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고딩으로 살아가기
“엄마, 나 회장 됐어. 근데...”
학급 임원 선거에 떨어지고 오면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 줄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소식에 믿어지지 않는 기쁨도 잠시.
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보니 마냥 좋아하면 안 되는 뭐가 있나 싶어 마음이 불안하다.
“진짜? 진짜 됐어? 회장에? 근데 왜?”
“내가 후보 연설문을 PPT로 했잖아. 그래서 다른 후보들이 불공평하다고 투표 다시 하고 싶다고 항의했대.”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S는 후보 연설문을 준비하면서 PPT로 보여주는 것이 편할 것 같아 그렇게 해도 되는지
담임 선생님께 여쭤보았다. 담임 선생님의 괜찮다는 허락을 받고 준비한 PPT 슬라이드였고,
그걸 보여주며 후보 공약을 발표한 것이다.
선거 결과 3명 후보 중에 S만 과반수 이상 득표가 나와 먼저 회장으로 선발되었다.
다른 후보들은 PPT를 사용해도 된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자료화면 없이 연설한 자기들이 불리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담임 선생님께서 선거가 불공평하다는 항의가 들어왔는데 S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으셨단다.
“저는 PPT로 준비해도 되는지 허락을 받고 준비했기 때문에
그것을 이유로 다시 투표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문제가 생길만한 상황이면 그냥 양보하거나 피하는 성향으로 생각했던 S가
이런 똑 부러진 대답을 했다니 이 와중에 기특하다.
결국, 투표를 다시 하지는 않았고 선생님과의 상담으로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연설문을 PPT로 준비해도 된다는 공지를 추가로 하지 않은 것은 선생님 잘못이야.
그런데 PPT를 사용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공약이나 연설 자세도 S가 훨씬 좋았어.
그건 우리 반 친구들도 다 인정할 거야.”
담임 선생님이 따로 부르셔서 해주신 말씀에 그나마 위로가 된 느낌이다.
고등학교에서는 ‘내신 성적을 내 신(神)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내신 성적의 중요함은 익히 알고 있다.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라서
우리 학교 우리 반 내 옆자리 친구가 모두 경쟁상대가 된다.
이런 경쟁구도의 입시가 맘에 들지 않아도 공교육을 받는 학생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같이 뛰어야 한다. 움직이는 러닝머신 위에 떨궈졌으니 별 수 있나.
학력고사 세대인 난,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이 경쟁상대라기보다 동지로서 서로 응원하고 잠 깨워주고 같이 공부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너무 삭막하다.
이런 한탄조차도 공허한 메아리이다.
입시에서 수시 지원 방식은 자기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만들어진 좋은 변화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고 모두에게 좋은 제도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불리한 조건일 수밖에 없다.
1년에 단 한 번의 기회만 주어졌던 학력고사보다는 수시전형에 원서를 6개나 쓸 수 있어서 기회는 많아졌다. 많아진 기회를 다 잡기 위해선 내신 성적 이외에 학교 생활을 얼마나 잘했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대입에서 자기소개서는 숫자로 보이는 성적이 전부가 아니라는 얘길 할 수 있는 기회였다.
현 고등 2학년이 치를 24학년도 대입부터 자기소개서도 없어지면서
학교생활기록부와 세부능력 특기사항이 중요해졌다고 예비고 1 학원 설명회마다 외울 정도로 많이 들어왔다. 그래서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첫인상이 중요하기 때문에 학급 임원을 하면
‘쟤는 임원이구나, 공부 좀 하겠는데'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으니 떨어지더라도 학급 임원 선출에 나가라고 한다.
물론 최상위 학생들은 성적에 더 집중하기 위해 임원도 안 하겠지만 애매한 중상위권들은
생활기록부에 한 줄이라도 더 쓰려면 임원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학급 임원 선출에서 연설문의 공정성을 가늠해야 할 만큼 이렇게 치열할 줄 몰랐다.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고 바로, 친구 이름을 다 외우기도 전에 이런 경험을 하다니
앞으로의 고등학교 생활이 얼마나 긴장되고 무서울지 지레 걱정이 앞선다.
항의했던 친구와 학급회장, 부회장으로 잘 지낼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당사자보다 엄마가 더.
’ 아참! 1학기 학급회장 엄마는 반 모임을 주선하던데 고등학교도 그런 걸 해야 하나?’
여태껏 회장은 해본 적이 없고, 일 많은 1학기에는 더더욱 경험이 없어서
주변 고등 엄마들에게 물어보니 코로나 때문인지 고등학생이라 그런지
반 모임은 안 했다고 한다.
잘 됐다.
만난다고 할 수 있는 말도 없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