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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 같은 교사, 황제 같은 교사

내적 자유의 중요성

by 정지영

노예의 족쇄와 황제의 왕관 사이에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둘 다 영혼을 속박하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노예였습니다. 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로마의 황제였죠. 신분상으로 완전히 다른 처지였던 두 사람에는 놀랍게도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두 철학자는 모두 자신이 가진 신분과 지위로부터 오는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유를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photo-1512078718055-8ffaad296044.jpg?type=w1 © zulmaury, 출처 Unsplash


에픽테토스는 노예로 살아가는 경험을 통해 오히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자유의 시작이라고 보았습니다.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욕망, 선택입니다. 반면, 건강, 재산, 평판 같은 외적인 요소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하고 싶다는 바람만으로 건강해질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 역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바란다고 무조건 승진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른 사람에 대한 질투와 불만이 생기게 됩니다. 그로인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집착이 스스로를 가두는 족쇄가 되고 불행해집니다.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고, 통제 가능한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무조건 운명에 순응하라는 숙명론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과 판단,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을 통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에픽테토스는 현실을 직시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그 외의 것은 받아들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통해 그는 비록 신분은 노예였지만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에픽테토스의 생각을 오늘날 교실에 적용해 볼까요?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습니다. 도무지 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학생들을 꾸짖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공부할 생각이 없느냐고 충고합니다. 진심어린 충고에도 학생들은 도무지 변화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교사는 지칩니다.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지 못해 소진되고 맙니다.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는 학부모도 있습니다. 그런 부당한 요구에 맞서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해도 요지부동입니다. 절망스러운 상황입니다. 교사는 이런 학생과 학부모들은 결국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교사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은 한 가지 해결방법을 제시합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학생과 학부모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학생들을 교사가 원하는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일단 부당한 요구를 하는 학부모와 아무리 싸워봐야 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즉 수업 준비, 교사로서의 태도와 자세, 학생과 학부모에 대한 자신의 반응은 통제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이런 통제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올바르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대상이나 일은 순리대로 변하기를 지켜보면 됩니다. 되지 않을 일에 집착하여 불행의 짐을 짊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면 도무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던 학생과 학부모도 달라질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게 됩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아침마다 왕좌는 높았지만, 그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싫을 때, 다음과 같이 생각하라. 나는 인간으로서 주어진 본분을 다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존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에 따라 살기 위해 (황제의 일-역자 추가)을 수행하러 가는 것인데, 왜 불만을 품으려 하는가? 그게 아니라면 그냥 이불 속에 누워 몸이나 따뜻하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명상록, 5권 1절)


황제는 수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참견하기 좋아하는 자, 배은망덕한 자, 오만한 자, 기만하는 자, 시기하는 자, 사회성이 결여된 자"들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른다 해도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는 황제의 권력을 일종의 '속박'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속박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간으로서의 본분에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주변의 수 많은 악한 인간들을 이해합니다.


이들의 잘못은 모두 그들이 선과 악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저지르는 것이다.(명상록 2권 1절)



오늘날 교사들 중 아침에 일어나 학교로 가는 일이 너무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교사는 학교에서 학생뿐 아니라 동료 교사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과의 불편한 관계로 인해 마음 고생을 해야 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동료 교사와의 경쟁, 승진에 대한 압박, 교사들 간의 공식적이거나 사적인 평가, 업무 처리 과정에서의 불화 등이 이유가 됩니다.


분명 자신이 실수한 게 명백한 데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지위나 교직 경력을 내세우는 동료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부각시키기 위해 동료 교사의 공을 가로채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기준으로 동료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학교가 시기와 질투, 질시와 반목이 가득한 공간이 되는 불행한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런 불편한 인간관계가 내 마음과 정신을 옥죄는 족쇄가 될 수 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로마 황제에게도 이런 인간관계는 해결할 수 없는 장벽으로 느껴졌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자기 주변의 온갖 악하고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로 인한 괴로움을 '이해'로 풀었습니다. 그들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지로 인해 악행을 저지르고 자신을 해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자 미움과 증오의 대상이었던 인간들을 측은하게 여길 수 있는 여지가 생겼습니다. 그렇게 무지한 자들은 무능한 자들이므로 자신이 선과 악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다면 결코 자신을 해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교단에 선 교사는 선택해야 합니다. 노예처럼 족쇄에 묶여 그 족쇄를 탓하느라 마음까지 노예가 될 것인가, 왕관을 지켜야 하는 의무감이라는 감옥에 갇힐 것인가, 아니면 둘 다 벗어던질 것인가. 에픽테토스는 노예의 족쇄에서 자유를 찾았고, 아우렐리우스는 왕좌 위에서 권력의 감옥에 갇히지 않고 영혼의 자유를 획득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고난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성장의 기회로 받아들였습니다. 교사 역시 까다로운 학생, 비협조적인 학부모, 과도한 행정업무 속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어려운 학생과의 관계를 개선하거나, 부족한 교육 환경 속에서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불평하기보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우리는 보통 외적인 환경이 내적인 자유와 평온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토아 철학은 그 인과관계를 뒤집어 놓습니다. 내적인 자유와 평온으로 외적인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스토아철학은 외적 환경으로부터 도피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소위 말하는 '정신 승리'를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남탓, 외부 환경 탓만 하면서 정작 그 탓하는 대상에 대한 원망과 미움, 슬픔에 사로잡히지 말라고 알려줍니다. 일단 그런 감정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내가 할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잡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얻은 내적인 자유는 외적 환경과 타인으로 비롯되는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되어 줍니다.


이제 우리는 스토아철학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 교사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지혜의 오솔길을 함께 걸어가며 행복한 교사로서 다시 태어나는 서로의 모습을 보며 위로와 힘을 얻게 되길 바랍니다.



아래는 위의 글에서 제시한 스토아철학의 조언을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서 [통제 가능 vs 통제 불가능 리스트] 기록양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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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교사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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