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에 참전하신 삼촌이 고엽제의 후유증으로 수십 년을 고통 속에 살다 며칠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월남전 참전 후, 비무장 지대 DMZ로원래의 부대로복귀하였을 때의 일이라며 군대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어린 조카들에게 인기 만점 "군대 아재(아저씨)!"였다. 걸쭉한 입담에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겁 많은, 손가락 끝이 오그라 든, 독수리 삼 형제우리들은 그날 밤에 삼촌 손을 꼭 쥐고서야 잠들 수 있었다.
고엽제(枯葉劑, 영어: defoliant)는 나무를 고사시키기 위해 살포한 제초제를 말하며 미군이 베트남전 당시 사용한 에이전트 오렌지가 유명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살포된 고엽제에는 다이옥신이라는 화학적 불순물이 있는데, 이것은 치사량이 0.15g이며, 청산가리의 1만 배, 비소의 3000배에 이르는 독성을 가지고 있다. 이 독소는 분해되지 않고, 체내에 축적되어 10년~25년이 지난 후에도 각종 암과 신경계 손상을 일으키며, 기형을 유발하고, 독성이 유전되어 2세에게도 피해를 끼친다.
삼촌은 남북이 하나 된 통일된 하나의 한반도를 평화로운 한반도를 꿈꿨다. "너희들은 반드시 다시는전쟁이 없는 나라, 평화 통일된 나라에서 잘 살게 될 것이다" 라며 독수리들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전쟁이라면 신물이 난다는 삼촌. 월남 다낭 지구에서 전투 후에 조카들에게 띄운 땀에 절은 군사 우편에 전쟁의 화약 냄새가 나지 않았던가?
산악 근무지 계곡 곳곳에 흩어져 있던 젊은 군인들의 흔적, 누군가의 아들이었으며, 누군가의 연인이었던 젊은 영혼들이 생각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따뜻한 고향으로 살아서 돌아가지 못한 한반도의 젊은 영혼들에 대한 비통 비애 비극을 담은, 삼촌의 애창곡 "비목"이 자꾸 귀에 맴돈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러운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삼촌은 우리들의 영웅이었다. 삼촌의 이야기를 타임 머쉰을 타고 여행해 보자.
최전방 DMZ 1,500미터 고지다. 간간히 북쪽에서 확성기로 여자 아나운서가 남조선 괴뢰도당이 어쩌고 저쩌고 한참을 떠들다가, 간간이 노래도 들려준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잘 들렸다가 안 들렸다 한다. 익숙한 평소의 분위기다.
초가을날씨가 제법 쌀쌀하지만, 오늘 아침은 기분 좋은 날이다.3년의 국방의무를 마치고, 이곳초소를 도보로 출발하여, 20킬로미터 후방의 사단본부에서 신고식을 하면, 고향으로 간다. 즉,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입대 동기중 3명이 안타깝게도 함께 제대를 못하였다. 국립묘지, 고향의 선영으로 각각 먼저 떠나갔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러하다. “정”은 월남에서 수색대 소속으로 수색 활동을 하던 중 후배병이 발목지뢰를 밟아 발목이 절단되자, 고통에 신음하는 그를 떨쳐 업고 나오다가 대인 지뢰를 밟아, 장렬히 산화하였다.
“곽”은 월남 근무 후 원대 복귀하여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밤에 철책선을 순찰하다가 허리에 찬 수류탄의 안전핀이 철조망 가시에 걸린 줄 모르고 몸을 돌리자, 수류탄이 폭발하여 몸이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산화하였다. 다음날 까마귀들이 핏덩이가 걸린 철조망에 둘러앉아 살점을 쪼아 먹고 있었다. 소대원들은 까마귀를 쫓고 살점 한점 한 점을 깡통에 모으고 있었다.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혔다.
“환”은 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변심하였다. 군에서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한다, 스스로 고향을 바라보며 엠 16 소총을 목에 겨누고 쐈다. 밤새도록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흘러나온 뇌를 머리와 함께 보자기에 담아 쌌다.모처에서 조사가 나오는 새벽까지 동기 한 명이랑,시신을 지켰다. 한여름 밤이라, 산짐승이 많았다. 특히 그곳이 화장실 옆이라,후배병들이 화장실, 야근 근무지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중대 분부에서 휴가 가는 김상병, 최일병과 동행하여 대대본부까지 도보로 가기로 되어 있다. 워낙 높은 산비탈이라 차가 못 올라오는 그런 곳이었다. 녀석들은 "강 병장님 기분 좋으시겠습니다. 뭐 말년 병장하고 말 터도 되죠? 야자 게임이나합시다”이러면서 은근슬쩍 농담을 던진다. “그래 난 이제 민간인이니, 니들 마음대로 해라”하니 녀석들이 “허허 형님 나중에 피엑스 가서 막걸리나 한잔 합시다”하면서 진드기처럼 달려 붙는다.
중대에서 아침식사 후 중대장에게 신고식을 하고, 우리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오전 9시에 중대 본부를 출발하였다. 물론 나의 어깨에는 대대에 반납해야 할 물품들이 든 따블 백이 얹혀 있었다. 몇 번의 동료 간의 끔찍한 총기 사고가 난 이후로, 상급부대 지침이 변경되어, 근무시간 이외는 비무장 맨손이었다. 손에는 무기라고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전방의 초가을 날씨는 벌써 살얼음이 얼고, 입가에 하얀 입김이 나왔다. 계곡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오면 5킬로 전방에 대대 본부가 나온다. 중간에 우리는 햇볕 잘 드는 양달 진 비탈길 옆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하였다. 다들 오줌을 나란히 서서 사이좋게,시원하게 휘 갈기고, 담배를 한 대씩 꼬나문 다음, 맛있게 피고 있었다.
그때, 김상병이 약간 눈높이의 언덕을 가리키더니, "강 병장님 저기 50미터 쯤위에 뭔가 움직이는데요. 멧돼지인가?”하고 보니 정말 자세히 보니 뭔가 검은 옷을 입은 것이 낙엽 등으로 위장한 체로. 그런데, 총구가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순간, 최일병이 “적이다!”하면서 내리막 길로 냅다 뛰기 시작 하자, 나와 최일병도 순간적으로 같은 방향으로 뛰었다. 앞의 김상병이 “딲”하는 총소리에 한방에 꼬꾸라 졌다. 소음기 장착 소련제 아카보 에이케이 소총이었다. 다음은 최일병이 길옆에 나둥구르며 꼬꾸라 졌다.
나는 순간적 판단으로 따블 백을 안고 30미터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얼마나 지났을까? 좌측 허벅지와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팔다리를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떨어지면서 바위에 튕긴 뒤 나무 가지에 걸려 충격을 완화하여, 즉사는 면했는가 보다. 벌써 날이 어둑어둑하여지고 있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하여, 기고 또 기었다. 사력을 다하여 인근에 있던 초소 초병에게 “적 출현이다!”하고 신고 후에 정신을 잃어버렸다.
놈들은 “박”이 조장, “장”이 부조장, 그리고 “노”가 3명이 1조다. 임무는 남쪽의 경계 태세를 점검하고, 새로 개발한 독침과 소음 무기, 무전기 성능 시험, 남의 작전 수행능력 테스트 등이다.“박”은 부모가 지주 집안으로서 반동으로 몰려, 수용소에서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와 동생 3명과 같이 살다가, 조건부로 특공부대에 입대하였다. 남파 후 과업을 수행 후,복귀하면, 전가족이 당원증을 받는 조건이었다. “장”은 고위간부의 평양 여대생 애인을 살해한 흉악범으로 사형 집행을 대기하고 있었다.
“노”는 식량 담당자를 개 패듯 패다가 수용로 끌려와 하루 한 끼의 평생 노역형에 처하여,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고 하루하루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가, 어느 날 일생일대의 마지막 기회란 유혹에 낚였다. 혹독한 생존 훈련, 백발백중의 훈련을 받았다.어느 날 그믐날 밤에 철책을 끊고 넘게 되었다. 다들 이렇게 죽어나, 저렇게 죽어나 마찬가지 인생이었다.
그들이 넘어오기 전 6.25 전쟁 와중에 서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격전 중에,휴전회담이 진행되었다. 남북은 서로 한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었다. 특히 쌍방의 정치가들, 군대 우두머리 지휘관들은 남북을 막론하고, 전공을 세워야 자기들의 출세 입지가 탄탄해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부하 장병들의 희생 위에,자기들의 입신이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부하의 피와 희생 위에 자기들의 출세가 달렸기 때문에, 말단 병사의 목숨은 파리 아니, 모기 목숨보다 더 처참했다.
더디어, 휴전이 성립되었다. 휴전선이라고 해 보았자, 대충 이산 저산은 남쪽, 건너편 저산은 북쪽식으로 경계가 모호한 당시의 상황에서 조금 나아가, 서로 사생결단으로 땅에 말뚝을 박아서 영역을 표시하던 때였다. 그리고 심리전이 전개되었다. 가까운 곳은 남북 간에 200미터도 안되었다.
북쪽에서 육성으로 두 손을 입에 대고 모아 “동무들 아침 먹었어?”이러면, 남쪽에서 “그래 우리는 쇠고깃국에 쌀밥 먹었어!”이러면,북쪽에서“웃기지 말라우, 우래 다안 다우,황소 도강탕먹었지비?”이러던 시절이었다. 황소 도강탕이란, 소고깃국은 무슨, 그냥 황소가 강을 건넌 것처럼 소고기는 몇 점 없고, 흉내만 낸 소고깃국이란 뜻이었다. 피차가 어려운, 피장파장인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북쪽에 서 스피커 확성기 시험하는 소리가 나더니, 어떤 묘령의 아가씨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였다. 낮에는 목소리가 어찌나 이쁜지, 남쪽 병사들이 그 목소리에 홀렸고, 노래도 사의 찬미 가수 윤심덕을 뺨치는사나이 혼을쏙 빼놓는일품이었다. 이제 장군가, 백두산 정기가 등은 아군들이 따라서 즐겨 부르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밤이면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귀신이 부르는 소리 같아 부들부들 떨려서, 경계근무를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상부에서 특수 공작조에 명령을 내렸다. “저 여자의 목을 따오라!”
그 명령에 따라 칠흑같이 어두운 어느 날 밤에 철책선을 넘어 북으로 침투하였다. 3명이 한 조였다.지뢰지대를 요리조리 피하여, 이윽고 도착한 곳은 북의 군 막사 근처의 화장실이었다. 화장실 주변에 매복하여, 남자면 그냥 보내고, 그 여자를 몇 시간이고 기다리다가, 새벽에 드디어 그 미모의 여자 아나운서가 화장실에 들어 간 순간 덮쳐, 감쪽 같이 입을 막은 후, 처치하였다. 며칠 후 당연 무공 훈장이 내려왔다. 그리고 특별 휴가와 황소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금일봉이 줘어 졌다.물론, 그다음 날부터는 그 여자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 후에 이상한 현상이 모두에게 감지되었다.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이면,하얀 백마를 탄, 그 여자 아나운서가 목에 하얀 스카프 매고,머리카락을 휘 날리며, 소리 죽인 울음소리, 때로는 곡소리를 내며,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었다. 모두에게 밤이 두렵고, 무서웠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반드시, 보복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는데, 보복이 없자,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특식이 배달되었다. 모두 막걸리와 소고기 등을 배불리 먹은 후, 모두들 거나하게 취하여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막사 밖에선 보초도 졸고 있었다. 그 틈을 놓치겠는가? 그들은 보초를 처치 후에,분노의 화염방사기를 그 빵 카에 들이대고, 불을 뿜었다. 반지하식 콘크리트 막사를 '불빵 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물론 사용하지 않고 건물 내부가 시커멓게된 채로,비워두고 있었다.
피는 피를, 복수는 복수를 부르는 법. 북도 동일한 방법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함무라비 법전적 응징 보복을 했다. 결국 유엔 정전 군사위원회가 적극 개입 중개하여 양측은 군사적 충돌을 일시 중지하게 되었다.
그 후, 어둠이 깔리고 비나 눈이 흩날리는 날 밤, 남북 휴전선 능선에는 백마를 탄 여인들이 돌아다녔다.
삼촌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우리들은 삼촌 무릎에 바짝 다가앉았다.
“박”, “장”, “노”는 나를 포함한 남쪽 3명이 즉사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 지역을 벗어났다. 모래주머니를 바지 하단에 달고서, 특수 훈련을 하여, 하룻밤에 100킬로를 걷는 것은 아주 기본. 산비탈도 평지처럼 소리 없이 빠른 속도로 이동하였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다. 신출귀몰한 '도깨비3인조'라고 불렸다. 그들은 남에서 탐지 불가능한 주파수의 최첨단 무전기로, 북의 기지에 남쪽 현재의 상황을 수시로 보고했다.
남측도 만만치 않았다. 집요한 추적 끝에 위치를 파악한 것이었다. 머리 위로 수없이 헬기가 낮게 떠 다녔으며,확성기로 자수를 유도하는 소리와 삐라가 뿌려졌다.비트로 철저히 위장하여 낮에는 움직이지 않으면, 결코 발각되지 않았다. 비상식량도 현재로서는 충분하다. 그리고 탄환도. 그러나 , 한 발이라도 아껴야 한다. 이것이 생존 법칙이다.
피치 못한 경우는 남측 군복을 입고 대낮에도 이동한다. “박”은 대위복, “장”은 중사복, “노”는 일병 복장을 하였다. 팀장인 “박”은 한술 더 떠서, 근무 장병에게,“근무 똑바로 서”라고 큰소리치면, 근무자는 거수경례까지 붙였다. 드디어 식량이 바닥났다. 식당 근처에는 충분할 정도로 짬밥, 잔반이 굴러 다녔다. 산 독사도 껍질째로 씹어 먹는데, 흙이 묻거나, 약간 상한 것은 진수성찬이었다.
총기를 사용하는 것은 목숨과 바꾸는 위험한 것, 먼저 발견한 상대를 독을 묻힌 단검으로 급소를 단 한방에 찔러 넣어 숨을 끊어놓았다. 독침을 사용하여, 소리가 나지 않게, 숨통을 끊어 놓았다. 밤에는 낮에 파악된 정보로, 상대의 배치위치를 꿰뚫고,서로 오인 사격하게 만들어 혼란을 가중시킨다. 발각될 때는 정조준이 안되게, 지그 재그로 달리다, 방향을 휙 튼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사자에게 쫓기는 사슴을 생각해 보라. 숨는 비트는 주변 지형과 조화되게 기가 막히게 위장하여, 바로 옆, 밟고 지나가도 눈치를 못 챈다.물론 그 안에서 대소변은 참되, 필요할 경우는 오줌은 마시며, 경우에 따라 옷에 그대로 싸고, 대변은 비닐봉지에 넣어서 묻는다. 왜냐하면, 군견들이 후각으로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 지령실에서 남쪽 상황과 지침이 내려왔다.“3개 사단이 동원되어 압축 수색이 시작되었으며, 더 이상 남으로의 이동은 불가하다.조속 월북하라”일단 시선을 돌리기 위하여, 계속 남진하는 것처럼, 방향을 남으로 했다. 필사적인 저지다. 집중 사격을 한다. 그러면, 각자 돌파를 한 후,도발 지점보다 훨씬 북쪽의 제3의 장소에서 다시 집합한다. 2주가 지난 어느 날,지뢰지대를 교묘히 이용하여, 북으로 북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철책선이 보였다.
새벽녘에 동녘에 해가 뜨기 직전에,모두들 피로에 지치고, 추위에 지쳐서인지, 마지막 철책선의 양쪽 근무자 2명씩 4명 중2명이 식사 준비하려 잠시 자리를 떴다. “박”의 신호와 동시에 “장”은 좌측 근무자, “노”는 우측 근무자를 저격과 동시에 박은 파괴 통을 철책에 던졌다. 그 파괴 통은 철책에 닿으면, 구멍이 뚫려. “박”이 그 속으로 다이빙하면, “장”과 “노”가 거의 동시에 뛰어들어,탈출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파괴 통이 폭발되지 않았다. 2주간의 활동 중에,폭죽의 원리를 응용한 그 파괴통 속의 뇌관에 빗물이 스며들어, 불발탄이 된 것이었다. 주위의 모든 화력이 “박”, “장”,“노”에게 집중되었다. 박격포 터지는 소리, 파편, 기관총 소리,수류탄 폭발 소리,크레모아에서 뿜어져 나오는 쇠 구슬들이 날아들었다.월북은 불가능했다. 필사적으로 철책의 반대편의 계곡의 산으로 내 달렸다. 이미 완전 포위가 되어 더 이상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정해진 지침과 규칙, 반복 훈련한 대로 최후를 맞이하였다.
우선 배낭을 벗고, 군사지도 등,주머니 속의 모든 소지품을 한 곳에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무전기도 멀찍이 벗어두고, 수류탄 한 발로 폐기 처분했다.증거 인멸을 위함이다. 일렬로 나란히 섰다. 제일 앞에 “노”다음에 장”그리고 “박”이 섰다. 모두 권총을 뻬어든 다음, “장”이 “노”의 두통수에 권총을 발사하였다.“노”가 꺼꾸러 지자, “박”이 “장”의 관자놀이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박”은 권총을 목에서 뇌가 있는 방향으로 해서 방아쇠를 당겼다.
그 옆에는 6.25 전쟁 중에 누군가의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 비스듬히 비목이 하나 세워져 있고, 구멍 뚫린 녹슨 철모가 하나 뒹굴고 있었다.
삼촌이 의식을 회복한 것은 작전이 종료된 후 3일 후였다.그리고 기적같이, 어느 날 군 통합병원 정신병동에서 기억력을 회복한 것은 그날로부터 3년 후였다.월남전에서 고엽제 후유증에,작전에서 허벅지 관통상으로 고통을 겪다가, 우리 독수리 삼 형제의 영원한 우상 삼촌은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삼촌!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잘 살아! 주변국 외세에 이용당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우리 한민족 남북한이 평화 통일이 되어 한 식구처럼 오손 도손 잘 살게 도와줘! 다시는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하나의 식구, 우리 독수리 삼 형제처럼, 남북이 평화롭게 잘 살도록 도와줘! 잘 가!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