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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바다 Aug 15. 2023

4.19  혁명

경희궁과  주변  역사  탐방(1)

   오늘(2023.08.13. 일, 흐림/맑음, 32도)은 조선 5대 궁궐(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중 마지막으로 경희궁을 둘러보기로 했다. 대미를 장식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지도앱을 펼쳐 놓았다. 내친김에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경희궁 주변의 역사적인 여러 곳을 순차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


탐방 코스는 다음과 같다.

4.19 혁명 기념 도서관> 돈의문 역사관> 돈의문 박물관 마을> 경교장> 경희궁> 서울 역사박물관> 단군성전> 사직단> 독립문> 서대문형무소     

돈의문(서대문 옛 이름) / 4.19 혁명 기념 도서관 외관

4.19 혁명 기념 도서관  

   5호선 서대문역 4번 출구로 나와서 동쪽으로 약 100m 지점에 7층(지하 2층, 서울 종로 새문안로) 건물이 있다. 건물 외벽에는 “4.19 혁명은 아직도  독재자 이승만을 용서하지 않았다” 대형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은 휴관일이었다. 휴관일이라는 안내판이 정중앙에 세워져 있고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냥 지나 갈려다가 혹시나 해서 출입구 쪽으로 올라갔다. 마침 관리하시는 분이 계셔서 혹시 팸플릿등 자료를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관리자분은 팸플릿은 없다고 하셨다. 대신에 1층 입구에 사진등 관련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니 들어와 둘러보라고 하시며, 고맙게도 문에 걸린 빗장을 해제해 주셨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1. 도서관 유래

   건물 부지는 과거 이기붕 전 부통령의 자택이 있던 곳이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자택은 시위대에 습격당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1963년 박정희 정부 수립 후 국가로 환수됐다. 4.19 의거희생자 유관 단체들은 이 건물을 기증받아 1964년에 4.19 기념사설 도서관으로 문을 열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4.19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서 기존 건물을 확장 개축하여 2000년에 지하 2층 / 지상 7층 규모로 재개관했다. 2010년 현재 수만 개의 자료를 비롯, 약 7500여 건의 4.19 혁명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2. 4.19 혁명 연표

1) 장기독재 정치

1948. 8. 15.  정부 수립

1952. 7. 4.    발췌개헌

1954. 11. 27 사사오입 개헌

1958. 12. 24. 2.4 보안법 파동

1959. 4.30.   경향신문 강제 폐간   

  

2) 부정선거에 대한 시민의 항거

1960. 2.28 대구 학생 시위

         3. 15 부정선거 / 마산 의거

         4.18  고대 데모     


3) 4.19 혁명

1960  4. 19  시민혁명 발발

         4. 25  교수단 시위     


4) 시민의 승리

1960. 4. 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7. 29  제5대 국회의원 선거

        8. 13  제2공화국 탄생    

 

3. 4.19 혁명 과정

2.28 대구 학생 시위 / 3. 15 부정선거

1) 1960. 2.28 대구 학생 시위

   대구 수성천변에서 개최되는 민주당의 선거강연회 참석을 방해하기 위한 일요일 등교지시에 항의하는 대구지역 학생들은 “학원의 정치도구화 반대”를 주장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동안 관제데모에만 동원되어 온 학생들이 최초의 자주적 시위를 전개한 2.28 대구학생 시위는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2) 3. 15 부정선거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선거. 공정한 선거로는 독재정권의 유지가 어려운 이승만과 자유당이 관권, 금권, 폭력단체 등을 동원하여 갖가지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부정선거 내용은 4할(40%) 사전투표, 3인조 9인조 공개 투표, 완장부대 동원하여 유권자 위협, 야당 투개표 선거 참관인 축출, 기권강요 및 기권자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 발표 등이었다. 이에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선거 무효를 주장하는 전 국민적 시위가 전개되었다.     


3) 3.15 마산의거

   민주당 마산시당이 부정선거에 항의하여 선거무효와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가두시위에 나섰다. 경찰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수천 명의 시위 군중을 향해 실탄사격을 가하여 다수가 사망하고 중상을 입는 등 4월 혁명의 진원이 되는 최초의 참극이 일어났다.     

3.15 마산의거

4) 제2차 마산의거

   4월 11일. 마산중앙부두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하게 죽은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이에 격분한 마산 시민들은 “살인선거 물리쳐라”며 노도와 같은 시위를 전개하였고 경찰은 다시 발포를 하였다. 국무회의는 마산시민의 정당하고 정의로운 분노를 공산당의 사주에 의한 좌익폭동으로 호도하고 주동자 색출 등 대대적인 탄압만을 자행하였다. ‘김주열 군’의 참혹한 죽음은 독재정권의 포악하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며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촉진하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또한 두 번에  걸친 투쟁은 이후 전국적으로 파급되었고 마산은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의 산실로 등장하였다.

4.18 고대 데모

5) 4.18 고대 데모

   마산에서의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유혈 시위와 지방 도시에서의 연이은 데모에 자극받은 고려대생들에 의해, 서울에서의 투쟁의 횃불이 타올랐다. 4천여 고대 학생들은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는 기성독재의 최후적 발악과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자”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마산사건의 책임자 처단”을 외치며 국회의사당까지 진출, 연좌농성을 벌였다. 이후 학교로 돌아가던 중 종로 4가에서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조직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50여 명의 중경상을 당하는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고대생들의 평화적 시위에 대한 깡패들의 무력진압은 4.19 총궐기의 기폭제가 되었다.  

   

4.19 혁명

6) 4.19 혁명

   1960년 4월 19일, 전날 고려대 학생들이 발표한 총궐기 선언문과 같은 선언을 발표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들과 이에 고무되어 자극을 받은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와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이기붕의 자택으로 몰려갔다. 그들은 경무대로 몰려가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였고, ‘김주열 군‘의 죽음에 대한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권력 제3인자로 기세충천하여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당시 경무대 경찰서장, 곽영주 경무관(현 대통령 경호실장급)은 곡사포를 동원하여 학생들을 진압하여 막았으나, 곡사포는 곧 무너졌다. 경무대 정문을 부순 순간에 갑자기 군인들이 덮쳐서, 여기서도 많은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재선거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대에 당황한 제1공화국 정부는 오후 3시 계엄령을 선포했다.  경찰로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기동화된 무장시위대원들은 저녁 무렵 종로와 을지로 일대를 휩쓸었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원들이 종로 3가를 지나다가 동대문 경찰서 앞을 통과할 무렵 경찰은 일제사격을 퍼부었다. 이곳에서 쌍방 간 최초의 사격전이 벌어졌다.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 밤거리를 질주하며 시위하던 수백 명의 시위대는 숭인동 근처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고 잠시 주춤했으나 밤 8시경부터는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태우면서 27자루의 카빈총마저 탈취, 창동 쪽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이에 앞서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 앞에서 경찰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무장시위대의 일부는 20여 대의 차량에 분승,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 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 쪽으로 몰렸다. 안암동 근처 산에서는 20일 새벽까지 무장시위대원과 무장경찰 사이에서 사격전이 끝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계엄사령관이었던 송요찬은 계엄군에 선제발포를 금하고 유연하게 대처하여 사태를 수습했다. (출처 : 위키백과)     

4.25  교수단 시위 / 어린 학생과 여학생 시위

7) 4.25  교수단 시위

   4월 25일 오후 5시 45분경 전국의 대학교수 300여 명은 “학생들의 궐기는 정의감의 발로이며,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대통령이하 3부 요인은 3.15 부정선거와 4.19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동시에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라”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며 데모에 나섰다. 이날의 교수단 데모는 자유당 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 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 망명 (김포공항)

8) 4. 26 이승만 대통령 하야

   이승만은 “1.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정. 부통령 선거를 다시 실시하겠다. 3. 이기붕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다음날 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 11년 8개월간의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민권승리의 날이다.     


4.28 이기붕 일가의 붕괴 / 망명

9) 4.28 이기붕 일가의 붕괴

   새벽 5시 45분경 이승만의 후계자를 꿈꾸던 이기붕은 경무대 서편 별관에서 일가족과 함께 권총자살을 하였다.     


10) 5. 29 하와이 망명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梨花莊)에 머물다 김포공항에서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11) 7.29 제5대 국회의원 선거

   4·19 혁명 이후인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 헌법이 공포되었고, 10일 뒤인 6월 25일 개정·공포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7월 29일 민의원의원과 참의원의원의 선거가 동시에 실시되었다.    

  

12) 8.13  제2공화국 탄생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 체제는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한민국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제1차 과도 권한대행 체제(1960년 4월 27일 ~ 6월 14일)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양원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국무총리는 장면, 대통령은 윤보선이었다.   

  

13) 1961. 5.16

   부정 선거 책임자와 그 과정에서 부정 축재를 한 사람들을 처벌하는데 실패하였으며 민주당 내의 구파와 신파 분열이 일어났고, 구정치인의 활동 금지와 부패한 공직자 처벌을 명분으로 곧 군사 정변이 일어나게 되었다.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때로는 애국자와 압제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  불의가 제도가 될 때 저항은 국민의 의무가 된다. 4.19 혁명이 그렇다.     


4월 (박화목) / 혁명정신 계승



4월  

     박화목(朴和穆)      


거칠은 계절풍이 부는 가운데도

굳은 땅을 뚫고 짓누른 돌을 밀어 제치며

어린 푸른 싹이 솟구치는 달이다.     


사월은

정녕 생명의 외침을

아무도 막아내지 못하는 달이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고......     


그 누가 착하고 어진 우리를 억누르고

한 몸의 영화를 그 속절 없는 부귀를

누리려고 했던가?

썩은 권력은 언제든 허물어지고 마는 것을.....     


한 겨우내 죽은 듯

침묵 속에서 살아온 뭇 생명들

이제 활활히 분화처럼 활활히 솟구치나니     

아 진정 4월은

부활의 달.          


<출처> : 4.19 혁명 기념 도서관

            경향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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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이 길어져 돈의문 역사관, 돈의문 박물관 마을, 경교장은 다음 편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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