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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짓의 철학 : 김춘수와 샤르트르의 만남

by 정지영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은 처음 발표된 후 바뀐 낱말이 있다. "우리들은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구절에서 '눈짓'은 원래 '의미'였다. 시인은 왜 그냥 두어도 어색하지 않은 '의미'를 '눈짓'으로 바꿨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미를 추구한다. 무슨 일을 할 때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해야 한다. 무엇을 가질 때도 의미가 있는 물건이어야 한다. 의미가 없는 일이나 대상은 무가치하고 쓸데없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가끔 우리는 "삶은 의미 없다"라고 말한다. 삶이란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일단 태어났으면 살아야 한다. "죽지 못해 산다"고 투덜거려도 어쨌거나 살아야 한다. 의미 없는 일이야 그만 두면 된다. 의미 없는 물건은 버리면 된다. 그런데 의미 없는 삶은 버릴 수 없다. 버텨야 한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삶에 의미가 없다고 했다. 진리와 가치, 삶의 의미를 가르쳐야 할 철학자가 삶에 의미가 없다니 너무 무책임한 허무주의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사르트르는 삶의 의미가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야만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르트르 철학의 핵심에는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가 있다. 이는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삶의 의미 역시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종교나 사회는 인간의 삶에 미리 정해진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왔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러한 외부적 의미 부여를 거부하고, 인간이 자신의 삶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는 '존재로의 투기(thrown into existence)'된 상태에서 시작한다. 쉽게 말해 순전히 우연에 의해 태어나서 세상에 던져졌다는 것이다. 세상에 던져진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은 없다. 그 의미는 다른 어떤 존재가 대신해 부여해 주지 않는다. 순전히 내 선택으로, 내 힘으로 만들어야 한다.


사르트르는 여기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과 다른 사물들을 구분한다.


먼저, 인간 외의 다른 사물은 즉자적 존재(être-en-soi)이다. 즉자적 존재는 그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돌이나 책상을 생각해보자. 돌은 그저 돌로서 존재할 뿐이고, 책상은 그저 책상으로서 존재한다. 돌이나 책상은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고민하지 않는다. 돌은 그저 거기에 있을 뿐이며, 책상도 그저 그 자리에 놓여 있다.


반면, 인간은 대자적 존재(être-pour-soi)이다. 대자적 존재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며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학생이나 예술가를 생각해보자. 학생은 단순히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예술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과 메시지를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한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간다.


이 지점에서 사르트르는 모든 인간이 대자적 존재로 살고 있다고 보지 않은 듯싶다. 솔직히 사르트르는 즉자적 존재, 즉 돌, 책상, 나무와 같이 이미 정해진 의미를 반성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인간답게 사는 게 아니라고 안타까운 목소리로 꾸짖는 사르트르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우리에겐 삶의 의미에 대한 수많은 규정들이 있다. 인간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만 한다는 수많은 도덕적 가르침이 존재한다. 경제적 풍요나 사회적 명예를 획득하는 것이 진정한 삶의 의미라고도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변주들이 존재하지만, 공통점은 미리 주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미리 정해진 삶의 의미, 인간 본질에 대한 규정에 자신을 끼워 맞춰 사는 것은 의식도 반성도 없이 살아가는 사물들과 다르지 않다.


결국, 인간의 삶은 미리 주어진 각본 없는 연극과 같다. 우리는 무대 위에 서 있지만, 대사와 행동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미리 정해진 대본은 없다. 이 무대 위에서 우리는 자유를 경험하고, 동시에 그 자유에 따르는 불안과 책임을 마주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의 의미이며, 인간 존재의 특별함을 보여주는 핵심이다.


김춘수 시인은 왜 자신의 대표시 <꽃>에서 '의미'를 '눈짓'으로 바꾸었을까? 시인은 우리 삶을 가득 채운 채 좀비처럼 무반성적으로 살아가는 '의미'들에 자신의 시를 가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하다거나, 사회적 명예가 없으면 실패한 인생이라는 속물주의적 의미를 피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눈짓은 닫힌 의미가 아니라 열린 관계를 말한다. 눈짓은 상대방을 내 의미에 가두지 않는다. 그저 상대방이 자신의 본질과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는 인간이 미리 정해진 본질이나 목적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가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김춘수 시인이 '의미' 대신 '눈짓'을 선택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의미'는 고정된 것을 암시하지만, '눈짓'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상징한다.


결국, 김춘수 시인의 '눈짓'은 사르트르의 철학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은 서로를 바라보고, 눈짓을 통해 고정된 의미를 넘어서며, 각자의 실존을 인정하고 새로운 본질을 만들어 나가는 존재이다. 이러한 시적 선택은 김춘수 시인의 철학적 통찰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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