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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Jan 14. 2023

이노정/곽재우 장군 묘소/소래곽씨 12정려/덕골 효자각

고향  이야기(2)

이노정 안내판 / 이노정 전경

2) 이노정(二老亭)

   조선의 대학자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이 무오사화(戊午士禍) 전후 시골로 내려와 풍류를 즐기면서 학문을 연구하던 이노정(二老亭)이 있다. 김굉필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 https://brunch.co.kr/@jylee2020/90 ) 과는 남쪽으로 약 7km 직선거리에 있다. 


   ‘이노정’이란 김굉필과 정여창을 두 노인네란 의미의 애칭이다. 지어진 시기는 일두가 함양 안읍 현감으로 부임한 1495년부터 두 분이 무오사화로 화를 입은 1498년 사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노정은 풍광이 아름다워 제일강산(第一江山) 또는 제일강정(第一江亭)이라고도 한다. 초 중학교 때 이노정 주변 강가에 자주 봄가을 소풍을 갔다.


   건물 규모는 앞면 4칸 옆면 2칸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처마 아래에는 가운데에 ‘이노정’과 ‘제일강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두 분은 공통점이 있다. 영남학맥의 종조인 점필제 김종직 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으로 학문을 연마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두 분 다 동국오현에 속한다.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다.


   김굉필 선생은 기본을 중시하였으며 스스로 `소학동자'로 칭했다.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 때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 갔다. 모친의 간절한 상소로 그나마 고향 달성과 가까운 전라도 순천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임청대에서 같은 처지의 매계 조위 선생과 이야기 벗이 되었다. 후학들이 세운 옥천서원이 있고,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 전라도 최초 사액서원이다.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4년) 때 순천 철물 시장 저잣거리에서 죽임을 당했다. 대표적인 제자는 중종 때 미완의 개혁가이며, 기묘사화로 생을 마감한 정암 조광조 선생이다. (저의 글, '순천 옥천서원과 선비 김굉필', 2022.09.17. 글 참조  https://brunch.co.kr/@jylee2020/63)


   정여창 선생은 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에서 유배 중 1504년 병사했다.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했다. 선생은 무오사화 때 청계산과 관련 많은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청계산 이수봉과 피울음을 삼킨 혈읍재 이야기가 있다. (저의 글, '청계산 등산', 2022.10.03. 글 참조)   

  

   장석영 선생은 “두 분 선생이 동방의 성리학을 일으켜 공자의 도가 밝아졌다. 동방의 공자요 동방 제일인이다. 제일인이 머물던 곳이 바로 제일강산”이라고 이노정내의 ‘제일강산정기’ 에 기록했다고 한다.   

  

개양문 / 이노정 중심 건물

 

   솟을 외문을 열고 들어가면 개양문(開陽門)이 있다. 이노정은 우물마루를 둔 정자 건축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평면 형식을 갖추고 있다. 또한 마루 천장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의 통풍구를 두어 산바람, 강바람의 유통을 자연스럽게 이용하고 있다.      

낙동강


   바로 앞에 낙동강이 유유히 흐른다. 낙동강 모래사장을 제일 강변이라고 불렀다. 초 중학교 식목일날 강변에 홍수방지 목적으로 이태리포플러 (버드나무)를 심었다. 성냥개비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는데 엄청 비싸다는 설명이 있었다. 소풍 때 모래사장에서 보물찾기 하고, 발 담그고 물 장난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면사무소에서 남서쪽 3km 낙동강변에 있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 묘소 (봉분이 낮음)

3) 망우당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장군 묘소

    묘소옆 소나무숲에서, 중학교 때 보물찾기, 친구들 노래 장기 자랑하던 그런 친숙한 소풍 장소였다. 옛날에는 큰 길가 솔밭옆에 묘소가 있었다. 기억으로는 묘소 봉분이 낮았다. 당시에 전해진 바로는 일제가 묘소에 계속 해코지를 하여 묘소 높이를 낮추었다는 설이 있었다.  


   후손들이 장군의 증조부로부터 5대의 묘역으로 새로 단장하였다는 기록이 있었다. 묘역 안내간판에는 장군 스스로의 평장(平葬) 유언이 있었다고 한다. “왜란 때 선왕의 두 능이 무너지고 불탔으니 신하 된 자가 어찌 묘의 봉분을 쌓겠는가? 내가 죽거든 구덩이에 묻기만 하라”라고 유언하여 망우당의 묘는 1617년 봉분 없이 평장(平葬)을 하였다.      


   그로부터 114년이 지난 1731년 (영조 7년) 한음 이덕형(李德馨)의 후예 현풍현감 이우인(李友仁)이 묘소를 참배한 후, 실묘(失墓)가 염려된다면서 사림들을 설득, 망우당의 뜻을 받들어 봉분을 낮게 쌓았다. 이와 같은 보고를 받은 경상도 관찰사 조현명은 1732년 소박한 장식의 자그마한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곽재우 장군 묘역 안내도

망우당(忘憂堂),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 장군의 또 다른 이름이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 22일 의령에서 수 십 명의 사람들을 모아 조선 최초 의병을 일으켰다. 이날을 양력으로 환산해 6월 1일이 현재의 ‘의병의 날’이다.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여, 왜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는 데 공을 세웠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에 뽑혔으나, 글의 내용이 왕의 미움을 사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그 뒤 향촌에 거주하고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옷을 입어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의 활동

   1592년 5월 솥바위나루(정암진 鼎巖津)를 건너려는 일본군을 크게 무찔러 의령·삼가·합천 등의 고을을 지켜냈다. 일본군이 호남으로 침략해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또한 거름강(岐江)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가로막았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金時敏)의 1차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지원하기도 했다.


   1593년 성주목사로 임명되어 삼가의 악견산성을 쌓았다. 1595년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만두고 현풍으로 돌아왔다. 1597년 경상좌도방어사로 나가 현풍에 석문산성을 쌓는 도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창녕 화왕산성으로 옮겨 밀양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적을 막았다. 그해 8월 계모 허 씨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울진으로 돌아갔다.     


전후활동

   성주목사, 경상좌도방어사 등의 벼슬을 지냈으나 광주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7∼1596)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더 이상 다른 벼슬은 나아가지 않았다. 1599년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었으나, 상중임을 구실로 나가지 않았다. 자신의 건의가 조정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이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영암으로 귀양 갔다가 1년 만에 풀려났다. 그 뒤에는 현풍 비슬산에 살면서 영산에 망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의병을 일으키기 이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1604년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고 광해군 즉위 뒤에도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호분위부호군, 대호군 겸 오위도총부부총관, 한성부좌윤, 전라도병마절도사 등에 제수되었으나 거의 사양하거나 곧 사퇴했다.  1709년(숙종 35)에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에 추증됐다.

곽재우 장군 묘역 전경 / 주차장


   본관은 현풍이며 부친은 삼사와 의주목사,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정암공 곽월(郭越)이고, 모친은 진주강 씨(晉州姜氏)로 외가인 경상남도 의령(宜寧)에서 출생했다. 부친을 따라 동지사로 중국 갈 때 대동하여 안목을 넓혔다고 한다. 대쪽 같은 선비 남명 조식(1501년~1572년)의 외손녀 사위이자 문인이다. 두 분 다 닮은 대쪽이다. 필체가 웅건, 활달했고 시문에도 능했다. 1618년 현풍에 그를 추모하는 충현사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1677년(숙종 3) 여기에 예연서원의 사액이 내려졌다. 저서에 〈망우당집〉이 있다.  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4km에 있다.       

12 정려각 출입문(삼강문)

4) 소래 곽 씨 12 정려각

   12 정려각은 전국에서도 그 유례가 흔치 않은 역사성을 가진 귀중한 유산이다.  정려각(旌閭閣)은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하여 충신·열녀·효자 등 모범이 되는 사람을 표창하고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에 세웠다.      


   이 건물은 1598년(선조 31)부터 영조 때까지 솔례촌(率禮村)의 곽(郭)씨 일문(一門)에 포상된 12 정려를 한 곳에 모신 정려각으로서 조선 영조 때 한 곳에 모아 세웠으며 12칸의 다포식 팔작집이다.  6.25 전란으로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고 비석이 완파되었으나 1963년에 모두 중수하였다.      

정려각 측면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잘 지키면 이를 나라에서 포상하며 정려 하였다.  곽준의 일문 삼강 2 효자인 효자 곽이상(郭履賞), 곽이후(郭履厚), 열부(烈婦) 거창 신 씨(居昌愼氏), 곽 씨(郭氏) 등은 1598년(선조 31)에 정려를 받았다.

4효자 정려문 / 비슬산 원경

   4 효자인 곽 결(郭潔), 곽 청(郭淸), 곽 동(郭洞), 곽호(郭浩) 정려는 선조 때 받았다. 비슬산 쪽 사효자굴이 있다. 곽재우 장군의 4촌 동생 곽재훈의 네 아들 (결, 청, 동, 호)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동굴에 숨어 있다가 아버지의 기침소리(천망병)에 발각되어, 차례로 나아가 죽음을 당하였다. 왜병들도 감동하여 아버지등에 4 효자의 아버지라고 쓴 종이를 부착하여 죽이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광주 이씨 정려문 / 현풍 곽씨 (일명 소래 곽씨) 12정려 석

   광주 이씨(郭再棋의 부인)는 왜적을 만나자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여 선조 때 정려를 받았다. 열부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중종 때에, 열부 안동권 씨는 인조 때에, 열부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영조 때 정려를 받았다.      


   12 정려각의 건물은 정면 12칸, 측면 2칸의 주심포 집으로 팔작지붕이며 내부에는 2기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현풍 I·C에서 진주 방면 지방도약 2km 우측에 있다.  

   

덕골 효자각 전경

5) 덕골 효자각(孝子閣)

   덕골은 덕이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골짜기 마을 고을을 뜻한다. 예로부터 효자가 많았다고 한다.


   달성군 구지면 응암 1리에 필암 제갈남학 효자비가 있다. 1937년에 세워졌다. 부모를 봉영함에 하루도 빠짐없이 식상을 손수 들고 가서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앉아 지켜보았다.

효자각 후면 / 비각


   그가 어릴 적에 아버지 제갈영이 기이한 질병에 걸려 백약이 무효했다. 그가 아버지의 변을 맛보며 질병을 살피고, 북두칠성에 기도하자 아버지 질병에 차도가 있었다.

효자비긱 안내판 / 비각


   모친이 병환이 났을 때에는 엄동설한에도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회를 장만하여 드리니 병환이 완쾌되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께 효도하다가 모친상을 당함에 시묘살이 3년하였다.  부모를 추모하고 양묘문을 세우고 밤낮으로 호곡하였다. 하루는 범이 와서 위협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범이 물러갔다고 한다. (비문중에서)


   사찰 앞에 모셔져 있는 선산 묘소 참배 후, 양파 마늘 보리가 자라고 있는 연초록 들판을 가로질렀다. 교회 탑과 종과 스테인글라스는 들판과 잘 어울린다. 농작물들은 빛과 소리와 온기를 보고 듣고 느끼며 잘 자랄 것이다.


   면사무소 밑의 중국집에서 예의 시골 짜장면을 먹었다. 이제 추억의 단골집이 되었다.  8번 급행 버스를 탔다. 진천역에서 내려 2만 년 전 선사 시대 전봇대, 표지판 아저씨들을 만났다. 잠시 유적지 한 군데를 둘러봤다. 서부 버스터미널에서 순천행 고속버스에 올랐다.


참고 자료 : 대한민국 구석구석, 위키 백과, 한민족문화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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