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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니작가 Feb 20. 2024

23킬로에 채워진 나의 작은 세상

진정한 미니멀리스트가 될 수 있을까?


 코로나 때문에 미뤄졌던 치앙마이 한 달 살기를 작년 2023년 1월에 하면서 소소하고 단순하게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기쁨을 알게 됐다. 딸도 여기에서 즐겁게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수영하며 재밌게 놀았다. 치앙마이 라이프가 만족스러웠던 딸은 진지하게 나에게 대화 요청을 했다. 치앙마이에서 학교를 다니고는 싶은데 중학교 생활을 한국에서 꼭 해보고 싶어서 고민이 된다고 했다. 솔직히 해외에서 학교를 다니는 건 아주 중대한 결정이다. 일단 중학교 입학 후 생각해 보기로 했는데 딸이 학급회장을 하며 즐겁게 지내면서 유학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하지만 태국과 유학의 장단점을 적어가며 심사숙고한 딸은 2학기부터 치앙마이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했다.     


 이제는 한 달 살기가 아니라 장기간 거주해야 하기 때문에 챙겨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위탁 수화물은 인당 23킬로, 기내에는 10킬로까지 허용돼서 이 정도에 맞춰 짐을 챙기고 싶었다. 물론 추가 비용을 내면 되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김에 집안 정리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이렇게 우리 모녀에게 66킬로가 주어졌다. 생필품과 상비약 그리고 부엌용품을 20킬로 안에 채우고 각자 필요한 것들을 이민 가방에 담기로 했다. 먼저 필요한 물품 리스트를 만들어 정리했다. 꼭 필요하고 중요한 물건에 집중하니 어떤 것들을 비워야 할지 명확해졌다.     


 세계적인 정리 컨설턴트인 곤도에 마리의 ‘정리의 기술’에서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엇에 설레고, 무엇에 설레지 않는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나’라는 사람이 ‘무엇에 설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생활, 아니 인생을 설레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정리는 나에 대해서 알아가는 시간을 선물한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그리고 내가 어떤 물건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지를 물건을 정리하며 나를 알아갈 수 있다. 처음에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면서 작가가 말한 설렘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리를 꾸준히 하면서 이제는 구별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때문에 정리는 전문가가 가이드라인은 정해주며 도와줄 수는 있지만 어떤 물건을 비우지 않고 두어야 할지 결정하는 건 물건과의 교감이 가능한 오직 자신만이 가능하다. 정리는 버리는 게 목표가 아니라 어떤 물건을 내 옆에 두고 싶은지 선택하는 과정이다. 내가 원하는 환경을 스스로 만들며 설렘 가득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비우며 정리하는 삶이 일상이 되어야 한다.     


 장기간 나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주방용품만 남기고 정리했다. 남편이 지방 출장이 많아서 전자레인지를 제외하고 밖에 나와 있는 그릇이나 컵 등이 없도록 최대한 수납장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이제야 말로 딱 필요한 것들만 남길 순간이 왔다. ‘언젠가’는 이제 나의 머릿속에서 지워야 했다. 나중에 필요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비우지 못하고 가지고 있던 접시와 그릇들이 많았다. 우리 가족이 좋아하고 자주 사용하는 것들만 선반에 두고 사용하지 않는 용품은 모두 꺼냈다. 구석에 모아두었던,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식기는 꼭 필요한 분들이 사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다.     


 이제는 아이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전자 피아노와 자전거도 우리 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피아노는 아이에게 너무나 애정이 깃든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니엘이가 7년 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외할머니가 선물해 주신 거라 의미가 남달랐다. 게다가 콩쿠르 준비할 때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대상을 두 번이나 받아서인지 니엘이는 피아노를 간직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딸이 없는 공간에 피아노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니엘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고민했다. 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걸 보고 조카가 배우고 싶다고 말한 게 생각나서 동생에게 피아노가 필요한지 물어보니 조만간 살 계획이었다고 했다. 선물하기 딱 좋은 타이밍이었다. 조카는 언니가 피아노를 준다며 고마워했고 니엘이는 사촌 동생에게 주면 할머니도 좋아하실 거라며 기뻐했다. 딸은 가장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고 나서 피아노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작별하는 시간을 가졌다.     


 자전거도 선물 받았지만 탄 적이 몇 번 없어서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렸고 판매한 금액으로 여기 오기 전 외식비용으로 사용했다. 덩치가 큰 물건들을 정리하니 공간은 더 넓어졌다. 물건 하나하나 우리 집을 떠날 때마다 아쉽기보다는 감사하고 후련했다.     


 이제는 내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해 집중했다. 먼저 옷 정리를 했다. 치앙마이는 연말과 연초에 가을처럼 시원하고 대부분 덥기 때문에 여름옷 위주로 챙겼다. 슬미프(슬로우미니멀라이프 모임)를 시작하고 나서 일 년에 한 번씩 옷 정리를 했지만 이번에도 만만치 않게 시간이 들었다. 의류 같은 경우는 그곳에 가서도 필요하면 구매할 수 있기 때문에 자주 입는 편안한 옷을 기준으로 챙겼다. 의류나 가방 그리고 신발도 최소한으로만 챙겼다. 솔직히 가방이 여러 개 있어도 매번 사용하는 것만 매기 때문에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가방은 배낭과 크로스백 그리고 신발은 운동화와 샌들 한 켤레씩 챙겼다.     


 이곳은 비행기로 한국에서 6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이기 때문에 원하는 걸 한국에 가서 바로 가져올 수 없다. 치앙마이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 그리고 내가 꼭 가져가야만 하는 우선순위, 즉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잘 챙겨야만 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책이었다. 매일 아침을 독서와 필사로 시작하기 때문에 책은 나에게 우선순위였다.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구절을 필사하는 모닝 루틴을 여기서도 하기 위해서는 책이 필요했다. 물론 이북으로도 가능하지만 종이책이 주는 따뜻한 느낌은 따라올 수 없다. 책은 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이라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다. 일단 좋아하는 구절이 형광펜으로 곱게 칠해져 있고 중간중간 내 생각을 적은 메모로 채워진 책으로 추렸다. 드디어 나의 흔적이 묻어있는, 언제든지 읽어도 좋은 인생 책 10권을 선택했다. 가족과 같이 든든하고 안정감을 주는 책은 가져가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은 이북 리더기로 읽기로 결정하고 나니 책을 정리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깨끗한 책들은 중고서점에 팔거나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이제는 아이의 책을 정리해야 했다. 아이는 고민의 시간이 짧았다. 문제집과 책 3권만 가져가고 나중에 읽고 싶은 책은 이북으로 읽겠다고 했다. 작년에 책을 정리하면서 나중에 읽어도 좋을 거 같은 전집은 버리지 않았는데 아이가 한 번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모두 필요한 분에게 드렸다. 책들이 이렇게 집에서 잠자고 있는 것보다 필요한 아이와 함께 하면 책의 가치는 더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책을 정리하니 준비해야 하는 일의 반은 끝낸 기분이었다.     


 필요한 용품을 신중하게 생각해서 23킬로 안에 채우는 과정을 통해 나의 인생을 재점검할 수 있었고 나 자신과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이렇게 환경적인 조건을 설정해서 스스로 물건을 정리하는 시간을 매년 가진다면 나중에는 배낭 하나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다. 이렇게 정리하고 비우며 산다면 인생의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물건만 내 손에 고이 놓여있지 않을까. 죽기 전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알고 간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할까. 이런 삶을 위해 물건을 비우며 아름답게 인생을 채워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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