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읍성 탐방 후 해운대에서 옛날 동료의 아들 결혼식 참석, 식당에서 혼주와 신랑 신부와 인사를 했다. 이어서 동료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역구내 화장실에서 다시 환복을 하고 등산화로 갈아 신었다. 지하철을 타고 문현역에서 하차 출구로 나와 지도앱을 켰다. 20여 년 전에 부산 방문 후 처음이어서 잠깐 길치가 되었다. 높은 빌딩과 많은 아파트 숲이 새로 생겨났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어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인생이 끊임없이 흘러가듯 시골 고향도, 내가 알고 있던 부산도 상전벽해로 변했다. 다행히 동천에서 길을 찾아들어 부산진성 공원으로 올라갔다.
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
부산진성(釜山鎭城) 전투
1592년 4월 13일 오후 5시경 왜군은 부산 절영도(영도) 앞바다에 도착(왜군 700척, 18,700명, 대마도 출발 8시간 소요), 바로 상륙하지 않고 선상에서 1박 하면서 부산진성 부근을 정찰했다. 부산진 첨절제사 정발(鄭撥) 장군은 절영도(영도)에서 훈련 중, 접근하고 있는 대규모 왜 선단을 발견하였다. 즉시 황령산 봉수대를 통하여 한양으로 봉화를 올렸다. 왜관에 군사를 보내 조치하려고 했으나 거주 왜인들은 이미 대부분 사라졌다. 다음날 4월 14일 부산진성(현재 범일동 일대, 조선군 600~800명 / 왜군 18,700명)에서 임진왜란 최초의 대혈전이 벌어졌다. 중과부적으로 오전 5시경 시작된 전투는 북문을 돌파당하고 정발 장군은 정오 무렵 왜군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뒤이어 오후 2시경 성이 함락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부산진 순절도'가 잘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의 부산진성과 조선후기의 부산진성( 출처 : 팬저의 국방여행)
부산진성(釜山鎭城)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의 부산진성 위치는 현재 정공단(鄭公壇, 좌천동)이 있는 지역 일대를 중심으로 뒷산인 증산(甑山)을 둘러싸고 있었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은 부산진성을 허물어 버렸다. 증산(甑山)에 주성인 부산포왜성(증산왜성)을 쌓고 바닷가에 지성(支城)을 쌓았다. 본성인 증산왜성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아들 같은 의미의 자성대(子城臺, 범일동)라고 이름 지었다.
조선은 왜군을 몰아낸 뒤에 자성대 왜성을 활용하여, 사대문을 축조하고 관아(官衙)를 정비하여 부산진 첨사영(釜山鎭僉使營)으로 사용하였다. 자성대와 부산진성 이름이 혼용되었으나, 자성대는 왜군 측에서 부른 이름이어서, 부산시민이 이름 되찾기 운동을 벌인 끝에 부산진성으로 다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곳곳에 순천왜성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왜성 축성 흔적이 남아 있다.
왜군은 부산진 전투 후 축성한 증산왜성을 방어측면에서 중요하게 여겼다. 반면 종전 후 조선은 해변 방어에 이점이 있는 바닷가의 부산진성(현재 위치, 왜군 측 호칭 자성대)을 중시했다. 결론적으로 임진왜란 결과로 부산진성이 범일동 일대에서 좌천동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부산진성
부산진성의 변천과정
고려 말부터 부산포 일대에는 왜구의 침입이 대규모로 늘어났다.
1407년(태종 7) : 부산진에 경상좌도 수군사령부 설치
1421년(세종 3) : 경상 좌도(左道)의 부산포에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都按撫處置使)를 두고, 그 아래에 부산진 첨사영(釜山鎭僉使營) 설치
1490년(성종 21) : 부산진을 보호하기 위해 부산진성(조선 전기)을 지금의 정공단(鄭公壇, 좌천동) 부근에 축성
1510년 (삼포왜란, 三浦倭亂, 부산포 염포 제포) : 부산포 왜관(倭館)에 대비하기 위해서 꾸준히 성보(城堡) 증축. 성의 북쪽에 관문(關門)을 만들어 왜관 왜인(倭人)을 별도 관리
1591년(선조 24) : 부산포의 성곽을 증축, 참호(塹壕)를 설치, 왜 침략 대비
1592년(선조 25) :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과 부산진성 성민은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 부산진성은 왜군에 의해 파괴
1592년 부산포해전 (10월 5일, 부산시민의 날 제정) : 이순신 조선수군은 부산포에서 일본함척 100여 척을 파괴, 제해권을 장악
1593년 (선조 26) 3~8월 : 왜군, 증산왜성과 자성대 왜성 축성
1607년(선조 40) : 조선 수군, 자성대 왜성 자리로 부산진 이전
1614년 (광해군 6) : 전선(戰船)을 감추기 위해 선착장을 만들고 파낸 흙으로 생긴 언덕에 누각(영가대) 설치
1974년 : 부산진성 동문(건춘문), 서문(금루관), 장대(진남대)를 복원
2022년 : 동문 현판은 진동문으로, 진남대 현판은 승가정으로 변경
2023년 1월 4일 : 국가지명위원회는 왜성에서 유래된 '자성대공원'을 '부산진성공원'으로 개정고시
부산진 순절도(釜山鎭殉節圖)
해발 120m 증산 아래 정공단(鄭公壇) 일대의 본성에서 첫 전투를 하는 모습과 이와 관련된 성곽의 일부이거나 왜관 주변부에 성곽의 일부가 아래쪽에 그려져 있다.
원래의 부산진성 서북쪽에 임진왜란 때 왜군이 쌓은 증산 왜성의 경사진 성벽과 성벽이 몇 겹으로 둘러쳐진 왜성의 흔적이 있다. 왜군이 조선 성곽을 허물고 왜성을 쌓았다. 정공단(鄭公壇) 자리에 부산진성의 남문이었으며, 성문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다.
부산진성 안내도
현재의 부산진성(釜山鎭城)
조선후기의 부산진성 규모보다도 현재의 부산진성은, 위의 첨부 지도처럼 대단히 축소되었다. 마땅히 원 위치에 복원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 이후 각종 도시 개발 여파 및 바다 매립, 6.25 임시수도로 인구집중 등으로, 원래 위치의 각종 문들이 부산진성 공원(구 자성대공원) 일대로 집중하여 이전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동서남북에 성문이 있는데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壘關), 남문을 진남문(鎭南門), 북문을 구장루(龜藏樓), 암문(暗門)은 교상각(橋上閣)이라 하였다. 성 안에는 객사(공신관) 등의 많은 관사와 시탄고(柴炭庫) 등 창고가 있었다.
금루관 (서문)
서문(금루관, (金壘關)
부산진성은 서문이 주출입구며 금루관이라 불렸다.
서문성곽우주석
부산진성 서문 성곽우주석(釜山鎭城 西門 城廓隅柱石)은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부산진성에 있는 기둥이다.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의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서문석곽우주석(남요인후)
남요인후(南徼咽喉) : 서문 동쪽에 서 있는 돌기둥에 ‘나라의 목에 해당하는 남쪽 국경이다’는 뜻으로 새겼다.
서문 성곽 우주석(서문쇄약)
서문쇄약(西門鎖鑰) : 서쪽 돌기둥에는 '서문은 나라의 자물쇠와 같다.'라는 뜻으로 새겼다.
임진왜란 후 이 성을 다시 쌓으면서 왜적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자 새겼다. 즉 이곳을 잃게 되면 나라를 잃게 되고, 여기가 열리면 도적이 창고를 연 것과 같이 된다는 뜻으로, 이 지역이 지니고 있는 국방상의 중요성을 나타냈다. 이 돌은 부산진지성의 원래의 서문터였던 지금의 성남초등학교(증산왜성과 부산진성 중간지점 위치) 교정에 있었는데 1975년 서문인 금루관(金壘關)을 복원하면서 돌기둥을 이곳으로 옮겨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진동문 (동문)
동문 (진동문, 鎭東門)
부산진성 동문은 진동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남문 (진남문, 鎭南門)
부산진성 남문은 바다와 맞닿아 있었다. 일제강점기 부산진성 앞바다가 매립되면서 남문 위치에 성남초등학교가 자리 잡았다.
북문
북문(구장루, 龜藏樓)
부산진성 북문은 구장루(龜藏樓)라고 불렸다. 북문 현판을 찾지 못했다. 마침 산보 중인 마을 어르신께 물어보았다. 어르신은 북문에는 현판이 없다고 했다. 공원 출입구처럼 생겨 좀 실망했다.
장대(將臺)
승가정
승가정 (勝嘉亭, 일명 진남대 鎭南臺)
1974년 부산진성 정상에 장대를 설치하고 진남대라고 이름을 지었다. 진남대는 부산진성 남문인 진남문에서 이름을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2022년 9월 진남대 안내판은 승가정으로 교체됐고, 현판도 승가정으로 변경되었다.
승가정
영남진지는 승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정자(亭子)는 부산의 자성(子城)에 있다. 산이 마치 엎어놓은 가마(釜)와 같다 하여 부산(釜山)이라 한다. 그 지형을 따라 돌을 쌓은 것이 성의 형상과 같기 때문에 자성(子城)이라 한다. 승가(勝嘉)의 뜻은 좋은 땅으로 인해 아름다운 정자를 짓는다는 데 있다. 영가대(永嘉臺)는 물가에 있고 승가정(勝嘉亭)은 산의 꼭대기에 있다. 이 정자에 오르면 평평하고 대해(大海)를 굽어보고 대마도(對馬島)를 바로 바라볼 수 있다."
영가대(1)
영가대(2)
영가대(永嘉臺)
1614년 광해군 6년 순찰사 권반은 못을 파고 호(濠)를 만들어서 전선(戰船)을 감추었다. 작은 언덕을 쌓아서 대(臺)를 만들었다. 1624년 인조 2년 이민구가 권반의 고향이 안동이라 안동의 옛 이름인 영가(永嘉)를 가져와 이름을 지었다. 조선통신사의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던 해신제가 거행된 곳이었다. 통신사의 출발점이었다.
조선통신사 역사관 입구
조선통신사 역사관(朝鮮通信使歷史館)
조선통신사는 조선 시대에 조선과 일본 간의 평화를 위한 국가 사절단으로, 한양에서 에도까지 왕복 약 3,000km의 행렬을 하였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여 년 간 일본을 12차례 방문하였다.
조선통신사 역사관 (영가대 옆)
조선통신사의 이동 경로는 한양→부산→대마도→시모노세키→오사카→교토→에도(도쿄)로 이어졌다. 한 번 왕래하는 데 6개월~1년이 걸렸다. 통신사 사절단 규모는 정사, 부사, 종사관, 학자, 예술인, 악대, 경호원, 통역관 등 300~500명에 이르렀다.
조선에서 일본 막부에 파견한 외교사절이었다 통신(通信)’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평화와 선린우호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영가대와 조선통신사
조선통신사는 통신사의 총책임자인 ‘정사’, 문장을 써서 대화하는 필담을 위한 ‘제술관’, 사절단의 행렬, 의식, 연희의 음악을 담당하는 ‘전악’, 말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인’ 등 총 400명에서 500명에 이르는 대 사절단이었으며 일본의 많은 문인과 필담을 나누고 노래와 술잔을 주고받았다.
마상재인
조선통신사의 여정
2층 건물 안팎에 상설 전시실, 3D 영상 홍보관, 행사 마당 등의 시설이 있다. 1층에는 조선통신사의 역사적 이해를 목적으로 제작된 영상을 보여주는 3D 영상 홍보관, 전시 공간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에는 조선통신사가 오갔던 행로를 알 수 있는 지도와 모형, 통신사 일행이 타고 같던 배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일본 에도성(江戶城)에 들어가는 통신사 행렬을 재현한 영상이 상영되고 있다. 자성대 공원 내 영가대(永嘉臺) 옆에 건립하였다.
천장군 기념비
천장군 기념비 (천만리 영양 천공비, 千萬里潁陽千公碑)
임진왜란에 참가한 명장(明將) 천만리(千萬里) 장군이 귀화하였다. 후손이 세운 천장군기념비(千將軍記念碑)가 부산진성 꼭대기 승가정옆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