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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시선을 넘어 발견하는 삶의 의미 : 사르트르

by 정지영


현대사회의 속도와 삶의 의미

현대사회는 속도가 지배한다. 빠른 기술 발전과 정보 확산으로 우리의 일상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실시간 소통, 즉각적인 반응,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며, 모든 영역에서 '빠름'이 강조된다. 이는 개인, 기업, 국가 모두에 적용되어 속도 경쟁을 촉발한다.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생각은 현대인들을 끊임없이 달리게 만든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이 온다. 감기처럼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온다. 그 순간 ‘내가 대체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렇게 쉼 없이 달려서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질문 앞에서 분명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삶은 그냥 사는 것이지 ‘왜’라는 질문을 던질 대상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photo-1618238590010-2ea96cf44ec2.jpg?type=w1 © passionpursuit_pro, 출처 Unsplash


그런데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고 해서 곧바로 “삶은 의미 없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사실 우리의 삶은 많은 의미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재산을 늘리고 명품을 소비하는 물질적 가치와 의미가 넘쳐난다. 사회적 지위나 명예, 인기를 얻어 자아실현을 하려고 한다. 외모나 이미지 관리 역시 중요하다. 넓은 인맥을 구축하여 그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자기 능력을 극대화하는 것을 자기 삶의 의미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종류의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우리는 매 순간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열심히 살아가다 ‘사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과 마주치면 당황한다. 그런 생각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런 생각에 매달리다가 속도 경쟁에서 뒤처지면 낙오하기 마련이다. 우울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무엇 하나 도움이 될 것이 없는 생각이다. 그래서 빠르게 회피한다. 우리는 삶의 의미를 물을 만큼 여유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린다.




존재와 본질: 사르트르의 철학적 접근

장 폴 사르트르는 바로 이 ‘회피하고 싶은 질문’에 대한 답을 제시한 철학자다. 그의 철학을 따라가며 감기처럼 불쑥 찾아오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자.


사르트르는 삶은 원래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면서 시작한다.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다가 몰라서 선생님에게 물었는데 “그건 답이 없다.”라고 하는 것 같다. 대체 사르트르는 왜 삶에 의미가 없다고 했을까?


과거에는 인간의 삶에 종교적,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 왔다. 종교는 인간을 신의 창조물로 보며, 신이 부여한 의미와 함께 인간은 세상에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 삶의 의미는 신의 뜻에 있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도 인간은 특정 역할을 맡는다. 이 역할은 가족, 공동체, 국가로부터 주어진다. 즉, 인간 삶의 의미는 신의 명령이나 맡겨진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다.


그런데 사르트르에게 인간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그냥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jeté) 존재”일 뿐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목적, 의미, 필연성과 같은 개념으로 설명해야 하는데 사르트르는 그렇지 않다. 과학적으로는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살짝 기분이 나빠진다. 인간이 그렇게 하찮은 존재냐고 반박하고 싶어 진다.

photo-1583356230736-b5b9ecb85605.jpg?type=w1 © jimmy_conover, 출처 Unsplash


바로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가 뒤따른다. 이 명제에서 ‘본질(essence)’은 어떤 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근본적인 특성이나 성질을 의미하며, 보통 변하지 않는 고정된 속성으로 여겨진다. 반면 실존(existence)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가리킨다. 과거에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라고 생각해 왔다. 예를 들어 종교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형상(본질)에 따라 창조된다. 즉 인간의 본질이 먼저 있고, 인간은 이미 정해진 이 본질에 따라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르트르는 이 두 가지 순서를 거꾸로 뒤집는다.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본성이 없으며, 우리가 먼저 존재(실존)하고 난 후에 자유로운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

사르트르의 실존과 본질에 대한 명제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두 가지 상이한 존재방식에 대한 설명을 살펴보아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즉자적 존재’이거나 ‘대자적 존재’이다.


즉자적 존재는 의식이 없는 사물들의 존재 방식을 말한다. 예를 들어, 책상은 즉자적 존재다. 책상은 이미 정해진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그저 '책상'일 뿐이다. 책상의 목적과 기능은 이미 정해져 있고, 스스로 변할 수 없으며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다. 반면, 대자적 존재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할 수 있고,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예를 들어, 김한국이란 학생은 대자적 존재다. 김한국은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게 되고(실존), 그 후에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할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한다. 그는 의사가 될 수도 있고, 예술가가 될 수도 있으며, 이러한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명제는 바로 이 대자적 존재인 인간에게 적용된다. 인간은 미리 정해진 본질 없이 먼저 세상에 존재하게 되고, 그 후에 자신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고 만들어간다. 김한국의 경우, 그는 먼저 존재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 만약 그가 의사가 되기로 선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의사'라는 정체성이 그의 본질의 일부가 된다. 이는 즉자적 존재와는 대조적이다. 책상은 이미 '책상'이라는 본질을 가지고 만들어지며, 스스로 변할 수 없고 다른 것이 되기로 '선택'할 수 없다.




타인의 시선

사르트르의 철학은 삶을 우연성과 무의미함에 내팽개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자기 삶에 대한 자유와 책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와 책임은 '타인의 시선'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과 맞물려 복잡한 양상을 띤다.


사르트르에게 '타인의 시선'은 우리의 존재를 객체화하는 힘을 가진다. 타인이 우리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의 '대상'이 된다. 이는 우리의 자유로운 주체성을 일시적으로 박탈하고, 우리를 타인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에게 불안과 수치심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타인의 시선' 개념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를 들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닐 페리는 명문 사립학교에 다니는 17세 소년이다. 그는 연극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강력히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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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반, 닐이 연극 동아리에서 열정적으로 연기를 할 때, 그는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신의 꿈을 표현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마주할 때마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라는 '시선' 아래에서 자신이 다르게 정의되는 것을 경험한다.


아버지가 "넌 의대에 가야 해. 네 미래를 위해서야."라고 말할 때, 닐은 더 이상 예술적 열정을 가진 주체가 아니라 '의사가 되어야 할 아들'이라는 객체로 전락한다. 학교 연극에 주연으로 출연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가 "그런 시간 낭비할 여유가 너한테 없어."라고 반응하자, 닐은 자신의 꿈에 대한 확신을 잃고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자식'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는다.


이러한 아버지의 시선은 닐의 자유로운 주체성을 박탈하고, 그를 타인의 욕망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로 만든다. 결국 닐은 깊은 불안과 수치심, 그리고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는 자신의 꿈과 아버지의 기대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으며, 결국 비극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타인의 시선', 특히 부모의 기대가 자녀의 자아 인식과 삶의 방향 설정에 얼마나 깊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강렬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개인이 어떻게 타인의 시선과 기대에 맞서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던진다.


사르트르의 관점에서 볼 때, 닐의 비극은 그가 아버지의 시선에 완전히 종속되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정의하고 선택할 자유를 포기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타인의 시선을 넘어서

그러나 '타인의 시선'은 동시에 우리가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고 정의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본질을 재구성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삶의 의미를 찾고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기대나 사회적 규범에 맞춰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이는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영향받는 것으로, 사르트르가 말하는 '부정직'(mauvaise foi)에 해당한다. 진정한 자유와 책임은 이러한 외부의 압력에서 벗어나 자신의 선택을 하는 데 있다.


물질적 가치, 사회적 지위, 외모, 인맥 등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이러한 가치들을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강요된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고, 우리의 실존을 여기에 끼워 맞추려는 태도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치들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할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우리에게 '타인의 시선'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에 종속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제안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지만, 동시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고 자신을 정의해 나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삶의 의미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르트르의 철학은 우리에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그것을 초월하여 자유롭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아실현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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