은 존 로크가 주장한 것처럼 경험과 그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되며, 이는 습관적 기억과 순수 기억 모두를 포함한다. 습관적 기억이 일상생활의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면, 순수 기억은 우리의 창의성과 정서적 풍요로움을 증진시킨다. 두 가지 기억의 균형 잡힌 활용은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과거의 경험을 되새기고, 그것을 현재의 삶에 의미 있게 연결하는 것은 자아를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과정이다. 앞으로 우리는 일상의 효율성을 유지하면서도, 순수 기억을 통해 자아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창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균형 잡힌 삶을 영위하고, 풍요로운 자아 정체성을 구축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