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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Oct 08. 2023

선비  양산보의  담양 소쇄원을  찾아서

은둔한 선비 소쇄옹 양산보

소쇄원 안내도

   소쇄원(瀟灑園)에 꼭 가보고 싶었다. 한훤당 김굉필과 정암 조광조 그리고 소쇄옹 양산보(蘇灑翁 梁山甫, 1503~1557)로 연결되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했다.  소쇄(瀟灑)는 맑고 깊을 소(瀟), 깨끗할 쇄(灑) 즉,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이다. 선비의 품성을 지니고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별서원림(別墅園林)이다. 선비가 추구했던 이상향을 두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또한 한국 전통정원 중 최고의 원림으로 알려져 있다.    


   마침 추석 연휴라 10월 2일(월) 아지트 순천에서 첫 버스를 타고 U-square 광주 종합버스터미널에 하차하였다. 방향 감각을 상실하여 시내버스를 몇 번 잘못 갈아탔다. 우여곡절 끝에 188번 버스를 혼자 타고 험준한 무등산 옛길을 넘어 담양 소쇄원에 도착하였다. 무등산을 넘어가니 그 유명한 '무등산 수박' 생산 마을이 나왔다.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에 있다. 2008년 명승 제40호 지정되었다. 면적은 약 4,958.7m²이다.       

소쇄원도

   소쇄원(瀟灑園) 명칭은 양산보의 호(號)인 소쇄옹(蘇灑翁)에서 따왔다. 양산보가 1530~1540년경(조선 중종) 조성하였다고 한다. 스승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기묘사화로 전라도 화순 능주로 유배되었다가 한 달 만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세상사에 환멸을 느끼고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숨어 살기 위하여 별서 정원(別墅庭園)을 꾸몄다.  

    

   15세 되던 해(1517)에 그의 아버지 양사원은 조광조를 찾아가 그의 아들 양산보의 교육을 부탁했다. 조광조는 흔쾌히 승낙하고 양산보에게 소학(小學) 책을 주면서 공부하도록 했다.  양산보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당당히 현량과에 급제했다. 그러나 이미 뽑아 놓은 급제자가 너무 많아 조정 대신들은 오히려 합격자 수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결국, 양산보는 합격자 수를 줄이는 바람에 최종 탈락하게 되었다. 이에 중종은 안타까운 마음에 양산보를 불러 위로하며 종이를 하사했다고 한다. 그해 11월,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소쇄원 입구 들판

   기묘사화 직후 유배지로 가는 조광조를 따라 전라도 화순 능주로 내려와 스승을 보살피며 지냈다. 유배된 지 1달 후 조광조는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충격을 받은 17세의 양산보는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초야에 묻혀 살아갈 결심을 했다. 한양에서 고향인 창평으로 내려와 지곡리에 소쇄원을 짓고 자연을 벗 삼고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처사(處士)의 삶을 살았다.     


   양산보는 기묘사화 후 은둔생활을 하던 중종 ~ 명종 대에 조정으로부터 출사 하라는 여러 번의 천거를 받았으나 단호히 거부했다. 양산보는 임종 시  “어느 언덕이나 골짜기를 막론하고 나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 동산을 남에게 팔거나 양도하지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 것이며 후손 어느 한 사람의 소유가 되지 않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맑고 깨끗한 선비의 정신을 이어 나갈 것과 절의(節義)를 지키고 살라는 양산보의 뜻이 담겨 있었다. 후손들은 15대를 이어 선조의 유언을 철저히 따랐고, 소쇄원(瀟灑園)이 원형대로 보존되었다.      


   양산보가 어렸을 때 들판에서 놀던 오리가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보고 궁금해서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고 한다. 바위가 기묘하고 폭포수가 쏟아지는 경치가 아주 빼어난 골짜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마침 방문한 날 그 후손인 듯한 오리 네 마리가 매표소 앞 개울에서 놀고 있었다.      


   제월당(霽月堂), 광풍각(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등 10여 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 남아 있지 않다. 정원의 구조는 계원(溪園)과 내원(內園)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애양단을 중심으로, 입구에 전원(前園)과 광풍각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 그리고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이다.

 

소쇄양선생유적비

소쇄원(瀟灑園) 입구에 소쇄양선생유적비(瀟灑梁先生遺蹟碑)가 있다.

자죽총

소쇄원 가는 길 양쪽 옆 대나무 숲을 자죽총(紫竹叢)이라고 한다. 어두운 대나무 숲을 지나면 갑자기 밝아지는 원림의 전체 풍경이 나온다. 계곡 건너편을 보면 그늘에 숨은 광풍각과 볕 바른 제월당이 대조를 이룬다. 빛과 그늘의 절묘한 조합이라고 한다.   

제월당 / 제월당 후면

1) 제월당(齊月堂)     

   소쇄원 주인이 학문에 몰두했던 공간으로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이다. 앞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제월당에는 소쇄원의 풍광을 노래한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 영」을 비롯해 임억령의 한시 「소쇄정」, 고경명, 김성원, 정철의 한시, 송순, 양응정 기대승의 만시(輓詩) 편액이 걸려 있다.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 영
송순, 양응전, 기대승의 만시(輓詩)
고경명, 김성원, 정철의 시
임억령의 한시 소쇄정

   호남 유학의 대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는 양산보와 가장 절친한 사이로 양산보의 아들 양자징(梁子澂,1523~1594)이 그의 사위였다. 연못의 물고기가 알아볼 정도로 소쇄원을 자주 찾았으며, 김인후는 1548년 소쇄원(瀟灑園) 완공을 기념하여 지은 시(詩), 소쇄원 48 영(瀟灑園四八詠)을 남겼다.


광풍각

2) 광풍각(光風閣)

   소쇄원을 가로지르는 계곡 옆에 세워진 정자로 소쇄원의 중심건물이며 손님을 맞이하던 사랑채이다.  광풍(光風)은 “비 개인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이다. 앞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타버렸고, 1614년 양천운(양산보의 손자)에 의해 복원되었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제월당(齊月堂)과 광풍각(光風閣) 정자 이름은 소쇄원이 조성된 의미를 잘 알려준다. 광풍제월(光風齊月)은 중국 송나라 시대 유학자 ‘황정견’이 주희(朱熹)의 스승인 ‘주돈이’를 생각하며 쓴 시(詩) “흉회쇄락여광풍 제월(胸懷灑落 如光風霽月)”에서 유래한 것으로 “가슴에 담은 뜻의 맑고 맑음이 마치 비 갠 뒤 부는 청량한 바람과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 같다”에서 따온 이름이다.  

   

   광풍각(光風閣)에는 소쇄원의 1755년(영조 31) 모습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소장되어 있어 그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협문과 제월당(후면)

3) 협문

   제월당에서 협문을 통과하여 계단을 내려오면 광풍각으로 통한다. 아랫채 광풍각에 머무는 손님들을 배려하여, 시선 차단 목적으로 담장을 세웠다고 한다.     

대봉대와 광풍각(좌측)

4) 대봉대(待鳳臺)     

   집주인이 손님을 처음 맞이했던 정자다. 삿갓 모양으로 사방 1칸의 초가지붕으로 귀한 손님을 맞기 위해 대를 쌓고 정자를 지었다. “봉황처럼 소중한 손님을 기다린다”라는 뜻의 대봉대는 소쇄옹이 기다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봉황(鳳凰)은 새 중에서 으뜸으로 뛰어난 명성을 가진 사람을 상징한다. 봉황은 오직 오동나무 위에만 내려앉고 대나무 열매만 먹고 산다고 한다. 대봉대 뒤에 벽오동을 심고, 정원 곳곳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의병장으로 유명한 제봉 고경명, 이황과의 사단칠정 논쟁의 주인공 고봉 기대승 등 당대의 유명 유학자들이 이곳을 찾아와 양산보와 교분을 나누었다. 선비정신과 성리학적 이념을 자연 속에서 구현했다.      


5) 광석

   오곡문과 광풍각 중간지점에 있는 넓고 평평한 암반이다. 많은 사람이 물가에 앉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소쇄원도」에는 넓은 광석 위에서 바둑을 두고 가야금을 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연못과 광풍각(뒤쪽)

6) 연못 상지(上池)와 하지(下池)     

   계곡을 가로질러 홈을 판 고목(刳木)으로 물길을 놓았다.

고목과 낙수

   두 개의 연못인 상지(上池)와 하지(下池)로 물이 흘러갔다. 옛날에는 두 연못 사이에 물레방아가 있었다고 한다. 연못에는 물고기를 길러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물과 물고기에 비유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되돌아온 심정을 담았다.     

애양단

7) 애양단(愛陽壇)     

   애양단은 소쇄원에 흐르는 계곡 위에 조성한 담장이다. 계곡 쪽 자연을 감상하기에 좋은 장소다. 애양단이란 ‘햇빛을 사랑하는 壇’이란 뜻이다. 김인후가 지은 시「소쇄원 48 영(瀟灑園四八詠)」에 나오는 ‘양단동오(陽壇冬午)’라는 시제를 따서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애양단은 겨울의 북풍을 막기 위해 세운 단으로 추운 겨울철에도 볕이 잘 드는 해바라기 하기 좋은 공간으로 “부모에게 효도한다”라는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부모의 사랑과 효(孝)를 담고 있다.     

오곡문

8) 오곡문(五曲門)

   “담장 아래 주변의 암반 위로 흐르는 물이 지(之) 자 모양으로 다섯 번을 돌아 흘러내려간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다. 애양단(愛陽壇)과 담장 밑으로 계곡물이 흐를 수 있도록 꾸며 자연의 풍취를 그대로 살린 오곡문(五曲門)이 있다.     

오곡문

   담장 밑에 돌기둥을 세워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만들었다. 담 밖과 담 안을 이어주는 문이다. 오곡문 북동쪽 담장에 있었던 문이었는데, 현재는 문은 없어지고 담장에 현판만 보존되어 있다.     

오암정

9) 정천

   소쇄원 계곡을 관통하는 계곡물을 정천이라고 한다.  오곡문 밖 정천 옆에 우물인 오암정(鰲巖井)이 있다.


10) 고암정사와 부훤당 터

   협문 좌측에 있었다. 정유재란(1597년) 때 건축물은 불에 타 소실되고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11) 투죽위교(透竹危橋)

   대나무로 만든 외나무다리다. 정천이 흐르는 계곡 위로 통행할 수 있다. 이 다리를 건너려면 몸과 마음이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고 한다.     

관리사 / 마당


12) 관리사

   관리사 옆 마당에는 꽃무릇과 장독대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옆에 화장실이 있다.      

소쇄처사양공지려

13)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계곡을 연결하는 외나무다리 약작(略彴)을 건너가면 매화가 심어졌던 매대 뒤쪽에는 우암 송시열이 쓴 ‘소쇄처사양공지려(瀟灑處士梁公之廬, 양산보의 오두막이라는 뜻)’가 하얀 벽면에 검은 글씨로 박혀있다.

     

소쇄송 (瀟灑松)

14) 소쇄송 (瀟灑松)

   제월당 밖, 산 위 산책길로 올라갔다. 소나무가 울창하다. 대쪽 같은 선비 양산보를 상징하는 소나무를 찾아보았다. 마침내 발견했다. 이름을 붙였다. ‘소쇄송’이다.      


<참고 자료>

-. 담양 소쇄원 팸플릿

-. 투데이 광주전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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