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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살 Sep 09. 2019

군대에서 만난 이상향

군대의 평등 문화

  비록 빈부격차가 실질적으로 계급을 만들어 내는 사회라고는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모든 사람이 법이 보장하는 평등 아래 사는 사회다. 하지만 그런 현대 사회 속에서도 합법적으로 계급의 높낮이가 존재하는 곳이 있으니, 바로 군대다. 병사들끼리도 길면 반년, 짧으면 한 달 차이로 선, 후임이 되어 위계질서가 생기는 이곳. 그러나 이런 군대에서도 의외의 ‘평등함’을 찾을 수 있었다.     


  신병교육대대에서 훈련병으로 있을 때, 교관님들은 모든 훈련병들에게 상호 존대를 지시하고 수차례 강조하셨다. 급격한 환경 변화를 맞은 젊은이들이 모여 익숙지 않은 단체 생활을 하는 중에는 반드시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고, 갈등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대부분의 훈련병들은 그 규칙을 거의 지키지 않았다. 친한 정도와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누구는 존대를 하고 누구는 반말을 하며, ‘형’으로 불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는 등 자신들만의 위계질서를 구축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다 결국 한 생활관에서 주먹다짐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경위는 자세히 모르지만, 서로 존중하며 존댓말로 대화를 했다면 주먹이 나갔을까?

  하지만 내가 속한 생활관의 열 명은 모두 상호 존대의 규칙을 깨지 않았고, 서로 다른 성격과 나이를 가진 우리였지만 누구 하나 높거나 낮음 없이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며 신교대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수료를 하고 각자 자대로 간 다음에도 우리는 하도 존댓말에 익숙해져 단체 카톡방에서 존댓말로 대화를 하고 있다.     


  자대에 전입 와서는 조금 다르면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만났다. 여기서는 동기 사이에 말을 높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회와 다른 점은 나이가 달라도 형, 동생 구분 없이 00아~라고 이름을 부르며 대등하게 대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의 사회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사회에서는 학교, 직장, 어디에서라도 두 사람이 만났을 때 태어난 년도가 한 해라도 차이가 난다는 걸 확인한 순간 바로 서열이 굳힌다. 형(선배)은 동생(후배)에게 손을 흔들고 동생(후배)은 형(선배)에게 고개를 숙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나이 한두 살, 경우에 따라서는 몇 개월 차이도 나지 않는 사람들끼리 위계가 생기는 문화를 이상하게 여겼다. 중학교 때는 한 학년 위인 사람에게 반말을 했다가 주변의 웃음을 샀고, 한 살 차이 나는 게 뭐라고 말을 높여야 하는지에 대한 주장이 선생님에게 꺾였을 때에는 정말 의아했다.

  머리가 굵어지고 영어 실력이 늘어 영미권 영화를 많이 보게 되었고, 서양에서는 나이에 따른 위계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한 살이라도 차이가 나는 순간 ‘친구’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형, 누나, 오빠, 언니’라는 호칭이 붙는다. 하지만 서쪽의 문화권에선 나이는 숫자일 뿐, 10대 학생과 20대 회사원, 심지어 70대 노인까지도 모두가 ‘friend’였다.

  영어회화 모임을 시작하면서 영어로 대화할 때는 그런 나이 불문 대등한 분위기를 체험해 보았지만, 그 분위기를 한국인끼리 한국어로 대화하면서 느끼면 어떤 느낌일까 늘 궁금했다. 그리고 나이에 따른 위계가 확실한 문화가 수 천년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인 걸 안타까워했었다. 그런데 이곳에 온 것이다. 스물한 살에서 스물세 살까지 나이가 다양한 동기들끼리 나이는 신경 쓰지 않고 이름을 부르며 친구로 대하는 풍조가 정말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실 나이를 물은 적도 거의 없다. 상관이 없으니까. 한국 사회에서는 보통 초면에 나이를 묻고는 ‘나보다 형이네’, 혹은 ‘나보다 어리네’라는 인식을 박아두게 되고, 그를 바탕으로 상대를 대하는 태도의 방향이 결정한다. 하지만 서양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를 묻는 것을 이상한 행동으로 여긴다.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여기선 나이가 상관이 없으니, 딱히 물어볼 필요성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는 흔한 표현이 실현되는 곳이 바로 군대 아닐까?


  대한민국에서 군대 좋아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고 나 또한 다르지 않지만 이런 면에서만은 개인적인 이상향을 찾았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에선 그놈의 나이에 따른 위계질서 때문에 끊이지 않고 문제가 생긴다. 자신보다 어린 사람은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돼, 학교와 직장에서는 선배가 후배를 손쉽게 업신여기거나 괴롭히는 일이 다반사다. 군대에서는 비록 선후임 간의 위계가 문제로 이어지는 일도 많지만, 적어도 '동기간의 나이에 상관없는 동등함'은 배울 만한 점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인구의 거의 절반이 이 평등의 느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니, 그를 바탕으로 언젠가는 우리나라에서도 나이에 따라 위계가 생기지 않고 서로 대등하게 대하며 존중하는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지 않겠냐는 상상을 한번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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