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생각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사고에도 영향을 준다는 뜻이다. 정치에서는 특히 이런 점들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걸 '프레임'이라고도 한다. 프레임을 번역하자면 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사고의 틀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박근혜 정부에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킬 때 반대파인 민주당은 이 용어를 거부하고 국민 감청에 초점을 두었다. 테러방지라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국민들이 봤을 때 이해하기 어려우니 그런 것이다. 반대로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 측이 이 용어를 사용한 것도 예상할 수 있는 민주당이나 일부 국민의 반발심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거다. 최근에는 차별금지법이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되자 평등법이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했다. 이 외에도 예시는 수없이 많다.
이 관점에서 여성징병제라는 용어의 부정확함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성징병제라는 용어 대신에 성평등의무복무제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우선 지금 흔히 한국을 징병제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남성징병제다. 따라서 여성징병제라고 말하는 것은 여성을 징병하고 남성은 징병하지 않는 상황, 즉 지금과 정확히 반대의 상황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치권에서나 젊은 세대가 여성징병제라고 말할 때는 여성만 징병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건국 이후 남성만 징병했으니 향후 몇 십 년은 여성만 징병하자는 의견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우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성평등이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남녀평등/여남평등 징병제라고 할 수 있으나 이 경우 제3의 성은 배제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징병제가 아니라 의무복무제인가. 현재 남한에서는 사회복무제도가 존재한다. 장애인 강제 노동이라고 불리는데 그 이유는 사회복무제도는 노동의 내용이 국방과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국제노동기구에서는 국방과 관련된 징병은 국가의 주권 사항으로 보기 때문에 일반적인 징병은 강제 노동이 아니다. 따라서 징병제라는 용어를 쓸 경우 사회복무제도로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워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의무복무제라는 용어가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회복무제도 여부와 별개로 징병제라는 말이 줄 수 있는 거부감을 줄일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남한이 실제로 여성까지 포용하는 모두를 위한 의무복무제도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인가? 불평등에 익숙한 남한 사회 특성을 고려할 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매우 회의적인 전망을 갖고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전망과 별개로 정확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적 토론의 첫 출발점이라고 생각하기에 글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