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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의 [강의] 읽기

1권 1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by 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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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픽테토스의 [강의]를 차분히 읽어나가기로 했다. 한글 번역본이 있으나 잘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차라리 영어 번역본을 보기로 했다. 영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조금 더 쉽게 번역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문 번역, 학문적 번역에 비중을 두지 않고 그냥 잘 이해되고 잘 읽히는 데 중점을 맞추었다. 중간중간에 밑줄이나 볼드체로 처리한 것은 개인적 연구를 위한 것이지 원전과는 무관하다.

모든 능력 중에서 (곧 언급할 능력을 제외하고)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동을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문법학이 어느 정도 성찰의 능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문법학은 글이 쓰이거나 말해진 것에 대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음악은 어떤가요? 음악은 선율에 대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능력들 중 어떤 것도 스스로를 성찰하지 않습니다. 친구에게 무언가를 써야 할 때, 문법은 당신에게 어떤 단어를 써야 할지 알려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편지를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는 문법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음악적 소리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있지만, 지금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아니면 루트를 연주해야 하는지, 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지는 음악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능력'은 이 문단에서는 문법, 음악과 같은 학문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능력의 공통점은 수단적, 도구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능력이 이런 판단을 해줄까요? 바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다른 모든 것을 성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성입니다. 이성은 우리가 받은 유일한 능력으로, 자신이 무엇인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 선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판단하며, 다른 모든 능력도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황금이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황금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외관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the faculty which is capable of judging of appear-ances) 입니다. 또, 다른 무엇이 음악, 문법, 그리고 다른 능력들을 판단하고, 그 용도를 증명하며, 언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알려줄 수 있을까요? 이성 외에는 없습니다.

이 문단에서 이성은 성찰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이 성찰과 판단은 개별 학문처럼 학문 내에만 적용되지 않고 모든 학문은 물론 다른 상황에서 내리는 모든 판단을 포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신들이 우리 힘 안에 둔 유일한 것이 바로 외관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것들은 신들이 우리의 힘 밖에 두었습니다. 이는 신들이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신들이 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다른 것들도 우리의 힘 안에 두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구에 존재하고, 육체와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한, 우리는 외부적인 것들에 의해 방해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외관'이라는 개념에 주목해야 한다. 외관(appearances)는 외부 대상에 대한 지각과 감각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이 용어의 함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감각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짐작컨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세상을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자극에 대해 반성하고 정리하는 것이 이성이다. 그런데 에픽테토스는 외관을 자극에 제한하지 않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기 직전까지의 과정 전체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어떤 판단을 내리기 위한 이유와 전제"가 외관이다.
예를 들어 보자. 눈 앞에 사과가 있다. 사과의 빨간 색과 냄새가 식욕을 자극한다. 이런 자극에 대해 나는 먹을 것인지 먹지 않을 것인지 결정한다. 이 결정이 이성의 작용이다. 딱 여기까지다. 이것이 우리의 힘, 능력안에 있는 것이다. 그럼 이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은 무엇일까? 사과가 빨간 색인데 나는 사과를 싫어한다. '이 놈의 사과는 왜 빨간 색이지? 회색으로 빠꾸고 말거야.'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내 능력밖의 일이다. 이런 선택을 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다.



그러나 제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에픽테투스여, 만약 가능했다면, 나는 네 몸과 네 재산을 자유롭게 하고 방해받지 않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알라: 이 몸은 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 다듬어진 진흙이다. 그리고 내가 언급한 것을 너에게 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너에게 우리 일부를, 즉 추구하고 피하는 능력, 욕망과 혐오의 능력, 한마디로 외관을 사용하는 능력(this faculty of pursuing an object and avoiding it, and the faculty of desire and aversion, and, in a word, the faculty of using the appearances of things)을 주었다. 만약 네가 이 능력을 잘 돌보고, 그것을 네 유일한 소유물로 여긴다면, 너는 결코 방해받지 않을 것이며,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을 것이며, 슬퍼하지도 않을 것이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가? 나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 이 능력에 만족하고 신들께 기도하라."

이 문단에서 핵심 개념은 '외관을 사용하는 능력'이다. 외관을 사용한다니 무슨 말일까? 외부의 대상을 우리는 감각으로 지각한다. 그 지각을 이용해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린다. 즉 그 대상을 추구하거나 피한다. 추구하는 대상은 욕망의 대상이고 피하는 대상은 혐오의 대상이다.
정리하자. 외관을 사용하는 능력은 외부 대상을 욕망할 것인지, 피할 것인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 인생에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다음 문단부터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 설명한다. 귀를 기울여보자.



하지만 지금 우리는 하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일에 신경 쓰고, 몸과 재산, 형제, 친구, 자녀, 노예와 같은 많은 것들에 얽매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것들에 얽매여 그들로 인해 억압받고 끌려갑니다. 이 때문에 항해에 적합하지 않은 날씨가 되면 우리는 앉아서 괴로워하며 계속해서 어떤 바람이 부는지 지켜봅니다. 북풍이 분다면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서풍은 언제 불 것인가요? 그것은 바람이 선택할 때, 또는 아이올로스가 기뻐할 때 불 것입니다. 신은 당신을 바람의 관리자로, 즉 아이올로스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힘 안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잘 사용하고, 나머지는 그들의 본성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신이 기뻐하시는 대로입니다.

바람이 불어 항해를 할 수 없다. 이때 항해를 계획했던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선택은? 항해를 잘 할 수 있게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바꿀 방법을 고민한 것일까? 그건 아무리 고민해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우리에게는 바람을 제어할 능력이 애초에 없다. 그럼 바람을 바꿀 생각을 하지 말고 차라리 바람 때문에 항해를 못하는 사이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생각하고 실행하는 것이 현명하다. 즉 "내 능력 밖의 일에 대해 고민하지 말고, 내 능력 안의 일을 생각하고 실행하라."는 것이다.
에픽테토스는 '바람'과 같이 내 능력밖에 있는데 사람들이 어리석게 자꾸 어떻게 해보려고 덤벼드는 여러 가지 대표적인 사례들을 든다. 몸과 재산, 형제, 친구, 자녀와 같은 주변 사람들이다. 이런 것들은 바람과 달리 어느 정도는 제어가 가능할 수 있다. 가령 건강은 건강관리를 잘하면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다. 주변 사람들도 내가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에픽테토스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어도 완벽하게 제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현대 스토아철학자들 중에는 통제의 이분법을 통제의 삼분법으로 수정하는 이유가 생긴다. 즉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기회가 되면 설명해 보겠다.


내 목이 잘려야 한다고요? 그렇다면 당신은 모든 사람이 목을 잃어야 당신이 위안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은 라테라누스가 로마에서 네로가 그를 참수하라고 명령했을 때처럼 목을 내밀지 않겠습니까? 그는 목을 내밀고 약한 칼날에 잠시 움츠렸지만, 다시 목을 내밀었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 네로의 해방노예 에파프로디투스가 그를 방문해 그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 물었을 때, 그는 "내가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면, 네 주인에게 말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목을 자른다니. 극단적인 예다. 하지만 고대 로마의 정치 상황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정치적 정적에 의해 목숨을 잃는 일은 더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라테라누스의 예는 무슨 의미를 전달하는가? 사형을 언도받은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죽음을 자기 능력으로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통제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인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니 우리와 같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경지다. 하지만 죽음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내게 닥치는 어떤 위험이나 곤란함을 애초에 내 능력으로 어찌해볼 수 없다고 한다면 쓸데 없이 저항하는 것보다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현명한 결정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요? 무엇이 내 것인지, 무엇이 내 것이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내게 허용되었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나는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죽을 때 슬퍼해야 할까요? 나는 쇠사슬에 묶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도 슬퍼해야 할까요? 나는 추방당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누가 나를 웃으며, 기쁜 마음으로, 만족하며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내가 가진 비밀을 말해줄 것입니까? 나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를 쇠사슬에 묶을 수 있습니다. 사람아,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나를 쇠사슬에 묶는다고요? 당신은 내 다리를 묶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의지는 제우스조차도 억누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나를 감옥에 넣을 수 있습니다. 내 불쌍한 몸을 말하는 것입니까? 당신은 내 머리를 자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언제 내 머리가 베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 후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할 수 없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사소해 보인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얼마나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는지 설명하는 문단이다.


철학자들은 이런 것들을 숙고해야 하며, 매일 글을 쓰고 스스로를 훈련해야 합니다. 트라세아는 "나는 내일 추방당하는 것보다 오늘 죽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루푸스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약 네가 죽음을 더 큰 불행으로 선택했다면, 너의 선택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나 그것을 더 가벼운 불행으로 선택했다면, 누가 너에게 그 선택권을 주었는가? 주어진 것에 만족할 수 있도록 공부하지 않겠는가?"

'내일 추방당하느니 오늘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말은 소크라테스를 떠올리게 한다. 사형 언도를 받고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이것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연습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용기있는 죽음은 생각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이니다. 매일 훈련해야 가능한 일이다. 죽음을 앞두고 태연한 철학자들에게 무작정 감탄하지 말고 그들이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매일 연습한 결과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아그리피누스는 뭐라고 말했을까요? 그는 "나는 나 자신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상원에서 재판 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잘 되길 바란다. 하지만 지금은 다섯 시이니 운동하러 가자"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운동을 하고 나서 찬물로 목욕을 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운동하러 가자"라고 했습니다. 운동을 마치고 나서 한 사람이 와서 "당신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추방인가요, 아니면 사형인가요?"라고 그는 물었습니다. "추방입니다." "내 재산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것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럼 아리치아로 가서 저녁을 먹자"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면 내가 스스로에게 장애물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일에 미련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스스로의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나의 가장 큰 적은 나'일지 모른다. 내 불행의 가장 큰 적도 나 자신일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공부해야 할 것들을 공부한 것입니다. 욕망과 혐오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도록 하고, 사람이 피해야 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나는 죽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만약 잠시 후에 죽어야 한다면, 지금 저녁을 먹겠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저녁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후에 나는 죽을 것입니다. 마치 남의 것을 돌려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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