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2023.06.19. 월, 맑음. 폭염)은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년, 정암 靜庵) 선생을 모시는 심곡서원(深谷書院, 경기 용인 수지 소재)과 그분의 묘소를 탐방하기로 하였다. 실천적 선비 정신을 기반으로 조선의 개혁을 위해 맹진하다가 좌절되어, 결국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로 전라도 화순 능성으로 유배 후 한 달 만에 사약을 받았다. 조선의 개혁을 이끈 선비의 이야기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시대를 앞서간 사림파의 영수로 사상가, 교육자, 성리학자, 정치가,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한때 조선 개혁을 꿈꾸었다.
신분당선을 타고 성복역에서 내렸다. 이어 시내버스(720-1번)를 타고 두 번째 정류장에서 하차했다. 넓은 주차장 앞에 홍살문이 보였다.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태극문양 위에 삼지창을 설치했다. 붉은색은 악귀를 물리치고, 삼지창은 나쁜 액운을 공격한다는 의미다.
정암 조광조
1. 정암 조광조
1) 심곡서원
1605년 현 심곡서원 터에 사우(祠宇, 사당) 서원을 건립했다. 1650년(효종 1)에 지방유림들은 조광조(趙光祖)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하여 심곡서원에 위패를 모셨다. 경기 광주 모현면에 있는 정몽주(鄭夢周) 제향의 충렬서원(忠烈書院)에 입향해 있던 선생의 위패를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강당
강당(講堂)이 전면에 위치하고 배향하는 사우(祠宇)가 뒤쪽에 배치된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사(前學後嗣) 형식을 갖추고 있다. 1871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시 조선에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중 하나다. 외삼문(外三門)을 들어서니 중앙에 강당이 보였다. 여러 가지 행사, 유림들의 회의와 학문을 토론 장소다.
일소당
신발을 벗고 내부 마루에 올라서면 머리 위에 일소당(日昭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합각(合閣) 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다. 목판벽(木板壁)으로 각 칸마다 판자문비(板子門扉)를 달아 사면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벽면과 상단부에 강당기(우암 송시열 선생 씀, 선생이 동방에 태어난 것은 마치 염계-성리학의 조종 송나라에 태어난 것과 같다는 내용, 1673년)와 강학 강규(도암 이재 선생 씀, 1747년)등 여러 판서가 걸려 있다.
강당기
도암 이재 선생 강학 강규
강당 우측(동쪽)에는 거인재(다른 서원 경우 선배 방), 좌측(서쪽)에는 유의재(후배)가 있다. 학생들의 기숙사다.
장서각
장서각(藏書閣)이 강당 뒤편 우측(동쪽)에 있다. 맞배지붕에 홑처마로 67종 486 책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1985년에 도난을 당하여 현재는 정암집(靜庵集), 조선사(朝鮮史) 등만 남아 있다.
내산문(안쪽 사우)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사우(祠宇, 사당)에는 정암 조광조와 조광조를 위해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던 학포 양팽손의 위패가 함께 봉안돼 있다. 사당은 정면 3칸의 규모다. 엄숙함이 느껴진다. 향사는 매년 2월 중정(中丁: 두 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4 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4,700평, 임야 약간 등이 있다. 사우 뒤쪽으로 수령이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높이 19m 둘레 4.7m)가 있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있는 벤치에 앉으면 심곡서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연지
경내 연지(연밭이 있는 못) 옆에는 선생이 직접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500여 년의 느티나무(높이는 17m, 둘레가 4m)와 은행나무가 있다.
느티나무
현재 서원 연지(연못)가 있는 자리는 선생이 부친의 시묘살이 하였을 때 나무를 심고 초가를 지어 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일각문 / 치사제
치사제는 서원을 전반적으로 관리하는 곳이라고 여겨진다.
산양재
산양재 내부에서는 정암 휘호 대전 전시회(2023.06.24.~06.28) 준비 위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한지에 멋지게 휘갈겨진 한문 구절이 금방이라도 힘차게 비상할 것처럼 또와리를 틀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암 휘호 대전
개화기에도 교육 기능을 유지했으며 강당인 일소당에 명륜학교를 개교해 교육 활동을 이어갔다. 1952년에는 서원 건물을 교실로 사용해 문정중학교(文正中學校)를 개교하였는데, 문정(文正)은 조광조의 시호다. 1958년 풍덕천에 교사를 신축해 이전하기 전까지 심곡서원에서 수업이 진행되었다.
심곡서원을 전반적 대대적으로 수리 중이라 조금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에 다소 위안이 되었다. 선생의 역사적 족적과 영향력에 비추어 아쉽게도 서원의 규모가 작아 보였다.
워낙 젊은 나이에 돌아가셔서(37세) 후손(사약을 받은 당시 슬하에 5세 2세의 두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들이 큰 타격을 입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의 마음이 불편하였다.
정암 조광조 선생 묘소
2) 조광조 선생 묘소
외대문을 나와 넓은 주차장에서 큰길로 나왔다. 묘소 가는 방향 표지판을 볼 수가 없었다. 지도 앱을 켜고 아래 남쪽 방향으로 걸어 내려오다가 심곡 어린이 공원 입구 근처 광교산 등산로 입구에서 어떤 등산객 분에게 물어보았다. 아래로 조금만 더 가면 묘소가 있다고 알려 주셨다. 마침내 도로(심곡로) 옆에 문정공 조광조 묘 및 신도비라는 표지판을 발견하였다. 묘소는 용인시 수지구 상현1동에 있으며 심곡서원에서 약 550m 거리에 있었다.
정암 조광조 선생 묘소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은 조광조가 유배지인 화순 능주에 머문 동안 수시로 찾아와 위로를 했다. 귀양지가 마침 양팽손의 고향이었다. 양팽손은 일찍이 18세의 어린 나이에 경기도 용인에서 그를 만나 인연을 맺었고 21세 때에는 생원시에 장원급제한 후 같은 해에 급제한 조광조와 더불어 성균관에서 생활했다.
유배지 화순 능주에도 글을 배우려고 뜻있는 선비들이 찾아왔다. 양팽손 등의 지우들의 방문과 유배지에서의 학문 강의를 하던 중 12월 20일 사약을 든 금부도사가 도착했다. 아래 글은 조광조 선생의 절명시(絶命詩)이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 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주리라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이밀자 한성부를 향해 큰절 3배를 올린 뒤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사약을 들이켰다.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유배된 지 1개월 후에 사사당한 선생의 시신은 학포 양팽손이 수습하여 은밀히 시신을 거두어 쌍봉사 골짜기 일명 조대감골에 장사 지냈다. 가매장되었다가 후에 경기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현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상현동) 서원말부락의 선영하에 매장되었다.
조광조가 사약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를 존경하던 유생과 선비는 물론 백성까지 목놓아 울며 나라를 걱정했다. 더욱이 조광조가 죽은 이듬해 봄부터는 큰 가뭄이 들었다. 백성들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기 때문에 가뭄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광조는 김굉필,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과 함께 ‘동방 5현’이라고 불려졌다.
신도비
한양조 씨 정암 광조 선생 묘역, 분묘위치도, 신도비 비석을 거쳐 약 50m 올라갔다. 마침내 ‘문정공 정암선생지묘’ 비석을 발견하였다. 존경하는 어른이라서 가슴 벅찬 마음에 예를 갖추고 절을 두 번 올렸다.
한양 조 씨 선영 묘소
조광조를 포함해 그의 조부와 부친의 묘가 있는 응봉산의 한양 조 씨 선영 묘소의 규모도 다소 작아서 마음 한편으로는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3) 기묘사화 (己卯士禍)
중종반정(1506) 후, 1519년(중종 14)에 중종과 훈구세력이 조광조 (趙光祖)등 핵심인물을 몰아내어 죽이거나 혹은 귀양 보낸 사건이다. 사림파의 세력 확장과 위훈 삭제에 대한 불만이 원인 중 하나였다. 신진 급진적인 개혁정책(과거제, 향약 실시, 덕업 상권, 과실 상규, 예속 상교, 환난상휼, 과장된 권력자의 토지, 노비 몰수)을 처음에는 지지하던 중종이었으나, 사림파의 주장이 점차 과격해지자 중종의 반감을 사면서 지원받지 못하였다. 훈구파는 후궁과 궐내 세력을 이용하고 여론을 조성하여 사림파를 제거하였다.
조광조를 위시한 기묘사림들은 스스로 유교의 가르침을 엄격히 실천하였고 관직에 오른 후에는 임금과 백성을 교화하며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하다가 화를 당하였다. 중종 말년부터 조광조에 대한 재평가와 관작 복구에 대한 요청이 여러 선비들에 의해 지속해서 이루어진다. 마침내 임종을 앞둔 인종이 조광조의 관직을 회복시키라는 명을 내렸고, 선조가 즉위한 후 그해 4월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조 3년에 문정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605년(선조 38년)에 심곡서원이 창건된 것이다.
중종이 성균관을 찾아 친히 주관한 시험에서 중종은 '금일과 같은 어려운 시대를 겪으며 이상적인 정치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였다. 이에 조광조는 '성실하게 도를 밝히고(明道) 항상 삼가는 태도(謹獨)로 나라를 다스리는 마음의 요체로 삼아야 된다'는 답안을 올리니 중종이 그의 답안에 감격하여 그를 선발하였다. 중종에게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세우고 왕도정치와 지치주의 실현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미신타파를 내세워 성리학적 이념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규정, 소격서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소격서는 해와 달과 별을 나타내는 상청, 태청, 옥청에 제사 지내는 일을 하는 기관이었다.
대사헌으로 천거시취제(薦擧試取制)인 현량과(賢良科)를 처음 실시하여 소장학자들을 뽑아 요직에 채용, 추천하여 신진사류들을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시키는 길을 마련했다.
성리학에 의거한 철인 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를 내세우고 기성 귀족들을 소인(小人)이라 지목했으며 양풍미속을 기르기 위해 미신의 타파와 여씨 향약을 도입·실시케 하고 민중의 정신생활과 물질생활에 유익한 여러 가지 서적을 번역·인쇄하여 널리 퍼뜨리는 등 이상주의에 치우친 정치를 실시했다.
1519년 중종반정의 공신 중에 공로가 있는지 여부가 의심스러운 거짓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였다.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 공신 이하 76명을 가짜 공신이라 지적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을 공신 훈적에서 깎아 버렸다. 이 때문에 조광조는 훈록을 깎인 자들로부터 깊은 원망을 받게 되었다.
중종반정 이후 비대해진 훈구파 권신들과 척신들의 전횡에서 벗어나 강력한 왕권을 확립할 수 있는 왕권강화를 원했다. 왕권 확립을 꾀하던 중종이 훈구파에 대적하기 위해 조광조를 키웠으나 사림파가 또 다른 세력으로 부상하는 것을 경계했다. 조광조와 중종은 동상이몽을 꿨다.
그러나 정암은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길 갈망한 것이다. 중종은 사림파 역시 하나의 비대해진 새로운 기득권층으로 해석하여 강력한 왕권의 걸림돌로 인식했다. 중종은 개혁에 피로를 느꼈고, 조광조의 반대세력인 훈구파들은 후궁들과 친인척과 인맥을 통해 중종에게 압력을 행사하였다.
훈구파 3인 홍경주, 남곤, 심정이 사림파 조광조 제거에 적극 나섰다. 홍경주는 이미 조광조의 탄핵으로 파면되어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의 딸 희빈으로 하여금 백성의 마음이 온통 조광조에게 기울었다고 말하게 하고 심정도 경빈 박 씨(敬嬪朴氏)의 궁비(宮碑)를 통해 조광조 등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며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한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게 했다. 또 궁 안의 나뭇잎에 꿀물로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의 글을 써 벌레가 파먹게 함으로써 글자를 새기게 하여 이 일이 궁인의 손을 거쳐 왕에게 전해지게 하는 등 왕의 뜻을 움직이려고 갖은 수단 방법을 썼다. 결국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제거에 나섰다.
4) 개혁 실패의 원인
신진 변혁주체들 대부분이 젊고 정치적 경륜도 짧은 데다,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 드라이브를 구사해 노련한 훈구세력의 반발을 샀다. 그리고 자신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또한 중종은 조광조의 급진개혁에 대해 불안을 느껴 조광조와 연을 끊고 그를 처단한다.
5) 유배
11월 16일 옥에 갇혔다. 옥에 갇힌 조광조는 유배형이 내려지자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신(臣)은 뭇사람 뜻과 어긋나더라도 임금이 계신 것만 믿고 정책을 펴 왔습니다. 친히 심문하신다면 만 번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가 옥중에서 마지막 소명 기회를 애원하고 있을 때 중종은 붕당을 만들어 국론과 조정을 어지럽혔다며 단죄할 것을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그가 유배되어 생활하던 전남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174에는 후일 1667년(현종 8년) 그의 적려유허비가 세워졌다.
6) 최후
권력을 잡게 된 남곤과 심정(후대 선비들이 남곤과 심정의 끝 글자를 따 ‘곤쟁이 젓갈‘-최하품-이라고 비하했다) 그리고 홍경주는 조광조를 살려두려 하지 않아서 중종은 결국 12월 20일 능주(綾州 : 지금의 전남 화순)에 귀양을 간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때 조광조의 동지인 김식, 김정 등도 연루되어 자결, 처형되었다.
7) 사후
1519년 학포 양팽손이 전라 화순 선생의 시신 가 매장지에 죽수서원을 건립했다. 후에 죽수의 사액을 받았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마침내 선조 1년(1568)에 조광조는 복권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 이듬해에는 문정이란 시호를 받았다.
8) 사상
국왕의 솔선수범론을 주장했다. 그는 성리학과 예로써 정치와 사회 기강과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지치주의(至治主義)와 도덕론에 입각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은 소학(小學)과 향약의 보급에 전력을 다했다. 조광조는 자신이 비용을 부담하여 소학과 사서육경을 인쇄하여 보급, 배분하였다. 백성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자치규약인 향약(鄕約)을 실시하게 하였다.
소학은 수신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조하였는데, 특히 그가 보급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소학'은 성리학의 기초 이론을 담은 서적으로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에 의해 적극 수용되었다.
9) 평가
그의 사상은 유학의 정통으로 돌아가 바른 정치를 실천하자는 것이다. 조선의 도학 및 실천유학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다. 율곡 이이(李珥)를 비롯한 후대 학자들이 그를 모범으로 따랐다.
37세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당대는 물론 후세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패하고 침체된 당시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였던 신진 사림들에게는 이념과 실천을 겸비한 개혁의 지도자였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학자요, 정치가로서 이상적 모델이 되었다.
조광조 선생과 함께 대쪽 같은 선비정신과 깊은 인간관계와 의리를 맺은 대표적인 세 인물로 한훤당 김굉필, 학포 양팽손, 소쇄원의 양산보를 들 수 있겠다. 조광조의 스승 김굉필이 그의 재능을 키우고, 양팽손이 목숨을 걸고 그의 시신을 지키고, 조광조의 제자인 양산보는 스승의 애통한 죽음에 모든 것을 등지고 낙향하여 소쇄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도동서원(한훤당 김굉필 배향)
2. 한훤당 김굉필
선비정신이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져 왔다. 특히 김굉필은 인간 규범의 근본을 가르친 소학을 중시하여 소학동자라고 불려졌다.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유배지가 전라 순천으로 변경되었다.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순천 철물시장에서 사약을 받았다. 대구 달성 도동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특히 스승 김굉필과의 꿩 이야기는 조광조의 솔직함과 단호함을 드러낸다. 반대세력 훈구파, 중종과의 힘겨루기에서 타협을 모르는 조광조의 직설적인 면이 결정적 단점이 되기도 했다.
한훤당 김굉필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로 귀양지 평안도 희천에 귀양 와 있던 김굉필과의 일화가 있다. 마침 조광조의 부친이 희천에서 벼슬(어천도찰방, 魚川道察訪)을 하고 있었다. 자연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어느 날 김굉필이 꿩 한 마리를 얻어서 말려두었다.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침 고양이가 꿩을 훔쳐 먹었다. 이를 안 김굉필은 지나칠 정도로 종에게 화를 냈다.
이에 제자 조광조가 “봉양하는 정성이 비록 간절할지라도 군자의 사기(辭氣)는 조심해야 할 줄로 압니다. 제가 마음속에 의혹된 바가 있어서 감히 말씀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김굉필은 18세 어린 제자의 충고를 듣고는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네 말을 들으니 내 잘못을 깨달았다. 부끄럽구나! 네가 내 스승이지,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다.”하고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학포 양팽손
3. 학포(學圃) 양팽손(梁彭孫, 1488년, 성종 19년 ~ 1545년, 인종 1년)
1510년(중종 5)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6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현량과(賢良科)에 발탁되어 정언(正言)·전랑·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519년 10월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김정 등을 위해 소두(疏頭)로서 항소하였다. 이 일로 인해 삭탈파직되어 고향인 전라도 능주(綾州)로 돌아와 중조산(中條山) 아래 쌍봉리(雙鳳里)에 작은 집을 지어 학포당(學圃堂)이라 이름하고 독서로 소일하였다. 능주로 유배되어 온 조광조와 매일 경론을 탐구하며 지냈다.
학포당(출처 : 오마이뉴스)
갑자기 사약이 내려와 조광조가 사사되자, 시신을 그대로 두라는 중종의 불호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을 몰래 염습하여 능성현 쌍봉 중조산 아래 (현재 이양면 증리 서원동 일명 조대감골)에 가매장하였다. 이듬해 그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용인까지 선영으로 운송했다. 심곡서원 사우에 조광조 선생과 함께 배향되어 있다. 의리의 사나이다.
산수도(양팽손 선생)
가매장 자리에 茅屋(모옥)으로 사당을 짓고 문인. 제자들과 함께 享祀(향사) 한 것이 ‘竹樹書院(죽수서원)’의 시초라고 한다. 글씨와 산수화에 뛰어났는데 그의 산수화는 중종 때의 산수화풍을 대표했다고 한다. 일본에도 그의 작품이 남아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산수도(山水圖)가 있다.
소쇄원
4. 양산보 (梁山甫, 1503년~1557년)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능성에 유배되자. 그의 많은 제자들이 남행에 동행했다. 그의 제자인 홍문관 관원 소쇄(瀟灑) 양산보(梁山甫)는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가 사사되자 '개처럼 사느니 흙이 되겠다'며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남 담양군 창평으로 내려와 소쇄원(瀟灑園)을 짓고 은거하며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양산보의 호는 소쇄옹(瀟灑翁)이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정암 조광조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여 1519년 기묘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대관(臺官) 이 뽑은 자가 많다고 하여 삭제하도록 주청 하였으므로, 중종이 애석하게 여기고 불러다가 위로하며 물품을 하사하였다. 그해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가 역모의 수괴로 몰려 전라 화순 능주로 유배되어 사약을 받고 죽자 원통함과 울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세상 모든 것을 잊고 산에 들어가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소쇄원(출처 : 의사신문)
소쇄원(瀟灑園)은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지곡리에 있다.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소쇄원이라 한 것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