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에 관하여
욕망은 좋아하는 것을 향한 것이고, 회피(혹은 혐오)는 싫어하는 것을 향한 것이며, 욕망에 흔들리지 않고 순탄하게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욕망을 가지고 (나쁜 것을) 피하는 데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는 철학자의 가르침을 배운 사람은 누구나 항상 (도덕적) 진보를 멈추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욕망을 없애거나 나중으로 미루고, 회피는 도덕적 영역(moral sphere)에 속하는 것에 대해서만 회피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도덕적 영역 밖의 것을 회피하려고 하면, 결국에는 자신이 피하고자 했던 것과 반대되는 상황에 직면하여 재앙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욕망하고 싫은 것, 나쁜 것을 피하는 데 성공하는 삶은 행복한 삶이다. 상식적인 말이다. 에픽테토스는 이런 상식에서 출발하여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것에 대한 욕망을 바로 채우려고 덤비지 말라고 충고한다. 욕망의 충족을 나중으로 미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싫은 것, 나쁜 것에 대한 혐오는 어찌할 것인가? 혐오하는 것을 피하거나 제거하는 것은 '도덕적 영역'에 속하는 것만 하라고 한다. 여기서 도덕적 영역이란 '올바른 행동을 하는 데 관련된 영역'이다.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하여 실천하기 위해 혐오하는 어떤 것을 피해야 한다면 그때 피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도덕적 영역 밖에 있는 것인데도 피하려고 하면 오히려 그 혐오하는 것, 싫어하는 일이 자신을 집어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직장에서 동료 중 한 명이 당신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말투가 거칠거나, 당신이 싫어하는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가정해 보자. 이러한 상황에서 그 동료의 행동은 도덕적 영역 밖에 있다. 다시 말해, 당신이 그 동료의 행동을 직접 통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두 가지 선택을 할 수 있다.
첫 번째 선택은, 그 동료를 피하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 동료가 있는 회의나 점심 시간 등을 피하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그 동료와 마주치는 일이 더 잦아지거나, 그 동료에 대한 불편한 감정이 커져 스트레스가 증가할 수 있다. 이 경우, 그 동료를 피하려고 할수록 오히려 그 상황이 당신의 삶을 더 크게 침해하게 된다.
두 번째 선택은, 도덕적 영역 내에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즉, 동료의 행동에 대한 반응보다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 동료와 정중하게 대화를 시도하거나, 동료의 행동에 감정적으로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업무에 집중한다. 이렇게 자신의 반응을 조절하는 것이 도덕적 영역 내에서 올바른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불필요한 갈등이나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덕(virtue)이 행복, 욕망에 흔들리지 않는 삶(impassivity), 그리고 순탄한 삶(a good flow of life)을 보장한다면, 이 덕을 향한 진보는 이러한 상태들로 나아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진보란 항상 어떤 것의 (가장) 완벽한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덕'이란 어떤 것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하게 발휘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다. 위의 첫 번째 문단에서 자신에게 좋은 것을 적절한 방식으로 취하고, 싫은 것을 올바르게 피하는 사람은 덕이 있는 사람이다. (도덕적) 진보란 이런 덕을 발휘하며 사는 삶에 도달하는 데 목표를 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덕의 본성을 이미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이와 무관한 영역에서 진보를 입증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결국, 덕의 목적은 순탄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누가 진보를 이루고 있는 것일까요? 크리시포스의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인가요? 덕이란 그저 크리시포스의 글을 잘 이해하는 것에 불과한가요? 만약 그렇다면, 진보란 우리가 크리시포스를 최대한 많이 배우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보란 (단순히 많은 지식을 가지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에 접근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장하며 덕이란 어떤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누군가 비꼬듯이 다음과 같이 말할 겁니다.
"이 사람은 이제 크리시포스를 스스로 읽을 수 있습니다. 신께 맹세코 당신은 진정으로 진보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이겠죠. "그게 무슨 진보란 말입니까!"
"왜 그를 조롱하는 겁니까?"
"그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 사실로 인해 괴로움을 겪게 만드는 겁니까?"
그에게 미덕의 목적을 보여줘서, 그가 진정한 진보가 무엇인지 알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친구여, 그 답을 당신의 의지에서 찾아보십시오, 즉 욕망과 회피에서 말입니다. 항상 욕망을 충족하고 혐오하는 것을 경험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삼으세요. 즉 욕망하고 혐오하는 데 실수를 범하지 마세요. 어떤 것에 집중하고 판단을 보류하는 일을 완벽하게 할 수 있도록 하세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당신이 여전히 불안하고 두려운 상태이면서 완벽을 목표로 삼는다면, 진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의 진심에 대한 증거를 보여주십시오. 그것은 마치 내가 운동선수에게 '네 어깨를 보여줘'라고 말했을 때, 그가 '내 역기(운동기구)를 봐라'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나는 '그 역기와 함께 꺼져!'라고 나는 말할 것입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그 역기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해서 어떻게 진보했는지이다.'
[강의]는 에픽테토스가 제자들과 대화 방식으로 한 강연을 옮긴 책이다. 에픽테토스가 강연에서 한 말을 그대로 옮긴 글이다. 이번 문단에서 그런 책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난다. 에픽테토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기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이 문단에서 당시의 유명한 저술가 크리시포스가 등장한다. 에픽테토스가 그를 등장시킨 이유는 이론적인 지식을 가지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좋은 책을 읽었다고 반드시 좋은 삶이 따라오지 않는다. 비유적으로 운동선수에게 어깨 근육을 보여달라고 했더니 자신이 근육을 키우기 위해 사용한 역기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역기는 도구이지 근육이 아니다. 책으로 배운 지식은 올바른 삶,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도구이지 그 자체로 행복한 삶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