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두산 순교 성지(切頭山 殉敎聖址) 안내도 (이해를 돕기 위해, 안내도 번호에 따라 아래 글의 번호를 일치시킴)
오래전부터 절두산에 꼭 올라가 보고 싶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시고 나서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부활을 의심하는 토마스의 말처럼,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복음 20장 25절)
서울 마포 합정동 양화진 한강변 언덕에 있다. 천주교의 대표적인 순교성지다. 본래는 산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치켜든 것 같다고 해서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렀다. 양화진은 '버들꽃 나루'라고도 불렸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잠두봉에서 수많은(약 8,000여 명)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형으로 목이 잘리고, 시신은 한강에 던져 넣는 집단 처형(순교)이 벌어졌다. 그러나 절두산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상 확인된 신자수는 33명(무명 5명 포함) 뿐이다. 그밖에 이름 모를 순교자가 너무 많다. 이유는 선참후계 원칙으로 심문과정 없이 우선 닥치는 대로 처형하였기 때문이다.
신자들의 처형을 피눈물을 흘리며 견디어 내던 외국인 신부가 스스로 관청을 찾아갔다. "내가 당신들이 찾던 바로 그 신부요!" 그리고 처형되었다.
절두산에서 가장 먼저 순교한 가족은 이의송(李義松, 의원, 45세)의 식구로 1866년 9월 15일 부인(김예쁜)·아들(이천조, 23세)과 함께 처형당했다. 그날 이들 외 3명이 더 있었다. 그 후 머리 자르는 산이라는 뜻인 절두산(切頭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절두산
병인박해의 배경을 잠깐 살펴본다. 절두산 바로 아래 양화진나루터에서는 한강을 통해서 전국 각 지방의 조세곡과 어물, 채소 등을 실은 배들이 오고 갔다. 1866년 2월 프랑스군함이 천주교탄압을 문제 삼아 한강을 거슬러 양화진과 서강까지 진입하였다. 격분한 흥선 대원군(이하응, 1820~1898)은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잠두봉에서 목을 베어 참수하였다.
그는 고종 때 섭정 집권 초기, 풍양 조 씨 세도하의 박해보다는 다소 온건한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프랑스를 통하여 막아보려고 선교사들과 접촉하였다. 종교의 자유를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참고로 4대 박해가 있었다. 신유박해(1801년, 순조 1), 기해박해(1839, 헌종 5), 병오박해(1846, 헌종 12), 병인박해(1866, 고종 3)다.
그러나 베르뇌 주교는 러시아와는 종교가 달라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1865년 러시아가 두만강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새로운 통상조약을 조선에 요구하자 신자들이 방아책(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를 막는 방책)을 건의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서양인들을 이미 사형에 처하고 있었다. 대신들이 압박하고, 선교사들과 정치적으로 연관될 것을 두려워한 대원군은 주교들과의 면담을 미루었다. 마침 러시아의 위협이 누그러졌다. 결국 1866년 1월 5일(음) 최형 등을 체포하고, 1월 9일 베르뇌 주교(3월 7일 새남터 순교)를 체포하면서 병인박해가 시작되었다.
현재 절두산성지 내에는 한국 천주교회 관련 사료와 유물·유품전시관, 28위의 성인유해를 모신 유해실, 순례성당, 순교자 교육관을 비롯하여, 야외 전시관등이 있다. 성당 건물의 십자가 뒤 둥근 원은 신자들이 옥에서 목에 찼던 칼을 표현한 것이다.
절두산 성지(양화진에서 촬영, 둥근원 : 옥안에서 죄수들이 목에 찼던 칼 형상)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병인박해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며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에 조선을 침범하였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천주교 신자들을 이곳에서 주로 처형하였다. 그 이유는 프랑스 함대가 거슬러 올라왔던 한강의 양화진(楊花津)에서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범 책임을 신자들에게 돌리고 그 본보기를 보이려 했다.
한국 선교성인 시성기념 교육관
1) 한국 순교 성인 시성기념 교육관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병인(1866년) 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1967년 10월 순교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영상교육관 식당 멀티미디어 홍보실등이 있다. 지하 3 4층에 납골당(6,452기 봉안 가능)이 있다.
팔마를 순교자들에게 주는 예수
2) 승리의 팔마를 순교자들에게 주는 예수
죽음으로써 믿음을 증언한 순교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갔음을 상징하는 팔마(종려나무 가지, 聖枝 성지)를 손에 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상이다.
십자가
3) 절두산 순교 기념탑 십자가
성녀 마더 데레사
4) 성녀 마더 데레사 상像
1910년 북마케도니아에서 태어나 1928년 가톨릭 수녀가 되었다. 인도로 귀화하여 캘커타에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기적심사를 통해 성인(聖人) 칭호를 받았다.
형구돌
5) 형구돌(刑具돌)
병인박해 때 흥선대원군의 지시로 천주교 신자들 교수형을 집행하기 위해 고안된 형구다.
세상에 빛으로 오심
6) 세상에 빛으로 오심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좌측)
7)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이 있다.
루르드 성모상
8) 루르드 성모상(초 봉헌)
성당 아래쪽에 성모 동굴이 있다.
성모 동굴 / 초 봉헌 대
성모 마리아가 발현(發顯)한 루르드 성모동굴(프랑스)을 표현한 것이다.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9)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병인박해 100주년인 1966년 이곳에 순교기념관과 순교기념 성당을 건립하였다. 1984년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성당 입구
몇몇 신자들이 앉아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기도 중에 순교자들을 생각하니, 마음 한가운데서 갑자기 뭔가 북받쳐 올라와 눈시울이 젖었다.
성인 유해실 (출처 : 인터넷)
10) 성인 유해실
1968년에는 병인박해 순교자 24위의 시복(諡福)을 맞이하여 기념 성당 지하실에 순교자 유해 안치실을 설치하였다. 순교성인 27위와 무명 순교자 1위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박물관 관람을 쫓기듯 17:00 몇 분 전에 마치고 안내하시는 자원봉사자 분한테 유해실 위치를 물어보니, 성당 안 제대 근처에 있다고 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아뿔싸, 성당문이 닫히고 있었다. 너무 아쉬웠다.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했다.
박물관
11)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1997년 11월 7일 양화진·잠두봉이 국가 사적 제399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8월에는 성지 내 박물관의 명칭을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변경하였다.
박물관 (출처 : 인터넷)
박물관내 분위기가 아주 경건하고 엄숙하여 사진 촬영 엄두를 못 내었다. 천주실의, 황사영 백서, 각종 책자 등이 기억에 남는다.
성인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상
12) 성인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상
최초의 한국인 신부로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수호자이며 103위 성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1821년 8월 21일 충청남도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김제준(이냐시오)과 고(高) 우르술라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36년 유학길에 올라 한국인 최초로 마카오로 건너가 신학문과 신학을 배웠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의 김가항(金家巷) 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으로 25세에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시복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5월 6일 시성되었다. 김대건 신부 동상의 손은 수많은 신자들이 만져서 빛이 난다.
오성바위(五聖石)
13) 오성바위(五聖石) / 척화비/ 우리들의 친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 야외 제대
다섯 성인이 잠깐 쉬어갔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5명의 신부들이 처형 장소인 갈매못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이 바위에 앉아서 다짐했다고 한다.
척화비
대원군의 척화비가 서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야외 제대
야외 미사 때 사용하는 제대다.
십자가의 길
14) 십자가의 길(15처)
예수가 사형 판결을 받고 죽음과 부활의 과정까지 사건이 일어난 지점을 표시한 15곳을 표현한 곳이다.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건립 당시 십자가
15) 병인순교 100주년 기념 성당 건립 당시 십자가
병인박해 100주년인 1966년 이곳에 순교기념관과 순교기념 성당을 건립하였다. 그 당시의 십자가다.
남종삼(1817~1866)은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침을 막아야 한다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여 지지를 받았으나, 국제정세의 변화로 천주교 박해로 돌변하였다. 프랑스 신부와 함께 체포되어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남종삼 순교사적비
1968년 10월 6일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통정대부 승지(通政大夫 承旨) 복자요한 의령남공순교사적비(宜寧男公殉敎事蹟碑)다. 통정대부는 정 3품의 당상관(堂上官)이다.
박순집 베드로 묘지
박순집의 부친인 박 바오로는 훈련도감의 군인으로서 기해박해(1839) 때에 새남터에서 순교한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의 시신을 찾아 노고산에 암매장하였다가 안양 삼성산(三聖山)으로 이장하였다. 그 사실을 박순집에게 전하였다. 박순집은 1901년 삼성산에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발굴하는데 기여하였다. 또한, 박 바오로는 병오박해(1846) 때 성 김대건 안드레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하자 그 시신을 찾아와 암매장을 하였다가 안성 미리내 성당으로 이장하였다. 당시 17세였던 박순집도 새남터로 끌려가는 김대건 신부를 증언했다.
박순집 공적비(좌측에 묘)
박순집이 군인이 되어 병인박해(1866) 때 베르네 주교 등이 새남터에서 순교하는 장면을 증언했다. 그들의 시신을 서울역 근처 왜고개에 암매장하였다. 그의 집안 15명이 모두 순교하였다. 박순집 혼자만 살아남아 시복(諡福) 수속이 시작되자 프랑스 신부들의 행적을 증언하였다. 1890년 제물포로 이주, 전교에 힘쓰다가 1911년 82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은언군 부인 진천 송 씨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은 사도세자의 아들이었으며 정조(正祖)의 이복동생으로 노론 세력의 견제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신유박해(1801) 때 그의 부인 송 씨와 함께 사사(賜死) 되었다. 그 후 은언군의 손자인 원범(元範)이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로 입적되어 철종(哲宗)으로 즉위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철종은 은언군과 그 일가들에 대한 일성록 등의 기록을 세초하고 신원을 복원, 비석을 세웠다.
성 요셉과 아기 예수상
17) 성 요셉과 아기 예수상
성모상
18) 현대의 성모상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 성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상
1984년 5월 3일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과 103위 순교자의 시성식(諡聖式)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찾았다. 1986년 교황은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 및 103위 성인 시성식을 시행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착좌 하여 미사 집전하였던 의자의 모형이다. 진품은 끄르실료 회관 내에 보존되어 있다.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20)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
병인박해(1866) 후 프랑스 신부 6명을 포함한 약 8,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참수한 가톨릭의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다.
절두산 순교기념비문
절두산 성지 순교자 명단(1)
절두산 성지 순교자 명단(2)
이승훈 베드로상 (절두산 바로 옆, 2호선 다리 밑 통과 지점 위치)
이승훈(李承薰, 1756~1801)베드로 像
1784년 2월 북경에서 예수회 그라몽 신부로부터 한국인 최초로 세례를 받았다. 천주교 서적 및 십자가상, 상본 등 많은 성물을 들여왔다. 이벽, 정약전, 정약용, 권신일 등과 신자공동체를 형성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되어 4월 8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