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4.04. 28, 일, 맑음, 23도) 아침 6시에 일어났다. 특히 이번 남한산성 탐방의 주목적은 연주봉 옹성과 봉암성의 벌봉(봉암)을 탐방하는 것이었다. 산성 탐방의 묘미는 옹성과 암문 탐색이다. 이곳을 통하여 특수 부대가 적을 공격하고, 외부로부터 응원군이 성내로 들어오고 물자 조달과 통신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15암문 / 문제의 돌(좌측)
봉암성 탐방 후 한봉성(큰골)으로 이동하기 위하여 제15 암문을 통과하여 35m 정도 이동하였다. 그런데 급경사 내리막길 산책로옆에 위험하게 보이는 성인 팔 한아름 크기 돌이 슬쩍 움직였다. 위험을 직감하고 한봉 탐방을 중단하고 회군을 하였다. 물론 관계 당국(경기도 남한산성 세계유산센터)에 신고를 하였다. 다음날 다행스럽게도 담당자가 긴급 출동하여 조치하여 주었다. 만약 그 돌이 굴러 떨어져 등산객이 다치는 일이 일어났다면, 아찔하다.
남문방향 등산 진입로(산성역 출발)
작년에는 전철 남한산성입구역에서 내렸었으나, 이번에는 처음으로 산성입구역에서 내렸다. 새로운 등산로로 접근하고 싶었다. 선행자를 따라가다 보니, 도로차선 좌측 산등선(서울 측)에 전망 좋은 등산로가 보였다. 불망비를 거쳐 남문(지화문)으로 올라갔다.
작년 남한산성 등산(2) 때(2023.03.18. 글)와는 달리 반대 방향(시계방향)으로 돌아보기로 하였다. 내성 전체 한 바퀴 거리는 약 7.7km 3시간 20분 거리(제5 코스, 내성 기준, 안내표지판)이라고 안내 표지판에 기재되어 있다. 외성인 봉암성 둘러보는 시간이 더 필요하여 약 7시간 소요되었다. 약 3만 보 걸음이다.
이중환(李重煥, 1691~1756년, 실학자)은 택리지(擇里志)에서 병자호란 때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것(1637. 01. 30, 47일간 항쟁)은, 다만 양식이 적고 강화가 함락된 때문이었다고 탄식했다. 그만큼 견고한 산성이었다.
남한산성은 서울 송파구, 경기 성남시, 하남시와 맞닿아 있다. 경기 광주시에서 성내를 관할한다. 약 2,000년 전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으며, 나당전쟁 때인 673년(신라 문무왕 13년)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1624년 (조선 인조 2년) 시작하여, 2년 만인 1626년 중앙부의 본성(8.9km, 면적 약 2.15 km2)이 완공되었다.
문 4개, 여장 1,897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 등이 있다. 봉암성(蜂巖城), 한봉성(漢峰城), 신남성(新南城) 등 3개의 외성과 4개의 옹성도 함께 연결되었다. 2014년 카타르 도하 유네스코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동쪽(3.2km, 봉암성과 한봉 구축)과 신남산성(0.2km, 남쪽 보강)을 축성하여 방어력을 강화했다. 호란 때 청이 봉암(벌봉) 방향에서 대포를 쏘아 포탄이 남한산성 행궁 안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내외성 총 성곽길이는 12.4km다. 서쪽과 북쪽은 가파르고 높고 험난하여 비교적 방어에 유리하였다. 청량산(482.6m, 수어장대 근처), 남한산(522m, 벌봉), 한봉(418m)등을 연결하고 있다. 성안은 낮고 평평한 분지다.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는 남쪽의 남한산성,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산성, 서쪽의 강화산성이었다.
남한산성 성곽
축조된 건축물이 워낙 많고 복잡하고 용도가 다양하여, 이해를 돕기 위하여 아래와 같이 기능별로 별도 정리했다.
인조가 삼전도에 내려갈 때 사용한 굴욕적 역사적인 문이다. 잠실 석촌호수 서호에 삼전도비가 있다.
(삼전도비는 2024.09.28일 필자가 백제 위례성 탐방 시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을 방문 후, 석촌고분군으로 이동할 때 처음으로 찾아가 보았다. 한성 백제 박물관 탐방 관련글에 이미 발표한 내용과 사진 ***~***부분을 재인용한다. 석촌 호수와 백제 석촌 고분군 탐방 : https://brunch.co.kr/@jylee2020/187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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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1)
인조 삼전도비
남한산성을 몇 차례 오르고, 글을 브런치에 올렸었지만, 삼전도비는 처음으로 봤다. 롯데호텔 월드에서 송파대로 따라 3분 정도 걸어가면 석촌 호수 서호 바로 입구에 있다.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수성에 실패하고, 서문(우익문)에서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상세 방법은 글 끝 참조)로 항복하였다. 청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비석을 세워 남길 것을 강요했다. 이것이 삼전도 비다. 높이 395㎝, 너비 140㎝, 이수와 귀부를 갖춘 비이다. 공식 비명은 ‘대청황제공덕비‘다.
삼전도비(2) / 크기가 작다고 거부되어 버려진 받침돌
청은 비문 초안을 조선이 직접 작성하도록 했다. 이실직고 자기반성하라는 의미다. 대신들은 모두 비문 초안 작성하기를 극구 회피했다. 지목된 대신중에, 심지어 팔이 마비되었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비의 표면 왼쪽에는 몽골문으로, 오른쪽에는 만주문으로, 그리고 뒷면에는 한문으로 새겼다. 비석을 세운 후 청의 사신들은 올 때마다 비석 존재 혹은 훼손여부를 확인하고 탁본을 떠서 기념품으로 가져가서 청 태종에게 보고했다. 우리 민족의 치욕적인 역사기록이다. 비각안에 또 다른 비어있는 받침돌이 하나 있는데, 크기가 작다고 청이 거부하여 버려진 것이다.
삼전도비(3)
조선에서도 청일전쟁 후 청의 힘이 약해지자, 땅속에 묻어 잊어버리거나 두 동강내어 폐기처리하기를 원했다. 몇 번이나 땅 속에 묻혔던 비석이 한강 장마에 우연히 드러났다.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 보존 존치여부에 대하여 시민사회 학계 등을 망라하여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이 자리에 다시 세워 보존하게 된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치욕의 역사를 잊지 말자 “이다.
일제 강점기 우리의 독립 운동가들을 고문하고 학살했던 동대문 형무소를 현재 보존 개방하였다. 더 나아가 사행 집행 현장, 형집행 밧줄, 발판 그리고 시신 운반 길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유대인 학살 아우슈비츠 수용소 보존이유도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삼전도비를 보고 결코 부끄러워하거나 의기소침하지 말자. 힘을 기르고 다시는 지지 않으면 된다. 살아있는 생생한 교육 현장이다.***(끝)
동문(좌익문)
동문(좌익문)
동문은 경기도 광주시청으로 통하는 문이다. 출입구가 계단으로 되어 있어 실질적인 출입문은 시구문(제11 암문)이었다.
북문(전승문)
북문(전승문)
북문은 이시백 장군이 조선군 300명을 이끌고 출전하였으나 청군의 기습공격을 받아 모두 전사하였다. 절대 패하지 말고 모두 이기자 해서 북문의 이름이 전승문이 되었다. 전번에 방문했을 때는 공사 중이었으나, 금회 방문 때에는 완공되어 전승문 현판이 걸려 있었다.
장대
성내 동, 서, 남, 북 4개의 장대와 봉암성과 함께 축조된 외동장대 등 모두 5개의 장대가 있었다. 이중 유일하게 수어장대가 남아있다. 나머지 장대들도 빨리 복구되었으면 좋겠다.
수어장대
수어장대(守禦將臺)
서장대로 불리는 수어장대는 총지휘소인 장대로, 장수의 지휘와 관측 목적으로 1624년(인조 2년)에 지었다.
무망루
무망루(無忘樓)
영조가 삼전도 굴욕을 잊지 말자는 각오를 다질 목적으로 지었다.
청량당
청량당(淸凉堂) /매바위
수어장대 입구 좌측에 있다. 남한산성을 쌓을 때 동남쪽 축성의 책임자였던 이회 장군과 부인 그리고 실제로 성벽을 쌓았던 벽암대사(1575~1660)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회 장군은 공사비 횡령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고 부인 송씨도 한강에 몸을 던져 따라 죽었다.
매바위 (꼭대기에 매의 형상)
이회 장군은 조선조 인조 2~4년(1624~1626) 사이에 지세가 험악한 산성 동남쪽의 축조 공사를 맡아했는데, 워낙 지형이 험해서 제 날짜에 공사를 끝내지 못하였다. 장군이 주색잡기로 공금을 탕진해 공기를 맞추지 못하였다는 모함당하였다. 장군은 '내가 죄가 없으면 죽는 순간에 매 한 마리가 날아오리라고 했다. 그런데 참형을 당하는 순간 매 한 마리가 날아와, 서장대(수어장대) 앞에 있는 바위에 앉아 죽임을 당하는 장군을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바위를 매 바위라고 불렀다. 매바위 상부에 매 형상이 지금도 남아있다.
동장대터
동장대터
해발 501m 지점으로 여주목사(좌영장)가 지휘하였다. 인조 2년(1624) 누각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18세기초에 무너졌다. 서장대는 재구축하였으나, 북장대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연주봉옹성과 봉암성이 새로 구축되어 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북장대터
북장대터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구축 시 단층누각으로 지었다. 18세기초에 붕괴되었다. 북장대 동장대는 다시 짓지 않았다. 한봉성과 연주봉옹성이 북장대와 동장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남장대터
남장대터
주춧돌만 남아 있다. 재 구축이 한층 쉬울 것 같다.
외장대터 / 남한산 표시석
외장대터
봉암성 구역은 성곽이 허물어져 있는 곳이 많으며, 현재 공사 중이다. 외장대터만 남아 있다. 1686년(숙종 12)에 봉암성 축조할 때 건립되었다. 누각 없이 축대만 설치하였다.
시구문(제11 암문, 동암문)
암문
시구문 (제11 암문, 동암문)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문이다.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다. 동문(좌익문)의 우측 50m 지점에 있으며 암문중에서 제일 크다. 동문(좌익문)은 계단이 있어 오늘날 광주시청 방향으로 내려가는 일반인이나 수레는 이문을 이용했다. 조선말 천주교 박해 때 성내에서 처형된 신자들의 시신이 이 암문을 통해 계곡으로 버려졌다고 하여 시구문으로 불렸다. 천주교인의 성지순례 장소이다.
옹성
옹성(甕城)은 성문 밖으로 한 겹의 성벽을 더 둘러쌓는 이중의 성벽이다.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는데, 이중 3개의 남옹성은 산성 남쪽의 완만한 지형을 보완하고, 신남성 쪽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그리고 연주봉 옹성은 금암산 쪽으로부터, 장경사신지옹성은 한봉성 쪽으로부터,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제1남옹성
제1남옹성
포대(좌측 높은 축대가 장수의 지휘소) / 포혈(ㅁ자형)
제1남옹성은 둘레가 426m이고, 옹성 끝에는 8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포혈의 형태는 ㅁ자형이다. 장수의 지휘를 위한 축대가 설치되어 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제7 암문이 설치되어 출입할 수 있다.
제2남옹성
제2남옹성
포혈(ㅁ자형)
둘레가 318m이며, 다른 옹성과는 달리 이중으로 되어 있다. 제8 암문으로 출입할 수 있다. 옹성 끝에는 포대가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곳에 홍예문이 있으며, 포대는 동서남 3방향으로 설치되어 있다. 포혈의 형태는 ㅁ자형이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암문이 설치되어 있다. 남한산성 옹성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제2 남옹치
제2남옹성치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남장대 바로 앞에 설치되어 있다. 남쪽은 지형이 완만하고 성벽 굴곡이 약하여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설치하였다.
제3남옹성 / 포혈(凸자 형)
둘레는 125m이고 끝부분에 5개의 포대가 설치되어 있다. 포혈의 형태는 특이하게도 ㅁ자형이 아니라 凸자 모양으로 설치되어 있다. 본성과 연결되는 지점에 암문이 없다는 것이 다른 옹성과 차이점이다. 옹성으로 내려가는 출입문을 찾기가 어렵다. 제3남옹성을 지나서 처음 나오는 제9 암문으로 내려가야 한다.
장경사 신지옹성
장경사 신지옹성
장경사보다 더 높은 위치(제2암문)에 있다. 남한산성 내외에는 사찰이 많다. 스님들이 성곽 쌓는 축성과 청과의 전투에 승병으로서 대활약하였으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연주봉옹성
연주봉옹성 포대
연주봉옹성
연주봉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하였으며, 둘레는 315m이다. 제5 암문으로 통하며, 아차산 북쪽과 남양주 일대 한강이, 이성산성과 하남시춘궁동 일대가 잘 보인다. 최근 포대를 복원하였다.
봉암성(외성)
봉암성 (외성)
본성의 동쪽인 동장대 부근에서 북동쪽의 능선을 따라 벌봉 일대를 포괄하여 쌓은 외성이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내부의 동태를 훤히 조망할 수 있는 벌봉을 청군에게 빼앗겨 곤란을 겪었다. 청군이 이곳에서 포를 쏘아, 행궁 안에 포탄이 떨어졌다.
벌봉
약점 보완 목적으로 숙종 12년(1686)에 성을 쌓았다. 이후 치성과 포대등을 증축하였다. 새로 쌓은 성이므로 신성이라고도 하며, 동쪽 성으로 동성이라고도 하였다.
봉암성
길이는 2,120m이다. 외장동터가 있다. 복구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벌봉(512.5m) 바위는 벌처럼 생겼다고 한다.
봉암신성 신축비
봉암신성 신축비가 있는데, 1686년(숙종 12) 4월 1일 시작하여 5월 9일 끝냈다는 기록이 자연석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여장 (수리완료 / 수리전)
남한산성 여장
여장은 성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적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만든 시설이다. 1,897개의 여장이 있었다고 한다.
군포지
군포지(軍舖址)
성을 지키는 초소로서 125개 군포지가 있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매탄처 (埋炭處)
숯을 묻어 놓은 곳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용하기 위해서 묻었다. (94군데, 24,192석)
매염처(埋鹽處)
군포지와 군포지 사이에 90여 군데의 소금을 묻어 둔 매염처가 있었다.
송암정터 (대부송-고사목)
송암정(松巖亭)터
대부송(고사목의 벼슬 이름)
솔바위 정자 터다. 전설이 적혀 있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가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한 한 사내가 황진이를 희롱하려 하자 황진이는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다. 그때 기생 중 한 사람이 갑자기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였다. 그 후 밝은 밤에는 노랫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송암정터
바위에 서 있는 소나무 고사목에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주필암에서 보고 벼슬을 내리며 옥관자를 붙여주라고 하여 ‘대부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망비 (산성역-남문 중간정도)
불망비
후세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세운 비석이다. 조선후기 문신인 수어사 서응명, 부윤 홍익필, 이명중 세 사람이 백성을 사랑한 공적을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하나의 바위에 3기의 비(碑) 형태로 새겼다.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 행궁南漢山城行宮
2007년 사적 제480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행궁지는 약 1만 평 규모이다. 1624년(인조 2) 9월 서장대(西將臺) 아래쪽에 건립되었다. 남한산성 행궁은 다른 행궁과 달리 종묘와 사직에 해당하는 좌전(左殿)과 우실(右室)을 갖추었다. 행궁의 규모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으로 모두 227칸의 규모이다.
상궐은 행궁의 내행전으로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평면적 180.4㎡(55평)이다. 그중 왕의 침전인 상방이 좌우 각각 2칸씩이고, 중앙의 대청이 6칸, 4면의 퇴칸이 18칸으로 모두 28칸이다.
한남루
한남루(남한산성 행궁 출입문)
온돌은 상궐 건물지 내 남·북퇴 간 옆 협간에서 각 2개 소씩 모두 4개 소가 발견되었다. 이 온돌시설들은 건물 기단토를 구축한 후 되파기하여 축조하였다. 상궐의 담장은 건물을 중심으로 내곽과 외곽의 2중으로 구축되었으며, 담장 폭은 1m 내외이다.
행궁권역
하궐
하궐은 상궐의 외전인 외행전으로서 상궐 동편 삼문 밖에 있으며, 해발 369m로서 상궐지에 비해 약 6m 낮은 위치에 있다. 하궐은 상궐과 함께 1624년(인조 2) 총융사 이서(李曙)가 남한산성 수축과 함께 시작하여 이듬해에 준공되었다. 서쪽 담의 문으로 일장각(日長閣)과 통하였고, 동쪽의 정문이 한남루이다.
외행전
내행전
재덕당
하궐지의 규모는 동서 30m, 남북 70m, 전체 면적 2,100㎡(635평)으로서 발굴조사 결과 하궐지는 상당 부분이 훼손되었음이 밝혀졌다. 상궐과 하궐을 포함하여 행궁을 구성했던 부속시설로 좌전(左殿), 우실(右室), 재덕당(在德堂), 한남루(漢南樓), 인화관(人和館) 등이 있었다.
좌승당
좌전 / 영녕전 / 정전
행궁 전경
행궁 및 부속시설은 인조 이후 건립된 것으로 19세기 초까지 계속 증축, 보수되었다. (참조: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만해 기념관 / 만해
만해 기념관(萬海 記念館)
방문하는 당일 만해 한용운 한시 특별전(202.04.02~05.31)이 개최되고 있었다. 님의 침묵은 언제나 가슴을 저미게 한다. 1920년대 일제의 혹심한 언론 탄압과 표현 자유 억압에 문학적 저항시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의 뜻을 기리는 전당이다. 만해기념관 표지석옆의 글을 옮겨 보았다.
님의 침묵
나라 사랑의 독립정신, 님. 침묵. 사랑의 증도가를 읊은 문학사상과 그의 철학사상을 후세에 전하여 민족자존의 정신을 겨레의 가슴에 심고자 설립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살며 선봉에 서서 3.1 독립운동을 이끌었으며, 최고형을 선고받았고, 옥중투쟁 3대 원칙(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스스로 지킨 강직한 인물이시다. 출옥 후에도 신간회운동, 만당사건, 학병. 징병을 반대하며 끝까지 민족적 지조와 자존을 지키셨다.
3.1 운동 공약 3장 / 안중근 의거 찬양시(안해주)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반대하며 군국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하였으며, 조국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영양실조로 쓰러져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영면에 드셨다. 조국광복 후, 위당 정인보 선생은 만해 한용운 선생을 “풍란화 매운 향내 당신에 견줄쏜가. 이 날에 님계시면 별도 아니 빛날까. 불토가 이외 없으니 혼아 돌아오소서.”라고 선생의 높은 뜻을 기렸다. 1962년 3월 1일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공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훈기번호 제25호)을 선생께 추서 하였다.
만해 한용운 한시 특별전
만해기념관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일생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상설종합 전시실과 기획전시실, 교육관, 체험학습실, 그리고 야외 조각공원으로 꾸며져 있는 복합 문화공간이다.
남한산성 탐방안내도
남한산성 주변지도
*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
중국 청나라 시대에 황제를 대면할 때 취하는 인사법이다. 삼궤구고두례를 행하는 방식은 “궤”(跪)의 명령을 듣고 무릎을 꿇는다.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손을 땅에 댄 다음에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하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선다. 이와 같은 행동을 3회 반복한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