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부터 임진왜란의 첫 전투지 부산진성과 동래읍성 그리고 태종대 탐방을 계획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최초 침공로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마침 때가 왔다. 해외 근무 10여 년 동안 각별한 우정으로 다져진 친한 동료들이 있다. 매년 봄가을 2회 정기적으로 경인지역에서 친목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올해 봄 모임은 부산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동료의 아들 결혼식 축하 겸 부산 해운대에서 만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다.
아침(2024.06.16. 일, 06:30) 수서역 SRT 출발, 09:05 부산역 도착하였다. 귀경은 부산역 발 21:20분에 하였다. 부산역 내 여행안내소에서 관광지도를 받았다. 안내소는 여행할 때 어느 지역을 가든지 반드시 들러야 하는 장소다. 안내하시는 분이 동래성 탐방 시에는 4호선 수안역 안의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을 둘러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수안역에서 안내하시는 분은 동래부동헌-동래향교-서장대-북문-북장대-인생문-동장대-군관청-충렬사 코스를 추천해 주셨다. 탐방에 큰 도움이 되었다.
부산역
하루 일정의 여행이므로 결혼식 참석 및 여행을 감안해서 동래성(오전)-결혼 예식장(오후 1시 40분 시작)-부산진성-영도(태종대)로 일정을 짰다. 양복 구두 넥타이는 배낭에 넣어 매고, 등산화를 신고 땀나게 돌아다녔다. 동래읍성 탐방 마지막 장소인 충렬사 내부 탐방에 시간을 지체했다. 썬템시티역 화장실에서 급히 옷을 갈아입고 바로 옆 예식장에 도착했을 때는 5분 전에 이미 예식이 시작되었다. 옛 동료들과 혼주는 이미 착석하고 있었다. 미안했다. 참고로 신랑은 잘 생겼고, 신부는 참 예뻤다.
임진왜란시 최초 왜군의 침공 순서는 절영도(영도)-부산진성-동래성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부산 절영도(영도) 앞바다에 도착(왜군 700척, 18,700명, 대마도 출발 8시간 소요), 바로 상륙하지 않고 선상에서 1박 하면서 부산진성 부근을 정찰했다.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 장군은 절영도(영도) 훈련 중, 접근하고 있는 대규모 왜선단을 발견하였다. 당연히 부산진 첨사 정발 장군은 황령산 봉수대에서 한양으로 봉화를 올렸다. 항복을 권하는 왜국 전령의 목을 벴다. 부산진성(현재 좌천동 범일동 일대, 조선군 600~800명 / 왜군 18,700명)에서 4월 14일 조선 최초의 혈전이 벌어졌다. 중과부적으로 오전 5시경 시작된 전투는 북문을 돌파당하고 정발 장군은 정오 무렵 왜군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뒤이어 오후 2시경 성이 함락되었다. 처절한 학살이 있었다.
동래부 순절도
다음날인 4월 15일 임진왜란 두 번째 전투가 동래성과 다대포진성에서 벌어졌다. 동래 부사 송상현이 2시간을 버티며 끝까지 막아냈으나 결국 전사, 동래성마저 함락되었다. (조선 군민포함 3,500명 : 군 1,000명 및 민간 2,500명 전투 참가, 결과 3,000명 전사 혹은 학살당함, 500명 포로 / 왜군 30,000명). 다대포진성은 다음 기회에 방문하기로 하였다.
戰死易 假道難 / 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
동래읍성
부산진성 함락 후 4월 14일 오후 왜군은 동래읍성 남문에 선발대를 보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달라고 쓴 나무 푯말을 세웠다(戰則戰矣 不戰則假我道). 그러나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목패를 성 밖으로 던졌다. 죽음을 각오한 격전이 벌어졌다. 결국 동북쪽산의 성벽이 허물어졌다. 성안 군은 물론 백성들도 낫, 기와등으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부사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은 뒤 북쪽을 향해 절을 하고 나서 고향의 부모님에게 보내는 시 한수를 썼다.
여성들도 지붕 위에 올라가서 기와를 던지며 왜군에 맞서다 죽음을 당했다. 충렬사 경내 본전 앞 좌측 의열각에 모셔져 있다. 후일 동래읍내 제삿날(4월 15일)이 같은 집이 많았다. 시체 더미 밑에서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이 제사를 지냈다. 전 가족이 모두 죽어 제사를 지낼 수 없는 집이 더 많았다. 조선 내 다른 지역의 전투의지를 미리 꺾기 위해, 왜군은 성내에 피가 흐르는 사람포함 거의 모든 동물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동래읍성 내의 민 관 군의 장렬한 순절 소식은 전국 각지 의병 궐기의 계기가 되었다.
동래읍성 범위 조선 전기(임진왜란 당시)와 후기 / 현재 (출처 : 한겨레)
왜군은 동래성을 함락하고 나서 동래성 동쪽에 위치한 망월산에 동래왜성(동장대 위치에 천수각-지휘부)을 축조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완전히 황폐화된 동래읍성을 보수할 여력이 없어 약 140년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을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6배에 달하는 규모로 다시 축성하였다. 오늘날의 동래읍성 범위다.
조선 전기(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
조선 전기 임진왜란 당시의 읍성은 현재(3.8km) 남아 있는 읍성의 크기의 1/6이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다. 성벽에 치(雉)가 아주 조밀하게 돌출되어 있었고 작지만 해자(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사 부근)도 둘러져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사진 정면에 성벽 일부가 산자락에 걸친 부분이 보이는데 이 동쪽을 왜군이 뚫고 들어왔다고 한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 (수안역 구내)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수안역)
2005년 부산 4호선 수안역 건설 현장에서 임진왜란 당시 해자(폭 5m, 높이 1.7m~2.5m, 성벽밖에 땅을 파서 물이 흐르게 한 도랑 형태 방어시설)가 발견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희생된 수많은 인골, 각종 무기류(갑옷과 투구, 칼, 화살, 낫 등) 출토되었다. 특히 해자 내부에서는 칼에 베이거나 두개골에 구멍이 난 인골들이 발견되었다.
해자 발굴 당시 모습 재현
수안역 역사 내 역사관을 조성하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동래부 순절도, 동래읍성 모형, 영상실, 출토유물 전시실, 해자모형과 해자 단면도 전시실이 있다. 트릭아트 포토존, VR체험존에서 당시 최신식 무기인 신기전(대신기전, 산화신기전, 중신기전, 소신기전)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 또 대장군전(천자총통 1km 사거리, 수철연의환 4km 사거리)과 장군전(2km 사거리)도 볼 수 있다. 승강장 벽면에는 동래부순절도, 임진전란도, 동래부사접왜사도등이 전시되어 있다.
동래부동헌
동래부동헌
동헌은 조선시대 수령의 집무공간이다. 최접경지로서 군사요충지였다. 정 3품 당상관으로 부사를 임명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동래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크게 인식되었다. 일제는 1910년 10월 일본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부산포를 부각하기 위해서 동래부를 없애고 동래군으로 격하시켰다. 중심 건물인 충신당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동래군청 청사로 사용하였다.
동헌의 충신당
동래부 동헌에는 충신당과 좌우의 연심당과 독경당, 문루였던 망미루, 동래부 동헌 외대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부속되어 있었다. 동래부 동헌 일곽은 조선시대 부산(동래)의 행정, 국방, 외교, 교역 업무를 도맡았던 제일 관방의 위상을 보여주는 관아시설이었다. 초중학교 학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집중해서 경청하는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우리의 미래다.
동래향교
동래향교
수안역 해설사분의 말씀대로 동래시장을 거쳐 향교로 향했다. 3.1 운동 만세거리를 지나 동래시장을 통과했다. 아쉽게도 동래시장은 휴장일(매월 1, 3주 일요일)이었다.
명륜당
조선 초기부터 부(府)·목(牧)·군(郡)·현(縣)의 행정 구역에 향교를 1개 교씩 설립하여 전국적으로는 300여 곳이 있었다. 향교는 성현에 대한 제사 공간과 경전을 공부하는 강학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제사 공간의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孔子, B.C.551~B.C.479)를 비롯한 중국의 큰 유학자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앞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에는 중국 유학자와 우리나라 유현 18명의 위패를 봉안해 왔다. 교수와 훈도가 각 1명씩 배정되었고, 학생 정원은 70명이었다. 교재로는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 효경(孝經), 근사록(近思錄)과 역사서, 시문 등이 사용되었다.
동재
향교의 강학 건물 이름을 ‘명륜당’이라고 한 것은, 유교 공부가 바로 인륜을 밝히는 데에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양편에 있는 큰 방은 교육 요원이 거처하던 곳이고, 그 앞 좌우의 동재와 서재는 생도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대구 달성 도동서원의 경우 동재에 선배 생도들이 사용했다. 은행나무는 공자가 은행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杏壇)의 의미를 담고 있다.서원의 배치구도가 전국 거의 대동소이한 것 같다.
서장대
서장대
파출소 근처에서 서장대 올라가는 입구를 물어 진입 산성 성곽을 따라 올라갔다. 자비암과 아파트 사이를 올라가니 성벽이 보였다. 성벽을 새로 축성했는데 돌을 지나치게 각을 세워 다듬고 인공미가 나서 좀 실망했다.
동래읍성 성곽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모습은 꼭 수원 화성의 서장대를 닮았다. 1734년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세운 15개 보루 중 하나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에는 1870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세웠다고 전한다. 1937년 동래읍성과 함께 철거되고 방치되다가 1979년 북문, 동장대, 북장대와 함께 복원되었다고 한다.
북문
북문
초등학생들이 해설하시는 분의 설명을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다. 동래읍성 북문에는 동래읍성역사관과 장영실과학동산도 함께 있다.
내주축성비
옹성의 형태가 굉장히 특이하다. 내주축성비는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동래성을 크게 구축한 것을 기념하고자 세운 비다.
북장대
북장대
동래읍성의 북쪽 장대다. 마안산(馬鞍山)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래읍성에서 가장 높은 고지에 있다.
북장대에서 본 경관(1)
북장대에서 본 경관(2)
새해에는 여기서 해맞이 행사도 열린다.
인생문
인생문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문이라 하여 인생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은 조선 후기 읍성의 1/6 규모에 지나지 않았다.
인생문
즉, 임진왜란 당시에는 현재 인생문 고개라 불리는 곳에는 성곽이 없었고 조선후기에 세웠다.
동장대
동장대
동래읍성의 동쪽 장대다. 내부에 망월대(望月臺)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충렬사의 권역 내부에 속하며 군관청(軍官廳)과 더불어 동절기 출입금지구역이다. 충렬사에서는 화재 및 사고 방지를 위하여 매년 11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6개월간 망월산의 입산을 통제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동래읍성의 권역이 아니었다. 동래성 전투 이후 이곳 망월산에 왜군이 동래왜성을 축성했다. 동장대 자리가 왜성의 중심부인 천수각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장대 바로 남쪽에 왜성 흔적이 있다. 순천왜성에서 본 축성모양이 그대로 닮아 있어 놀랐다. 동장대를 중심으로 동북쪽 절벽에 해자 2곳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이곳을 증산(甑山)이라 불렀다.
군관청
군관청(軍官廳)
조선정면 7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민도리집이다. 후기 동래부사 정철이 건립한 관청이라고 한다. 동래부는 왜와 대치하는 국방상의 요충지로서 1655년(효종 6) 동래 독진(獨鎭)의 설치로 그 뒤 양산군 및 기장현(機張縣) 소속의 군병(軍兵)까지도 통합, 지휘하였다.
충렬사
충렬사
충렬사는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순절하신 부산지방 순국선열의 영령을 모신 곳이다. 현재의 충렬사는 1605년(선조 38년)에 동래부사 윤훤(尹暄)이 동래읍성 남문 안에 충렬공(忠烈公) 송상현(宋象賢)을 모신 송공사(宋公祠)를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낸 것을 시작했다. 1624년(인조 2년)에 선위사 이민구(李敏求)의 건의로 충렬사(忠烈祠)라는 사액을 받고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충장공(忠壯公) 정발(鄭撥) 장군을 모셨다.
충렬사 기념비
그 후 1652년(효종 3년)에는 충렬사를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선열의 충절과 학행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고 사우(祠宇)와 서원(書院)으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1709년(숙종 35년)에는 충렬공과 충장공이 순절할 때 함께 전사한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유생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 비장 송봉수(宋鳳壽)와 군관 김희수(金希壽), 겸인 신여로(申汝櫓), 향리 송 백(宋 伯), 부민 김 상(金 祥) 등의 위패를 모신 별사를 옛 송공사 터에 건립하였다.
1736년(영조 12년) 별사에 모셨던 분을 충렬사에 합향하였으며, 1772년(영조 48년)에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 공을 추배하고 임란 때 송상현공과 정발장군을 따라 순절한 금섬(金蟾)과 애향(愛香)을 위해 충렬사 동문 밖에 사당을 세웠다.
충렬사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하여 현재는 95,804m²의 경내에 본전 외 15동의 건물이 있으며 부산지방에서 순절한 93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5월 25일 부산 시민 모두의 정성을 모아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