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청라언덕에서 내려와 계산 성당 탐방 후, 민족 시인 이상화와 국채보상운동의 서상돈 선생 고택을 둘러보았습니다.)
3. 시인 이상화 고택
민족 시인 이상화(李相和, 1901 ~ 1943년)는 일제 강점기의 시인, 작가, 독립운동가, 문학평론가, 번역문학가이며, 교육자, 권투 선수이기도 하다. 이상화는 대구 중구 서문로에서 태어났다.
4형제 중 둘째이다. 첫째 이상정은 독립 운동가이며, 셋째 이상백은 한국최초의 IOC위원이자 한국 사회학계의 선구자이고 넷째 이상오는 정통 수렵가이자 바둑 유단자이다. 3.1 운동 때 이상화와 더불어 학생운동을 주동했던 시인 백기만이 4형제 모두가 뛰어나 용봉인학(龍鳳麟鶴)이라고 하였다. 물론 연장자 순이다. 독수리 4형제라고나 할까?
용봉인학 시인 이상화 형제들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여덟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14세까지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한다. 우현학교(교남학교로 발전했다가 현재 대구 대륜중, 대륜고가 되었다.)에서 수학하였다.
역천 시비
1915년 경성 중앙학교(지금의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1918년 봄에 중앙학교를 중퇴하였고, 자퇴 직후 강원도 금강산 일대를 방랑하였다.열아홉 되던 1919년 대구에서 시인 백기만 등 친구들과 함께 3·1 만세 운동 거사를 모의했다.밀정의 추적으로 주요 인물들이 잡혀가자 경성부로 올라와 박태원(1897년 ~ 1921년. 음악가 박태준의 형)의 하숙집으로 피신하였다.
1919년 충남 공주 출신 서온순(徐溫順)과 결혼하였다. 부인 서온순은 독립운동과 유학 등 경제적으로 불우한 환경에도 남편탓이나 원망을 하지 않았다. 남편 사후에도 홀로 자녀를 키웠으며 그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일제에 정면으로 맞서다
1921년에 현진건의 소개로 월탄 박종화(朴鍾和)와 만나 〈백조〉 동인에 참여했고, 박종화의 소개로 홍사용(洪思容), 나도향, 나혜석, 박영희(朴英熙), 이광수, 최남선 등 문인들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 중 육당 최남선은 그의 큰집과 사돈 간이 되었다. 이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프랑스 유학을 준비하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시와 소설 등 작품 활동과 평론 활동을 하였다.
시인 이상화 연보
1925년에 작품 활동을 활발히 했다. 시뿐만 아니라 평론, 소설 번역에도 힘썼다. 8월에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7년 대구로 돌아왔다. 그해 의열단원 이종암(李鍾巖)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하였다.
1928년 신간회 대구지회 출판부 간사로 있던 중,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부호를 권총 협박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공갈미수 혐의로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그해 8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구류취소 처분을 받아 출옥했다.
서재
1933년 교남학교(지금의 대륜중. 고교)교사로 근무했다. 담당 과목은 조선어와 영어, 작문이었다.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하여 지도하기도 했다. 그는 약소 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도 권투를 넣었다고 한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사 경북 총국을 경영하였으나 이재와 상술에 눈이 어두워서 결국 1년 만에 실패하고 다시 교남학교의 영어, 작문담당 교사로 복직하였다.
1937년 3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큰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에 3개월간 다녀왔다. 그가 형을 만난 사실이 확인되면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으나 특별한 혐의점이 없어 그해 11월 말경 가석방되었다.
반다시 애써 할 일
1940년 대구부 계산 2동에 집을 마련하였다. 그가 새로 마련한 집 바로 앞에는 김광제와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던 서상돈 고택이 있다. 1940년 말 교남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대구 계산2동 84번지의 집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해부터 춘향전을 영어로 번역하고, 이어 한국 국문학사 영어 번역과 불란서시 등을 한글로 번역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4월 25일 오전, 위암으로 자택에서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별세하였다. 향년 42세.1948년 3월 14일 김소운이 발의하고 이윤수, 구상 등이 참여하고 죽순시인구락부가 협찬하여 시인을 기리는,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 "나의 침실로"를 달성공원에 세웠다.1996년 대구 두류 공원에 동상과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세웠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 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 되었다.
1999년 도시개발로 한때 헐릴 위기에 놓이기도 했으나 고택을 보존하자는 시민들의 모금활동과 100만 서명운동 결과, 2008년 8월 13일 고택을 보존 공개하게 되었다.
슬하에 세 명의 아들과 고명딸을 후사로 두었다.
시인 이상화 시비
그의 무덤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 13-1번지에 있다. 대구 도시철도 1호선 대곡역 3번 출구에서 200m 정도 올라가거나, 대곡역 정류장에서 하차 후 10분 정도 걸으면 동쪽에 야산이 있다. 조금만 올라가면 월성 이 씨 재실과 제각이 보이고 바로 뒤편으로 문중 묘소가 있다. 이곳에 이상화를 포함해 이상화의 아버지 이시우, 큰아버지 이일우, 형 이상정, 동생 이상백등의 무덤이 있다.
계산성당과 이상화 고택 안내표지판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은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오거리 인근에 매일신문사와 계산성당 뒤편,계산성당에서 동산병원까지 이르는 골목길이 대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도 대륜고등학교에서 그가 작사한 교가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시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년 개벽(開闢)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반일(反日) 민족의식을 표현한 작품으로 비탄과 허무, 저항과 애탄 이 깔려 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겨 얼어붙어 있을 망정,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국토, 즉 조국의 대자연은 우리를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국토는 일시적으로 빼앗겼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민족혼을 불러일으킬 봄은 빼앗길 수 없다는 몸부림, 즉 피압박 민족의 비애와 일제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식을 담고 있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1926. 6 개벽 70호에 발표)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어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여 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서상돈 선생 고택
4. 국채보상운동 서상돈 선생
서상돈(徐相敦, 1850년-1913년) 선생은 조선 및 대한제국의 민족 운동가이자 독립유공자, 기업인, 언론인, 공무원이다. 대구에서 지물(紙物)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하였다. 정부의 검세관(檢稅官)이 되어 정부의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金光濟)와 함께 대구에서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단연회(斷烟會)를 조직하고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로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이다.
서상돈 선생 고택(국채 보상 운동의 거장)
18세기 때부터 천주교 가문이었던 달성 서 씨 일가들은 을사 추조 적발 사건 이후 관군을 피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서상돈 일가 또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1801년 신유박해 때 강원도와 충청도로, 1839년 기해교난 때는 경상북도 문경, 상주 등지로 피난을 다니다 1859년 대구에 정착했다.
1866년 병인교난 때 신앙 문제로 문중에서 쫓겨나고 가산도 탕진했으나 독학을 하면서 지물 행상 및 포목상을 겸업하여 1886년경 상당한 재벌로 부상했다. 이후 정부의 특명으로 경상도 시찰관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대구교회 로베르 신부를 중심으로 교회 발전에 힘썼고, 사찰관에서 퇴임한 뒤 대구 교구가 설립되자 이의 발전에 힘쓰면서 성직자 돕기와 수녀 보호에 솔선수범했다.
서상돈 선생
병인박해 때 관헌에게 잡혀 대구감영 옥에 갇혀있던 삼촌 서인순을 방문했을 때 먹을 것이 없어 피고름이 묻은 멍석을 뜯어먹으며 생활하는 삼촌의 옥살이를 목격하게 된다. 이 일을 계기로 서상돈은 거상(巨商)이 된 이후로도 평생 쌀밥을 입에 대지 않았고, 봄, 가을 곡식 창고 문을 열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며 자선, 구휼 사업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외세의 국권침탈에 맞서 독립협회 주요 회원으로 활약했고, 제4기 민중 투쟁기에는 부설 만민공동회에서 재무부과장 및 부장급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검소한 방 모습
1904년 제1차 한일 협약 이후 대한제국정부의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차관공세를 통해 대한제국의 재정을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키려고 강제로 거액의 차관도입을 강요하였다. 일제는 그 차관으로 국민저항을 억압하기 위한 경찰기구 확장과 침략 위한 투자와 일인 거류민 시설에 충당하였다.
그렇게 불어난 대한제국 정부의 대일차관은 1,300만 원에 이르렀는데, 그 액수는 1907년 대한제국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정도였다. 나라가 외환에 허덕이며 점점 국가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자, 대구지역 민중들은 나라를 돕기 위해 자발적인 구국운동을 시작하였고, 서상돈과 그의 출판사가 그 시발점이었다.
서상돈 선생 모습
1907년 1월 29일, 출판회사 대구 광문사(廣文社)의 부사장이었던 서상돈은 회사 명칭을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를 마친 뒤, 2000만 국민이 3개월 동안 흡연을 하지 않고 20전씩 거둔다면 1300 만환을 모을 수 있으니 그 돈으로 국채를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고 발의를 하였다.
서상돈은 그 자리에서 자신부터 800원의 거액을 의연하였고 참석자 모두 동참하여 당일에만 2,000원의 의연금을 수합하였다. 그리고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의 이름으로「국채 1300만 원 보상취지」라는 국채보상운동의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부엌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대구에서의 구국운동 기사가 게재되고, 다음날인 2월 22일 서울에서도 국채보상기성회가 설립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된다. 2월 23일 대구의 여성들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남일동 패물폐지부인회를 결성하고 국채보상을 위해 은패물을 의연하고 한글의 취지서를 작성해 발표하였다.
나라를 구하는데 어찌 남녀가 따로 있겠느냐며 과감히 박차고 일어난 대구 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은 경향 각지의 여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사회운동에 소극적이던 당시 여성들을 일깨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검소한 생활 모습
서상돈은 국채보상운동을 발기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경북이 어느 지역보다 모범적 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7월 경에 다시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국채보상도총회(慶北國債報償道總會)를 결성하고 총무장에 임명되어 실무를 지휘하였다. 대한매일신보 7월 25일 자에 광고를 내고 이 운동의 확산을 고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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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자들과 탐방객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는 위로는 고종황제를 비롯하여 고급관료와 민족자본가층, 부녀 자와 시장의 영세 상인, 그리고 기생, 백정, 걸인 등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남녀노소에 게까지 확산되었고 일본, 미주 등 해외 한인들에까지 전파되었다. 고종황제 또한 금연을 실천하며 국채보상운동을 지지하였다. 이 운동 결과 의연한 사람은 4월 말까지 4만여 명이고, 5월까지 230만 원이상이 모금되었다.
서상돈 선생 생가 모형
일제는 국채보상운동을 와해하기 위해 민족언론의 탄압을 합법화한 ‘신문지법’과‘보안법’을 만들어 일본을 비판하는 모든 언론활동을 봉쇄하였다. 이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의 핵심단체의 하나였던 대한자강회가 동우회와 함께 강제 해산당했고 신문 기사의 삭제, 언론인 감금과 추방 등이 강행되었다.
대구지역의 국채보상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사 또한 일제의 방해공작을 받았다. 일제는 이 운동을 극력 탄압 금지하였고, 송병준 등 매국단체 일진회의 공격과 국채보상기성회 간사인 양기탁을 보상금 횡령이 누명을 씌워 구속하는 등 총력 방해로 결국 좌절되었다.
국채 보상 운동 취지문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림)
지금 나라의 빚이 1,300만 원이며,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존망에 관계된 일이다. 이를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게 되고 못 갚으면 나라를 잃고 만다. 형세가 여기에 이르렀으나 현재 국고로는 보상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삼천리강토는 장차 우리나라가 아니게 될 것이다. 땅을 한 번 잃으면 돌이킬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월남과 같은 나라의 민족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
일반 국민도 이 국채 보상에 대한 의무에 대해 모른 체하거나,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다. 모두가 보상에 참여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 2,000만의 백성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돈을 각 사람마다 20전씩 낸다면 1,300만 원을 모을 수 있다. 만약 부족하다면 1원, 10원, 100원, 1000원 등 따로 기부를 받으면 될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의무이니만큼 잠시 결심만 하면 된다. 일본의 결사대들이나 반지와 살림을 내놓은 일본 국민들과 비교하면 무엇이 더 어려운 일이겠는가? 아, 우리 2,000만 동포 중 진실로 조금이라도 애국 사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두 마음을 품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족한 우리들이 이렇게 발기하여 경계하는 글을 계속 내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우리 대한의 군자들이 모두 보고 말과 글로 서로 경고하여 모든 사람이 이 내용을 알고 실천하기를 바란다. 이를 통해 위로는 황상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강토를 지킬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서상돈 선생 고택 이용 안내
(글 출처 : 시인 이상화 및 서상돈 선생 팸플릿등 참조함)
글이 길어진 이유는 두 분을 존경하였고, 좀 더 자료를 찾아보고 저의 손으로 기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