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지영 Oct 23. 2024

스토아 철학 발전의 초석

: 크리시포스

1. 생애와 배경

 크리시포스(기원전 279–206)는 소아시아의 작은 도시 솔리(Soli)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운동에 몰입했다고 합니다. 특히 뛰어난 달리기 선수였다는 점은 그가 자신의 철학을 지치지 않고 끈기있게 탐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항상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장군에게 재산을 몰수당하는 경험은 그에게 큰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시련이 그를 철학에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통제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운 어린 시절의 운동 경험은, 이후 크리시포스가 감정보다 이성을 중시하는 스토아 철학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 큰 영향을 주었죠.


 젊은 시절, 크리시포스는 고향을 떠나 아테네로 갔습니다. 철학의 도시 아테네에서 그는 스토아 철학의 창시자인 제논과 그의 후계자 클레안테스를 만나면서 철학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의 스승 클레안테스는 크리시포스에게 철학적 기초를 다져주었고, 이후 크리시포스는 스토아 학파의 핵심 인물로 자리잡게 됩니다.


 스토아 철학은 단순한 철학적 교훈이 아닙니다. 그것은 논리학, 윤리학, 그리고 자연철학을 모두 아우르는 체계적 철학이었습니다. 크리시포스는 스토아 학파의 세 번째 지도자로서 스토아 철학이 체계를 완성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연구 덕분에 스토아 학파는 단순한 윤리적 가르침을 넘어, 철학적 논증과 과학적 사유의 강력한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2. 주요한 철학적 기여

 (1) 논리학

 크리시포스는 논리학을 철학의 기본 도구로 여겼습니다. 그는 철학적 사고가 바로잡히려면 논리적 사고가 필수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가 발전시킨 논리학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명제 논리학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진술을 참인지 거짓인지 따지는 방식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라는 명제가 있을 때,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따지는 것처럼, 크리시포스는 명제를 통해 현실을 분석하려 했습니다.


 한 가지 예로, 그는 '거짓말쟁이 역설'을 다루었는데, 이것은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라는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호한 상황을 뜻합니다. 이 역설은 단순해 보이지만, 우리가 어떤 말이 참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크리시포스는 이런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논리적 틀을 마련했고, 이를 통해 논리학을 더 발전시켰습니다.


 이를 오늘날의 상황에 비유하자면, 우리가 어떤 뉴스 기사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단하려 할 때, 그 기사 안에 논리적인 모순이 없는지 따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크리시포스의 논리는 이러한 판단을 도울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한 것입니다.



 (2) 인식론 (카탈렙시스)

 크리시포스의 인식론에서 중요한 개념은 카탈렙시스입니다. 카탈렙시스는 우리가 세상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를 현대적으로 풀어 설명하면, '확실한 정보'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개념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가 무언가를 알 때 그 지식이 불확실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멀리서 누군가를 보고 그가 친구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상황을 떠올려 보세요. 처음에는 확신이 없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거나 얼굴을 명확히 확인하면 비로소 확신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과정이 바로 카탈렙시스입니다.


 또 다른 예로, 어떤 맛을 느낄 때 처음에는 그 맛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료를 분석하고 맛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뒤에는 그 음식에 대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크리시포스는 이러한 명확한 인식이야말로 참된 지식을 얻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3) 윤리학

 크리시포스는 윤리학에서 덕(virtue)을 매우 강조했습니다. 덕은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을 넘어서, 이성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원칙이었습니다.


 크리시포스에 따르면, 우리는 항상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당신에게 화를 내거나 불공평하게 대우했을 때,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이성적으로 그 상황을 분석하고 최선의 행동을 선택하는 것이 덕을 실천하는 방법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스트레스 상황에 대입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직장에서 상사가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길거리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무례하게 대한다면 즉각적으로 화를 내기보다는, 크리시포스의 철학을 따르면서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최선의 대응을 선택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또한, 그는 이성적 판단이 인간이 더 나은 결정을 내리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이성적 태도는 직장, 가정, 인간관계 등 다양한 상황에서 유용합니다.



 (4) 결정론과 자유의지

 크리시포스의 결정론은 모든 사건이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믿음에 기초합니다. 그가 말한 결정론은 우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이성적 원리인 로고스(logos)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크리시포스는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고 하면서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자유의지는 바로 우리가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지 선택하는 데서 나온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직장에서 승진 기회를 놓치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상황 자체는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크리시포스는 이러한 선택의 자유가 바로 우리의 자유의지라고 보았습니다. 즉, 외부 조건은 우리를 통제하지만, 그 안에서 이성적인 태도로 선택하는 것이 자유의 실천입니다.


  오늘날 이 철학은 우리가 불가피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것을 수용하고, 어떻게 반응할지를 결정하는 데 큰 가르침을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팬데믹과 같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상황을 바꿀 수 없지만, 그 상황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대응할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는 것이죠.



 (5) 자연철학

 크리시포스의 자연철학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중시합니다. 그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았습니다. 이 유기체는 로고스라는 이성적 원리에 의해 움직입니다. 로고스는 단순히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 속에서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어, 나무가 자라는 과정이나 계절이 변하는 자연의 질서, 날씨의 변화 등은 모두 로고스에 의해 결정됩니다. 크리시포스는 인간도 이 거대한 질서의 일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자연의 원리와 질서에 따를 때, 비로소 더 조화롭고 이성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영향과 의의

 크리시포스는 명제 논리학을 체계화하여 스토아 철학의 논리적 기초를 강화했습니다. 또한 카탈렙시스라는 인식론적 장치를 제시하여 진리에 대한 확실하고 명확한 인식을 중시하는 철학적 태도를 강조하는 스토아 철학적 전통을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개념을 제시한 것 외에도 자신의 스승이었던 제논과 클레안테스의 철학을 더 심화, 발전시킨 공로가 있습니다.


 (1) 덕의 강조

 이전 스토아 철학자들인 제논과 클레안테스도 덕(virtue)을 인간이 도달해야 할 최고선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덕을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것, 즉 감정을 통제하고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제논은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이 자연의 이성적 질서에 맞춰 살아가는 것이 덕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클레안테스도 덕이란 자연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며, 이를 통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크리시포스는 덕을 더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이성을 통한 감정 통제의 중요성을 더 세밀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감정 자체를 "비이성적 판단의 오류"로 보아 감정을 이성적으로 분석해 제어하는 방법을 강조했습니다. 즉, 감정이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이를 바로잡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크리시포스는 감정과 이성 간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더 깊이 탐구하고, 덕을 더 실천적으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2)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조화

 이전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주가 로고스(logos), 즉 이성적 원리나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믿었습니다. 제논과 클레안테스도 모든 사건이 필연적이며, 우주에는 엄격한 결정론이 존재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므로, 인간의 삶 역시 이 로고스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시포스는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조화롭게 설명하는 독특한 이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우주가 엄격한 결정론에 따라 움직이더라도, 인간은 그 안에서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우리가 처한 외부 조건은 필연적이지만, 그 조건에 대해 이성적으로 어떻게 대응할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크리시포스는 인간이 로고스의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움직이는 우주의 일부임에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임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결정론 속에서도 인간의 책임감과 선택을 강조했습니다.


이전 철학자들은 결정론에 대해 보다 엄격하게 해석한 반면, 크리시포스는 인간이 그 결정론 속에서도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지를 인정한 것입니다. 이는 후에 자유의지와 운명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3) 자연철학

 이전 스토아 철학자들도 우주를 로고스에 의해 운영되는 거대한 유기체로 보았습니다. 제논과 클레안테스는 우주의 모든 사물과 사건이 자연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움직이며, 인간도 그 일부라고 가르쳤습니다. 인간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덕의 실천이자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고 보았습니다.


 크리시포스는 이러한 개념을 더 세밀하게 다루었습니다. 그는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로고스에 의해 결정되며,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이성적인 태도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크리시포스는 자연철학을 단순히 이론적으로만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성적 원리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고 더 나은 삶을 영위하는 데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크리시포스는 철학을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요구하는 철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지침이 됩니다. 스토아 철학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철학이며, 크리시포스는 그 길을 명확히 제시한 인물로 스토아 철학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전 09화 스토아 철학의 시작 : 키티온의 제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