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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Jun 06. 2024

새남터 순교 성지 탐방

김대건 신부 순교 성지

순교성지 새남터 기념 성당 (정면)

   한국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의 순교지인 새남터를 꼭 가보고 싶었다. 서울 용산역 7번 출구에서 약 1km 남서쪽에 있다. 도보 약 15분 거리다. 새남터는 일명 '노들' 또는 '사남기'라고 불렸다.  조선 초부터 군사들의 모래땅 위 훈련장인 연무장(演武場)이자 국사범(國事犯)과 중죄인(重罪人)의 처형장(處刑場)이었다. 옛날 기준, 한양성 밖 한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이하 많은 내용은 한국순교복자 성직수도회 발간,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성지' 팸플릿을 참조하였음을 미리 밝힙니다.)   


   신유박해(1801년, 순조 1) 때 주문모 신부(중국인)가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여 새남터 첫 순교자가 되었다. 기해박해(1839, 헌종 5) 때 조선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였다. 병오박해(1846, 헌종 12) 때 김대건 신부(한국 최초 사제, 9월 16일 순교, 25세)와 현석문 가롤로가 순교하였다. 병인박해(1866, 고종 3) 때 조선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신부, 볼리외 신부, 도리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푸르티에 신부,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 알렉시오가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초대교회의 많은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주요 건축물은 새남터성지 기념 성당(지상 2층,  지하 1층), 새남터성지 기념관(지하), 새남터성지 안내소(입구)가 있다.   

성당 측면 정면(십자가의 길)

새남터 기념성당 대성당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해인 1984년 공사를 시작해서 1987년 한국 전통양식으로 기념성당을 완공하였다. 성당의 전체적인 외형은 한복의 도련선을 본 따 치마를 겹쳐 이은 겹치마를 두른 형태다.

새남터 성당 대성전(2층, 출처 인터넷)
유해실 (대성전 2층, 좌 우측 금빛, 우측-김대건 신부, 출처 인터넷)

새남터 기념성당 대성전

   성당내부는 제대 부조, 강론대, 감실, 성수대등은 오석, 칠보석, 고로석, 문경석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느낌을 준다. 안에는 새남터성지에서 순교하신 9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성당 소성전(1층)

   

새남터 형장

새남터 형장

모래땅 위의 군사훈련장이자 사형집행장이었다. 옛날에는 한성 밖 한강변 모래사장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 (12위 성인 : 출처 인터넷)

스테인드글라스

   기념성당 야외에 대형 스테인드글라스에 성 김대건 신부와 복자 주문모 신부를 포함 12위의 성인들이 그려져 있다.

김대건 신부 동상 (좌측 검은 돌 : 머릿돌)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동상

1821.01.21  충청도 솔뫼 출생

1845.08.17 : 김가항(중국 상하이) 성당에서 한국 최초 사제 서품, 충남 강경 황산포를 통해 조선 입국

1846.09.16 : 순위도에서 체포,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25세)   

주문모 야고보 신부 동상

주문모 야고보 신부 동상

1752.          : 중국 강남 소주부 출생

1794.12.24. : 조선 입국

1801.05.31. : 의금부에 스스로 걸어서 자수, 새남터 군문효수형 순교 (49세)    

순교자들의 모후 (성모상)

순교자들의 모후 상

   성모상 앞 "순교자들의 모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새남터 기념관(좌측, 지하실)

새남터 성지 기념관      

   새남터성지에는 목숨을 바쳐 그리스도를 증거 한 순교자들을 기리고, 순교 정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2006년 9월 3일 순교자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한국천주교 초기 4대 박해사와 관련된 유물과 신앙의 터전인 교우촌의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 유해실에는 김대건 신부외에 타 지역에서 순교한 5위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참고로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전국 곳곳에 분산되어 모셔져 있다. 새남터 성지 내에도 2군데 모셔져 있다.   


한국 천주교 4대 박해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이다.

한국 천주교 박해(1)
시복 시성 과정(2)
시복 절차(3)
신유박해

신유박해(辛酉迫害, 1801, 순조 1)

   1801년 1월에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 씨의 금교령으로 시작된 박해이다. 신유박해로 인해 조선에 첫 선교 사제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와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이 순교하였다. 황사영은 그의 백서에서 "이제 조선교회는 박해가 없어도 망할 수밖에 없다"라고 한탄했다.     

기해박해

기해박해(己亥迫害, 1839, 헌종 6))

   기해박해로 인해 순교하였던 70위가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안에 포함되어 있다. 30년 동안 이어온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와 새로 등장한 풍양 조 씨의 정쟁과 더불어 지방 관리들의 탐욕에  의해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었다.

처형장 / 정의배 마르코 (출처 : 기념관 내 영상관 화면에서 캡처)

   기해박해로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순교하였다. 달레의 한국천주교사에서는 기해박해 때 참수된 신자가 70명이 넘는다고 기록되어 있고, 기해일기에는 참수된 순교자가 54명이고, 옥사나 장사한 순교자는 6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오박해

병오박해(丙午迫害, 1846, 헌종 12)

   1846년 6월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박해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봄 새로운 해로 개척을 위해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해로도(海路圖)를 전하려다가 순위도 등산진에서 6월 5일에 체포되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외국 선박의 출몰과 국경 침범을 문제 삼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하였다. 이 박해로 인해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 가를로는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병오박해 순교자들에 대해서는 페레올 주교가 조사 기록하여 시복 및 시성에 소중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김대건 신부  / 서한

성 김대건 신부의 옥중 서한

   김대건 신부는 최양업, 최광재와 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신부 양성 교육을 위해 마카오에서 교육받았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를 활용하려고 배교(背敎)를 수없이 권유하였으나 끝내 거부하였다.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 순교하였다. 옥중에서 파리로 보낸 21통의 편지 중 18통이 현재 남아 있다.     

병인박해

병인박해(丙寅迫害, 1866, 고종 3)

   1866년에 시작되어 1873년 흥선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된 가장 참혹하고 희생이 많았던 박해이다.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 약 2만 3천 명 중 약 1만 명이 순교할 정도로 참혹하였다. 병인박해로 인해 순교자를 현양 하는 순교 신심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순교자를 현양 하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로써 한국천주교회는 더욱 깊은 영성을 지니면서 현대의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다.

103위 순교성인화

103위 순교성인화

   천주교가 이 땅에 들어와 100여 년 동안 (신해박해에서 한불수호통상조약까지)은 박해시대였다. 순교자 약 1만 명 중 교회법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성인에 오른 이가 103위이다. 1925년에 시복 된 한국의 79위는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때 순교자들이다. 1968년 복자 위에 오른 24위는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이다.

103위 성인

   한국천주교 창설 200주년 기념행사로 1984년 5월 6일에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한국천주교 순교자 103위가 성인으로 시성(諡聖)되었다.     

추모의 장

추모의 장

   순교자 14인의 동판화가 새겨져 있다.

형벌 도구

새남터 형장과 형벌 도구들의 모습

   조선 시대에는 태(笞) ·장(杖) ·도(徒) ·유(流) ·사(死) 5종류의 형벌이 있었다. 태형은 5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로, 죄수를 형대에 묶고 하의를 내려 엉덩이를 노출시킨 다음 엉덩이를 때린다. 장형은 방식은 태형과 같고 회초리 크기만 다르다. 형은 죄인을 관아에 구금하고 일정한 노역을 시키는 일종의 징역형(1년~3년)이며 도형을 겸할 수도 있다. 유형은 일종의 귀양이다.


   사형은 목을 매는 교형(絞刑)과 목을 베는 참형(斬刑) 그리고 머리·양팔·양다리·몸통 등의 여섯 부분으로 찢어 죽이는 능지처사(凌遲處死), 이렇게 세 가지가 있었다. 칼(枷, 가-목에 씌워 움직일 수 없도록 한 도구), 차꼬 (着錮-두 발을 넣어서 움직임을 제한), 금군월도(禁軍月刀), 수갑 등의 형벌 도구가 있었다.     

처형 및 군문효수(軍門梟首) 장면(1)
신자들의 마을에 평화가 깨어지고, 체포되어 끌려가는 장면(2)

처형 및 군문효수(軍門梟首)

   기념관 유해실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이외에 타 지역에서 순교한 5위의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상복(喪服)으로 변장한 외국인 신부

상복(喪服)

   조선 천주교 박해 당시 서양 선교사들이 밀입국과 선교 활동을 할 때 입고 다녔던 방갓형 삿갓 차림의 상복이다. 조선 관습상 상복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말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에 서양인의 신분을 감출 수 있었다.

최양업 신부

최양업 신부

(1821년 순조 21~1861년 철종 12, 두 번째 조선인 신부 )

  그의 아버지는 박해를 피하여 경기도 안양 수리산에 정착하여 산간생활을 하였다.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하여 김대건·최방제와 함께 조선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마카오 도착 1년 만에 최방제가 풍토병으로 사망하였다. 최초의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은 입국에 성공하여 활약하다가 1846년에 순교하였다.


   1849년 4월 상해에서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하여 김대건에 이어 두 번째 조선인 신부가 되었다. 수차례 입국 실패 끝에 그 해 12월 조선입국에 성공하였다. 철종 때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지나치게 전교에 힘쓰다가 과로로 쓰러졌고 식중독이 겹쳐 1861년 6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배론신학교(배론성지)에서 베르뇌(Berneux, S.F.) 주교에 의하여 거행되었다. 초기의 두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과 그는 ‘피의 증거자(순교)’와 ‘땀의 증거자(순직)’로 지칭되고 있다.


   오래전에 배론성지에 순례 간 적이 있었다. 십자가의 길과 황사영 벽서를 썼다는 토굴을 둘러본 다음, 최양업 신부의 묘소 앞에서 신부님 강론이 있었다.


   내일이면 천주를 믿은 죄로 참수되는 어른이 있었다. 그의 아들이 전날 밤 망나니 집을 몰래 찾아갔다. 망나니는 청룡도로 중죄인의 목을 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아들은 무릎을 꿇고 망나니 앞에 보따리 하나를 공손히 바쳤다. 그 안에는 돈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 이 돈으로 고기를 잡수시고 힘내세요. 내일 아침 저희 아버지 목을 치실 때, 제발 단 한 칼에 끝내 주십시오."


   그 시절에는 천주교 박해가 절정인  때여서 참수형이 다반사였다. 힘이 천하 장사인 망나니도 목을 쳐야 하는 사람이 많았다. 나중에는 힘이 달렸다. 때로는 머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한 끝에,  겨우 죄인의 목을 쟁반에 담아 참수형 책임 관리자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 뇌물을 바친 이유였다.

새남터 14인 순교자
새남터와 경부선 철길

   

순례코스


참조 :  '천주교 순교성지 새남터 성지' 팸플릿 : 한국순교복자 성직수도회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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