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에 꼭 올라가 보고 싶었다. 아침(2024.05.18 토 맑음 20도) 일찍 출발했다. 임진왜란 당시 3대 대첩(행주산성-권율장군, 한산대첩-이순신장군, 진주대첩-김시민 장군) 중 하나였다. 육전의 3 대첩(행주산성 그리고 이치대첩-권율장군, 진주대첩-김시민 장군)지였다.
이순신장군이 원균의 모함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해임되어 백의종군하던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육해군을 총괄 지휘한 도원수(都元帥) 권율장군을 1597년 6월 5일 경남 합천군 율곡면 초계리에서 만나 임무를 맡았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되기 전까지 권율장군 막하에서 둔전(군사 식량 조달 감독관) 경영 임무 수행하고, 왜군 정보수집과 수군 재건 전략을 구상했다. 따뜻하게 맞아준 권율 장군의 중후한 인품이 느껴졌다. 역시 육지에서는 권율장군, 바다에서는 이순신장군이었다.
최근 산성의 묘미에 푹 빠졌다. 등산 운동도 되지만 성을 둘러싼 역사에 흥미가 더해졌다. 당대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서 만든 역작이기 때문이다. 축성해야만 하는 절박한 고뇌와 피비린내 나는 현장 이야기를 후세들에게 꼭 전해주어야 되겠다는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을 느꼈다.
몽고의 침입으로 섬이었던 강화도에 강화산성을 건설 천도하여 39년을 버텼던 고려조정. 순천왜성에서 왜국으로 탈출기회를엿보며마지막까지 최후 근거지에서 초초하게 버티던 왜병들. 남한산성을 보강 축성하였지만 결국 힘에 밀려 47일 만에 청 오랑캐에게 굴복하였던 인조.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탕춘대성을 완성한 숙종의 집념. 사도세자의 애달픈 죽음을 수원화성 축성으로 승화시켜 아름다운 성을 완성한 정조. 우리의 역사다.
건물은 황룡사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전설 속으로 사라질 수 있지만, 성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돌 하나 정도는 흔적으로 남아 후세들에게 교훈을 남긴다. 권율 장군과 행주치마 그리고 2,300명으로 30,000명의 왜군을 물리쳤다는 현장이 몹시 궁금했다.
선정릉역에서 하차하여 1082번 버스를 타서 행주산성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산성입구까지 음식점이 많아서 점심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다음 탐방코스인 절두산 순교성지가 예정되어 있어 김밥으로 대신하고 급히 이동하였다. 시간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행주산성 안내도
행주산성 (幸州山城)
경기 고양시 행주동 덕양산에 흙과 돌로 쌓은 산성이다. 삼국시대 처음 지어져서 총길이 450m(최고 높이 5m) 석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임진왜란 때 토성을 쌓고 목책을 2중으로 건설하고 한강과 창릉천을 배수진으로 삼았다.
출토 유물
삼국 한성백제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7세기의 석축 성벽이 축조된 흔적을 발견했다. 12~13세기경 토성이 축조되었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석축 성벽에 복잡한 개축이 계속되었다. 일부 구간의 기단은 석축이며 그 위에 토성으로 개축된 특이한 사례라고 한다.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행주산성 안내
고양 행주산성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었다. 내성은 정상부 능선을 따라 쌓은 약 450m 정도의 테뫼식 석성 산성이었다. 외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북쪽의 작은 골짜기들을 둘러쌓은 포곡식 산성이었다.
토성
석성 흔적
외성 전체 성벽 약 1km 중 415m를 복원하였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와 자기, 기와와 철기 등이 있었다.
행주대첩의 승리 요인
1) 권율장군의 뛰어난 전략전술
2) 최첨단 과학 무기 신기전
3) 민·관·군의 혼신을 다한 협동심
4) 산성의 자연적, 지리적 조건이 탁월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발발 후 전세를 역전시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명나라 군에게 반성과 용기를 촉구하여 한성을 수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군은 군세를 합하여 한성의 외곽지역에 동, 서, 남쪽 3면으로 각 부대를 배치하여 왜군을 공격하여 기세를 꺾고, 보급선을 일제히 차단하였다. 수세에 몰려 한성 주변으로 퇴각한 왜군은 혹한과 군량 부족으로 고초를 겪다 1593년 3월에 벌어진 노원평전투에서 패퇴함으로써 한성에서 철수하였다.
이후 남쪽으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점차적으로 왜군은 한반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행주산성 전투의 승리는 선조는 물론 벽제관에서 패하고 평양으로 후퇴한 명의 이여송 부대를 놀라게 했다. 이후 권율장군은 도원수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선조가 선무공신 일등 공신에 봉하고 '충장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행주대첩도
행주산성 (幸州山城) 전투
(이해를 돕기 위하여 고양시 홈페이지 참조함)
권율(權慄, 1537~1599, 63세 졸, 영의정권철의 막내아들) 장군은 당시로서는 고령인 46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년 1592년 4월 14일 일본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약 1만 8천여 병력이 부산성 공격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한양 평양으로 북진했다. 권율 장군은 광주목사로서 1,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항전하면서 왜병을 대적하기 위하여 북진하였다.
조선군이 육지에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것은 1592년 7월 8일 권율 장군의 이치전투(충남 금산/전북 완주 사이 고개)에서였다. 동년 12월 말에는 수원 독산성(경기 오산)에서 또다시 일본군을 물리쳤다. 장군은 전라병사 선거이를 수원 광교산에, 전라 소모사 변이중은 양천에, 창의사 김천일은 통진에, 충청감사 허욱은 파주와 양주를 연결하는 전선을 구축했다. 명나라 군사와 협공하여 한성을 수복하려는 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1593년 1월 8일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여세를 몰아 한성으로 내려오다가 1월 28일 벽제관 부근 숫돌고개에서 패하고 말았다.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군이 개성과 평양으로 퇴각함으로써 권율장군은 고립되었다. 어쩔 수 없이 행주산성에 배수의 진을 치게 되었다.
장군은 해발 124.9m의 행주산성(덕양산)에 이중으로 목책성을 설치하고 토성을 보완한 후 활과 화살을 점검하고 화차와 화약을 정비하였다. 또한 수차석포와 투석전에 사용될 돌들을 모았다. 진지 후방에는 여러 개의 가마솥을 준비하여 방화용수를 채우도록 하였다. 적의 화공작전에 대비해서 젖은 수건과 재가 들어 있는 주머니를 한 자루씩 허리에 차도록 하였다.
행주산성의 남쪽 한강변과 동쪽 창릉천변은 절벽과 경사가 심해 적의 침투는 거의 불가능했다. 경사가 완만한 곳은 서북쪽인데 계곡과 계곡 사이에 능선이 길게 이어져 능선자체가 성곽의 치(雉) 역할을 했다. 서북쪽에 군사를 집중 배치했다. 가장 취약한 서북쪽 자성에는 처영이 이끄는 1,000여 명의 승군을 배치하였다. 북문장으로 무과출신 무장현감 이충길을 삼았다. 내성은 조방장 조경이 담당하고 권율 장군은 정상에 지휘소를 두고 총괄 지휘했다.
그리고 외성 450m에 군사를 일렬로 배치하고, 적이 침략하기 용이한 계곡과 능선 부근에는 전봉, 함덕립 등 맹장과 정병, 그리고 유능한 궁수와 화차를 집중 배치했다. 왜군은 이치전투와 독산성전투에서의 권율장군에게 당한 패배를 설욕하고자 한성에 주둔하고 있는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6시경 일본군 3만 대군이 행주산성을 둘러쌌다.
관군
마침내 7차례에 걸친 치열한 왜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제1차 공격
제일 먼저 제1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조총부대가 공격했다. 조선군은 성책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려 화차, 수차석포, 총통, 각궁을 일제히 발사하였다. 집중공격을 당한 왜군의 말들이 놀라 날뛰었고 말에서 떨어진 왜군은 혼비백산 궤멸상태가 되어 물러났다.
제2차 공격
제2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마에노 나가야스(前野長康)가 공격해 왔다. 조선군은 화차로 산 아래에서 올라오는 왜군을 좌우상하로 자유롭게 조준 발사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적장이 흉부 관통상을 입고 달아났다.
제3차 공격
제3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는 방어막인 성책을 부수기 위해 누대를 설치하고 누대 위에 조총수 수십 명을 배치하여 성을 향하여 공격했다. 조선군 조경은 지자포를 쏘아 이를 무너트리고 포전 끝에 큰 칼날 두 개씩을 달아 발사했다. 게걸음 작전으로 옆으로 피하는 왜군에게 비밀병기 비격진천뢰로 공격하였다. 큰소리를 내며 터지는 비격진천뢰의 공격으로 왜군들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왜군은 제1성책도 돌파하지 못했다.
의병
제4차 공격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직접 선두에 나와 제4대 장병들을 지휘했다. 마침내 성 깊숙이 침입하였다. 제1성책이 무너지고 적이 제2성책까지 접근하였다. 일부 조선군들이 동요하며 도망가기 시작했다. 권율 장군은 도망하는 군사 한 명을 잡아 참수했다. 직접 지휘하였다. 왜군 총대장 우키다와 제2대장 이시다가 부상을 입어 후퇴하였다.
제5차 공격
제5대장 키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의 공격이었다. 바람 부는 방향으로 불을 붙여 제2성책의 일부에 불이 붙었다. 조선군은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미리 준비한 방화수로 불을 끈 후 공격하는 일본군에게 돌을 퍼부었다. 말을 탄 채로 후퇴하던 키카와는 말이 넘어져 크게 다쳤다.
제6차 공격
제6대장 모리 모토야스(毛利元康)는 지형적으로 가장 약한 지역인 산성의 서북쪽 제2성책을 점령하려고 맹공격을 가하였다. 승장 처영은 서북쪽 자성에서 1,000여 명의 승병을 거느리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적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냈다. 적들이 근접하면 재주머니의 재를 뿌려서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전법까지 전개하자 적은 물러갔다.
승병
제7차 공격
제7대장 고바야카(小早秀包)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가 선두에 섰다. 집중공격으로 약해진 서북쪽의 자성을 공격해서 그곳의 일부분을 뚫고 내성까지 돌입하였다. 이때 승병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지휘소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권율 장군이 대검을 빼어 들고 총공격을 외쳤다. 승군들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여 분전하였다. 옆 진영의 조선군도 왜군을 향해 궁시를 집중 발사하며 처절한 근접전이 전개되었다.
행주치마 / 여성의병 대장 밥할머니
이때 조선군 진영에 화살이 떨어져 투석전을 펼쳤다. 화살이 떨어진 것을 안 왜군은 기세를 올리며 집중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부녀자들도 치마를 잘라 허리에 묶고 돌을 담아 날라 왜군에 맞서 싸웠다. 산성의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들이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하여 공격을 막아내야만 하였다.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때 마침 충청수사 정걸과 경기수사 이빈이 한강으로 수만 개의 화살을 가득 실은 배 2척을 몰고 와 화살을 공급하여 위기를 넘겼다. 창의사 김천일도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 후방을 지원했다. 또한 전라도 조운선 40여 척도 들어와서 양천 포구를 뒤덮었다. 왜군들은 이순신장군 함대가 출현한 줄 알았다고 한다. 조선군의 사기가 다시 올라 적을 완전히 격퇴시켰다. 행주산성 전투는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12시간 동안 이어졌다.
왜군은 일곱 차례의 공격하였지만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성을 지켜냈다. 왜군은 해가 저물면서 전력도 약해지고 조선군의 기습도 두려워 시체를 네 곳에 모아 불태우고 한성으로 퇴각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를 비롯해서 키카와 히로이에,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노 나가야스 등 4명의 장수가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당시 조선군은 시체 130급(級)을 수습하였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기치와 갑주, 창검, 병장기 등 727건의 군기물을 습득하였다.
주요 건축 기념물
권율 장군 동상
충장공 권율 도원수 상
대첩문 지나서 권율장군 상(총 8m, 동상 높이 4.5m 기단 3.5m) 이 있다. 동상 뒤쪽에 관군, 승병, 의병, 여성의 항전 모습 부조가 있다.
대첩문
대첩문
행주산성 출입문이다.
충훈정
충훈정
국궁 연습장이 있다.
충장사 / 권율장군 초상화
충장사
권율장군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매년 3월 14일 행주대첩 승리기념 제전행사가 열린다.
대첩기념관
대첩기념관
당시 무기고 군량창고로 추정되는 곳에 있는 전시관이다.
변이중 선생 문집
화차
신기전
비격진천뢰
변이중 화차
화차, 총통, 신기전 등 최첨단 무기가 있다. 대첩 그림 3점, 대첩비문 병풍, 망암 변이중 선생 문집, 토성에서 출토된 삼국시대 토기와 기와 등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각종 화살과 포
화살
차전대, 소전, 차소전등이 전시되어 있다.
각궁과 수노
각궁과수노
각궁은 물소 뿔, 소힘줄, 뽕나무를 붙여 만들었다. 가볍고 탄력이 좋아 200보 날아간다. 수노는 틀을 만들어 방아쇠를 당겨 화살을 강력하고 정확하게 화살을 쏘는 무기다.
삼지창(당파)
길고 날이 3개나 되어 찌르고 치는 병기다.
덕양정
덕양정 / 진강정
한강과 인근도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다.
행주대첩비
행주대첩비
비각안에 1602년 장군 휘하 장수들이 세운 비다. 탁본이 있으며, 마모가 심하여 중건지(2호)를 행주서원에 건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