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여서 청이 처음 왔을 때 병기(兵器)라고는 날도 대지 못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성을 끝내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인조(仁祖)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다만 양식이 적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고이중환(李重煥, 1691~1756년, 실학자)은 택리지(擇里志)에 기술하였다.우리 선조들이 이렇게 튼튼한 산성을 쌓았다는 자부심을 주었다. 당대와 후손을 지키기 위해 피땀 흘려 목숨을 걸고 헌신한 그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작년(2022.07.22, 남한산성 탐방 글)에 친구와 남문(지화문) 기준으로 시계방향으로 내성을 한 바퀴 순회했다. 서로 간 밀린 이야깃거리에 집중하느라 성곽을 자세하게 보지 못한 것 같았다. 특히 5개의 옹성과 외성인 벌봉의 봉암성을 자세히 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오늘(2023.03.18. 토.흐림)은 남한산성 남문을 기준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옹성과 외성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동일한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보이는 법이다. 동일한 코스인데 등산할 때의 길과 하산할 때의 길이 생소하여 보인다. 오늘의 내성 성곽 길도 역시 많이 달라 보였다.
성곽을 따라 돌다가 옹성으로 진입하는 입구를 잘 못 찾아 몇 번 다시 되돌아가서 출입구인 암문을 찾아 내려갔다. 특히 제3남옹성으로 내려가기 위해 암문을 찾기 위해 애를 태웠다. 심지어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하는 엉뚱한 마음이 생겼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성과 직접 연결된 암문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제2남옹성을 지나서 먼저 보이는 암문을 통과해서 밖으로 나와 성벽 밑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제3남옹성으로 접근해야 한다. 옹성으로 내려가는 안내 표시판을 발견하기가 어려웠다. 옹성으로 내려가는 길은 비밀 출입구였기 때문이었다. 옹성 하나하나가 지형에 잘 맞게 구축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외성인 벌봉의 봉암성은 워낙 넓은 지역(길이 2,120m)이어서 시간에 쫓겨 진입로만 확인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고 나머지 구간을 돌아보아야 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남한산성은 본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진다. 외성(벌봉 봉암성)은 병자호란 이후 쌓았다고 한다. 내성 전체 한 바퀴 거리는 약 7.7km 3시간 20분 거리(제5코스, 내성 기준, 안내표지판)이라고 안내 표지판에 기재되어 있다.옹성에 내려가 둘러보는 시간이 더 필요하여 약 7시간 소요되었다. 약 3만 보 걸음이다.
1. 남한산성 개황
내외성포함 둘레가 약 12.4km, 면적은 약 2.15km 2이다. 본성은 신라 주장성(672년 축조)의 옛터를 기초로 하여 인조(1624~1626, 2년~4년)가 대대적으로 축성하였다. 남한산성 행궁 역시 축성과 함께 인조 3년(1625년) 상궐과 하궐이 건립되었다. 청량산(주봉, 해발 497.9m), 북쪽에 연주봉(467.6m), 동쪽에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에 여러 봉우리를 연결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벽의 바깥쪽은 경사가 급하여 적의 접근은 어렵다. 안쪽은 경사가 완만하며 분지형이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5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었다.
성벽과 성 안에는 동·서·남·북문과 장대(將臺)·암문·군포지(초소)·매탄처·매염처·창고·우물 등의 방어 시설과 관청, 군사훈련 시설 등이 남아 있다. 1963년 사적 제57호로 지정되었다.2014년 카타르 도하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탐방코스는 다음과 같다. 남문(지화문)>제1옹성>제2옹성>제3옹성> 시구문> 동문(좌익문)>장경사신지 옹성> 동장대터> 봉암성> 북문(전승문)>북장대터> 연주옹성> 서문(우익문)>청량당> 수어장대> 남문(지화문)
2. 주요 시설물 (내성의 성곽 기준)
남문(지화문)
남문(지화문)
남문은 가장 크고 웅장하다. 현판에 지화문이라고 세겨져 있다. 인조가 청의 군사에 밀려 처음 들어온 문이다.
제1남옹성 포대(좌측 높은 축대가 장수의 지휘소) / 포혈(ㅁ자형)
제1남옹성
옹성(甕城)은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는 이중의 성벽이다.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중 3개의 옹성이 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신남성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제1남옹성은 둘레가 426m이고, 옹성 끝에는 8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포혈의 형태는 ㅁ자형이다.그 뒤로 장수의 지휘를 위한 축대가 설치되어 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암문이 설치되어 전투 시 성내로 출입할 수 있다.
제2남옹성 / 포혈(ㅁ자형)
제2남옹성
둘레가 318m이며,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다. 옹성 끝에는 포대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있으며, 포대는 동서남 3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 포혈의 형태는 ㅁ자형이다.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암문이 설치되어 전투 시 성내로 출입할 수 있다. 남한산성 옹성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제2남옹성치
제2남옹성치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다.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 굴곡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제3남옹성 / 포혈(凸자 형)
제3남옹성
둘레는 125m이고 끝부분에 5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포혈의 형태는 특이하게도 ㅁ자형이 아니라 凸자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암문이 없다는 것이 다른 옹성과 차이점이다.옹성으로 내려가는 출입문을 찾기가 어렵다. 제2남옹성을 지나서 처음 나오는 암문으로 내려가야 한다.
시구문 (제11 암문, 동암문)
시구문
제11 암문(동암문): 일명 시구문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문이다.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동문(좌익문)의 우측 50m 지점에 있으며 암문중에서 제일 크다. 동문(좌익문)은 계단이 있어 오늘날 광주시청 방향으로 내려가는 일반인이나 수레는 이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성내에서 처형된 신자들의 시신이 이 암문을 통해 계곡으로 버려졌다고 하여 시구문으로 불렸다.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이다.깊은 계곡의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려 엄숙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동문(좌익문)
동문(좌익문)
동문은 경기도 광주시청으로 통하는 도로변의 문이며, 남문과 함께 사용빈도가 가장 높은 문이다.
송암정터와 대부송(고사목의 벼슬 이름) / 송암정터 설명판
송암정(松巖亭)터
솔바위 정자 터다. 전설이 적혀 있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가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그때 기생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그 후 밝은 밤에는 노랫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바위에 서 있는 소나무 고사목에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주필암에서 보고 벼슬을 내리며 옥관자를 붙여주라고 하여 ‘대부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장경사신지옹성 / 장경사
장경사 신지옹성
눈에 잘 안 띄어 지나쳤다. 나중에 높은 위치에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발견하였다. 남한산성 내외에는 사찰이 많다. 스님들이 성곽 쌓는 축성과 청과의 전투에 승병으로서 대활약하였으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남한산성 여장
남한산성 여장
여장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적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1,897개의 여장이 있었다고 한다.
동장대터
동장대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에는 5개 장대가 있다. 해발 501m 지점으로 여주목사(좌영장)가 지휘하였다. 인조 2년(1624) 누각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초에 무너졌다. 남장대와 서장대는 재구축하였으나, 북장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새로운 성(봉암성, 신성)이 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봉암성 (길이 2,120m)
봉암성(외성)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게 빼앗겨 곤란을 격었다. 약점 보완 목적으로 숙종 12년(1686)에 성을 쌓았다. 이후 치성과 포대등을 증축하였다.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 성으로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길이는 2,120m이다.
북문(전승문)
북문(전승문)
북문은 이시백이 조선군 300명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청나라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모두 전멸한 일이 있었다. 패하지 말고 모두 이기자 해서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 전번에 방문했을 때도 공사 중이었다. 현재 해체 보수 공사이며, 2023.10월경 완공 예정이다.
북장대터
북장대터
장대란 지휘와 관측을 위해 지은 누각으로 남한산성의 5개 장대중 하나였다.인조 2년(1624) 남한산성 구축 시 단층누각으로 지었다. 5 영 중 중영장을 지휘하던 곳이다. 18세기초에 붕괴되었다. 남장대와 서장대는 재구축하였으나, 북장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의 축성으로 동장대나 북장대는 상징적인 의미만 있을 뿐 군사적 실효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연주옹성
연주옹성
5개 옹성중 하나다.
서문(우익문) : 좌(성 밖에서 촬영) / 우(성 내부)
서문(우익문)
서문은 인조가 삼전도에 내려갈 때 사용했다. 잊지 말고되새겨야 할 역사적인 문이다. 잠실 석촌호수 서호에 삼전도비가 있다.
(삼전도비는 2024.09.28일 필자가 백제 위례성 탐방 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방문 후, 석촌고분군으로 이동할 때 처음으로 찾아가 보았다. 한성 백제 박물관 탐방 관련글에 이미 발표한 내용과 사진 ***~***부분을 재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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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1)
인조 삼전도비
남한산성을 몇 차례 오르고, 글을 브런치에 올렸었지만, 삼전도비는 처음으로 봤다. 롯데호텔 월드에서 송파대로 따라 3분 정도 걸어가면 석촌 호수 서호 바로 입구에 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수성에 실패하고, 서문(우익문)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상세 방법은 글 끝 참조)로 항복하였다. 청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비석을 세워 남길 것을 강요했다. 이것이 삼전도 비다. 높이 395㎝, 너비 140㎝, 이수와 귀부를 갖춘 비이다. 공식 비명은 ‘대청황제공덕비‘다.
삼전도비(2) / 크기가 작다고 거부되어 버려진 받침돌
청은 비문 초안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했다. 이실직고 자기반성하라는 의미다. 대신들은 모두 비문 초안 작성하기를 극구 회피했다. 지목된 대신중에, 심지어 팔이 마비되었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겼다. 비석을 세운 후 청의 사신들은 올 때마다 비석 존재 혹은 훼손여부를 확인하고 탁본을 떠서 기념품으로 가져가서 청 태종에게 보고했다.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비각안에 또 다른 비어있는 받침돌이 하나 있는데, 크기가 작다고 청이 거부하여 버려진 것이다.
삼전도비(3)
조선에서도 청일전쟁 후 청의 힘이 약해지자, 땅속에 묻어 잊어버리거나 두 동강내어 폐기처리하기를 원했다. 몇 번이나 땅 속에 묻혔던 비석이 한강 장마에 우연히 드러났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보존 존치여부에 대하여 시민사회 학계 등을 망라하여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 자리에 다시 세워 보존하게 된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 “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던 동대문 형무소를 현재 보존 개방하였다. 더 나아가 사행 집행 현장, 형집행 밧줄, 발판 그리고 시신 운반 길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 학살 아우슈비츠 수용소 보존이유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삼전도비를 보고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자. 힘을 기르고 다시는 지지 않으면 된다. 살아있는 생생한 교육 현장이다.***
군포지 / 우측 사진(둥근 원안에 군포지의 옛날 모습이 희미하게 보임)
군포지(軍舖址) : 성을 지키는 초소로서 125개 군포지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매탄처
매탄처 (埋炭處) : 숯을 묻어 놓은 곳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하기 위해서 묻었다. (94군데, 24,192석)
매염처(埋鹽處) : 군포지와 군포지 사이에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 둔 매염처가 있었다.
수어장대
수어장대(守禦將臺)
서장대로 불리는 수어장대는 총지휘소인 장대로, 성내 동, 서, 남, 북 4개의 장대와 봉암성과 함께 축조된 외동장대 등 모두 5개의 장대가 있었는데이중 유일하게 남아있는장대다. 장수의 지휘와 관측 목적으로 1624년(인조 2년)에 지었다.
무망루
무망루(無望樓)
영조가 삼전도 굴욕을 잊지 말자는 각오를 다질 목적으로 지은 건물이다.
청량당 / 매바위
청량당(淸凉堂) /매바위
청량당은 수어장대 좌측에 있다.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부인 그리고 실제로 성벽을 쌓았던 벽암대사(1575~1660)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회장군은 공사비 횡령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부인 송씨도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이회장군은 조선조 인조 2~4년(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했는데,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마감하지 못하였다. 장군이 주색잡기에 빠져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하였다고 모함당하였다. 장군은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고 했다. 그런데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다. 매바위 상부에 매 형상이 지금도 남아있다.
남문(지화문)
남문(지화문)
이번 남한산성 탐방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져 넘어가고 있었다. 인조가 달려드는 청의 군대에 쫓겨 남문으로 들어왔을 때, 그 바람 앞의 촛불 같은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삼전도 방향에도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내일이면 다시 새로운 해가 뜬다.
*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를 대면할 때 취하는 인사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