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은 넙다리뼈와 정강이뼈를 잇는 다리 관절이다. 다리를 구부리면 돌출되는 부위이다. 온몸의 체중을 대부분 지탱하는 중요한 부위이며 주변을 둘러싼 인대나 근육들에 의해 관절의 안정성을 유지한다.
무릎은 뼈, 인대, 근육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릎은 무릎뼈, 허벅지뼈, 종아리뼈로 이루어져 있고, 무릎 관절 주위에는 관절낭이 싸고 있고 내측 측부인대, 외측 측부인대, 전방 십자인대, 후방 십자인대로 고정된다. 이로 인해 관절의 안정성과 힘이 유지된다. 무릎에 허벅지뼈와 종아리뼈 사이에는 반달 모양의 반월상 연골이 있는데 이는 관절운동을 원활하게 해 준다.관절 내의 활액은 관절에 영양을 공급하고 움직이는데 마찰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우리 몸의 체중을 지지하고 굴곡, 신전, 회전운동이 가능하게 한다.
무릎은 발바닥 이외에 접지를 많이 하는 부위이다. 이를테면, 발뒤꿈치를 들어 발끝과 무릎을 붙여서 앉는다. 이렇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장면은 절대자에게 진심을 다하여 기원하며, 섬기는 진정성과 평화를 나타낸다. 많은 민족의 역사에서 나타나고, 실생활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무릎을 꿇다"는 항복을 나타내며, 큰 마음의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직접 무릎 꿇고 사과를 표현한다. 장애아동을 위한 학교 부지 선정에 주민들이 반대하자, 학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눈물로 호소하자, 주민들이 그 마음에 감동을 받아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는 기사도 본다. 또한 "무릎을 치다"는 깨달음을 나타낸다.
나에게는 어떤 무릎을 가진 분들이 있었는가?
1. 아버지의 무릎
"아부지 몸이 디기 안좋아 졌데이.한번 가봐라"
열 살위의 누나가 막내인 내게 전화를 했다. 여든다섯의 아버지는 산속의 요양원에 있었다.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이제는 서울,부산,대구,싱가포르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지가 삼십 년도 훌쩍 넘었다.
어릴 적 고추밭에서 풀 뽑는 밭일을 하시는 아버지의 중참을 가지고 갔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이리저리 찾으러 밭을 둘러보는데, 한 모퉁이에서 무릎을 꿇고 뭔가를 하고 계셨다. 가까이 가보니 고추 한 포기 한 포기에다 조심조심 무릎을 꿇고 정성스럽게 거름을 주고 계셨다.
아내와 서둘러서 요양원에를 찾아갔는데,하얀 백발에 구부정하게 무릎을 안고서 창밖을 내려다보고 계셨다. 무릎의 연골이 다 닿아서 더 이상 무릎이 지지대의 역할을 못하는 것이었다.
휠체어에 태워서 밖으로 모셔 나오니 그렇게 표정이 밝으실 수가 없었다."오늘 날씨가 좋구나"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저녁이 되어 이별을 하는데,무릎 연골이 다 땋아, 엉덩이와 두발 두 손으로 문까지 기다시피 나오셨다. "잘 가라"나지막이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주섬 주섬 소매에서 여러 병문안 온 친지들로부터 받은 꼬깃꼬깃한 돈을 쥐어 주셨다. 그때는 회사를 그만두고 놀고 있을 때라 못 이기는 척 받았다.
올라오는 고속도로상에서 터널을 통과하자마자 차가 갑자기 속도를 뚝떨어 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를 않았다. 갓길에서 차를 세워서 레커차를 불렀다. 수리 후 정비소 주인과 실랑이를 하다가 아버지한테 받은 그 귀한 돈을 모두 다 주고 올라왔다. 아버지의 무릎에서 나온 돈을.
2. 어머니의 무릎
이웃 세집의 마당이 공동 놀이터처럼 연달아 붙어 있었다. 여름밤 마당에는 덮석이 깔렸다. 엄마의 무릎을 벤 어린아이들은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다가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우는 어머니들의 자장가 같은 소리에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잠든 아이를 안고 대문을 들어선 후, 대청마루 모기장 안으로 아이를 눕혔다. 무수한 별들,은하수, 북두칠성 그리고 포근한 무릎베개가 그립다.
3. 일본 청소부 아주머니의 무릎
일본 사무실 근무할 때, 50~60대 아주머니들이 언제나 남자 화장실 청소 담당이었다. 남자 직원들이 화장실에서 일을 보든, 마주치든 그녀들은 당당하게 자기 할 일만 했다. 처음에는 화장실내에서 아주머니들이 일하고 있으면 화장실내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지만, 차츰 적응을 하여, 나중에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아주머니들이 너무나 당연히 자연스럽게 남자 화장실내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화장실내에서 심지어 웃으며 인사를 하였다. 그녀들은 항상 화장실 청결을 위해 진심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 남자들이 서서 오줌 누는 변기 앞에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이물질과 묻은 침 가래를 정성을 다해 닦아내는 모습은 놀라움까지 불러 일으컸다. 흘린 오줌을 걸레질을 하고 있는 풍경은 경외심을 품게 하였다. 청소하는 직업인으로서의 자부심과 나중에는 그 꿇어앉아 닦고 있는 무릎에 존경심까지 가지게 되었다.
4. 예수의 무릎 (요한의 복음서 19장, 28절-37절)
군사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다
그날은 준비일이었고 이튿날 안식일은 큰 축일이었으므로, 유다인들은 안식일에 시신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힌 이들의 다리를 부러뜨리고 시신을 치우게 하라고 빌라도에게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군사들이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님께 가서는 이미 숨지신 것을 보고 다리를 부러뜨리는 대신, 군사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는 직접 본 사람이 증언하는 것이므로 그의 증언은 참되다. 그리고 그는 여러분이 믿도록 자기가 진실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뼈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하신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런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또 다른 성경 구절은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 하고 말한다.
5. 안중근
(무릎 꺾어 매장)
도마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님이 사형수 안중근 의사에게 보낸 편지다.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어라!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이의 옷을 지여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았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돼 이 세상의 나오거라!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만주 하얼빈역에서 사살했다. 일본은 안중근을 테러리스트로 몰아갔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대한국 중장으로서 일본에 맞선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처단한 것이니 자신을 전쟁 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일본이 겉으로는 동양 평화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침략자이며, 이토를 죽인 것은 진정한 동양 평화를 위해서였음을 논리 정연하게 주장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3월 26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뤼순 감옥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편,친일파들은 이토가 죽자 일본에 사죄단을 파견하고, 한성에서 이토를 추도하는 모임을 열었다.
그는 이토를 저격한 것은 개인의 감정이나 충동적 울분 때문이 아니라 대의를 위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했다.
"내 목적에 대해서는 대강 말했지만 지금 말한 것처럼 이토를 죽인 것은 한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한 일이었다."(두 번째 공판에서) 또 재판이 편파적이고 부당하게 이뤄지고 있음을 거침없이 질타했다.
당시 안중근 의사의 가족은 한국인 변호사를 선임했고 다수의 외국인 변호사가 자발적으로 변호를 요청했지만, 재판정은 이를 모두 묵살하고 일본인 국선 변호사에게 변호를 맡겼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최후변론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 아니라 의병으로서 행한 일이기에 전쟁포로로서 이 재판장에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국제공법, 만국공법에 따라 처리되기를 희망한다"라고 주장했다.
판사가 선고했다.
'피고 안중근을 사형에 처한다'
안중근 의사는 한 사건에 대해 세 번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삼심제도'에 따라 항소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의 재판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목숨을 살려 달라고 구걸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죽음을 불사한 안중근 의사에게 그의 어머니는 편지로 이렇게 이어졌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앞서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
안의사는 해방 후에 고국에 반장하여 달라고 유언하였다. 일제는 교수형 후에 목에 건 밧줄을 푼 후 무릎을 꺾어서 나무통 안에 욱여넣었다. 그리고,두동생의 유해 인도를 거부했다. 이미 상부의 지시를 받아 절대 유족에게 넘겨주지 말라는 전문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두동생이 더욱 강력히 주장하자,이들을 강제로 차에 태워 귀국시켰다. 그의 무덤은 하얼빈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이야기에 수소문하였지만,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6. 윤봉길 의사의 꺾인 무릎
尹의사는 끝내 굽히지 않았다.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된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1908∼1932) 의사의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은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다. 윤 의사의 무릎을 꿇린 채 처형함으로써 일제가 윤 의사의 기개를 꺾으려 했던 점, 총탄이 너무나도 정확히 윤 의사의 이마를 관통해 오히려 피가 별로 흐르지 않은 점 등이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처연하게 만든다.
일본 방위청 자료실에서 ‘만밀대일기(滿密大日記)’에 실린 이 사진을 발견한 사본을 전해 받은 유족 첫 반응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윤 의사 처형 장면을 담은 사진이 처음 발견된 데다 그 모습이 너무나 끔찍하고 생생하기 때문이었다. 사진에서 잔잔한 미소를 띤 윤의사의 표정은 '내 할 일을 하고 가니 기쁘다.'는 뜻으로 보였다.
개인적으로 인간세상에서 일체의 사람이 하는 일은 다 자신을 위함이나 일부 사람들은 이렇듯 가장 근본적인 집착이랄 수도 있는 생명마저도 안위에 두지 않는 희생정신과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7. 인조의 무릎
(병자호란)
1627년 후금(後金)의 조선에 대한 제1차 침입(정묘호란) 때, 조선과 후금은 형제 지국의 맹약을 하고 양국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632년 후금은 만주 전역을 석권하고 명나라 북경을 공격하면서, 양국 관계를 형제 지국에서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칠 것과 황금·백금 1만 냥, 전마(戰馬) 3,000 필 등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을 요구하였다. 또한 1636년 2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을 보내어 조선의 신사(臣事)를 강요하였으나, 인조는 후금 사신의 접견마저 거절하고 8도에 선전 유문(宣戰諭文)을 내려, 후금과 결전(決戰)할 의사를 굳혔다.
1636년 4월 후금의 태종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쳤으며, 조선이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왕자·대신·척화론자(斥和論者)를 인질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주화론자(主和論者)보다는 척화론자가 강하여 청나라의 요구를 계속 묵살하였다.
1636년 12월 2일 이런 조선의 도전적 태도에 분개한 청나라 태종은, 청·몽골·한인(漢人)으로 편성한 10만 대군을 스스로 거느리고 수도 선양(瀋陽)을 떠나, 9일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은 백마 산성(白馬山城:義州)을 굳게 지켜 청군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나, 선봉장 마부대는 이 길을 피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13일에서야 조정에서는 청나라 군의 침입 사실을 알았고, 14일 적은 개성(開城)을 통과하였다.
조정에서는 급히 강화·서울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 원임 대신(原任大臣)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으로 하여금 종묘사직의 신주(神主)와, 세자비·원손(元孫)·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을 비롯한 종실(宗室) 등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였다.
1636년 14일 밤 인조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청나라 군에 의해 길이 막혀,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피하였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 등에게 성을 굳게 지킬 것을 명하고, 8도에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도록 격문(檄文)을 발하였으며, 명나라에 급사(急使)를 보내어 지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태종이 도착하여 남한산성 아래 탄천(炭川)에 20만 청나라 군을 집결시켜, 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남한산성 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 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으며, 어미는 진중(陣中)에 잡아놓고 그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 거의 모두 굶어 죽고 얼어 죽었다.
특히 병자년은 혹독한 추위가 오래 계속되어, 노숙(露宿)한 장수·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 죽는 자가 늘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내에서는 최명길(崔鳴吉) 등 주화파(主和派)와 김상헌(金相憲) 등 주전파(主戰派) 사이에 논쟁이 거듭되다가, 강화론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하였다.
청나라 태종은 조선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우선 인조가 친히 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되, 양국 관계를 악화시킨 주모자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때마침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소식을 들어, 어쩔 수 없이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항복조건을 교섭하게 하였다.
1637년 1월 28일 이에 청군은 용골대·마부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강화조약 조항을 제시하였다.
① 청나라에게 군신(君臣)의 예(禮)를 지킬 것, ② 명나라의 연호를 폐하고 관계를 끊으며,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誥命)·책인(册印)을 내놓을 것, ③ 조선 왕의 장자·제2자 및 여러 대신의 자제를 선양에 인질로 보낼 것, ④ 성절(聖節:중국 황제의 생일)·정조(正朝)·동지(冬至)·천추(千秋:중국 황후·황태자의 생일)·경조(慶弔) 등의 사절(使節)은 명나라 예에 따를 것, ⑤ 명나라를 칠 때 출병(出兵)을 요구하면 어기지 말 것, ⑥ 청나라 군이 돌아갈 때 병선(兵船) 50척을 보낼 것, ⑦ 내외 제신(諸臣)과 혼연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⑧ 성(城)을 신축하거나 성벽을 수축하지 말 것, ⑨ 기묘년(己卯年:1639)부터 일정한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다.
1월 30일 인조는 세자 등 호행(扈行) 500명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와, 송파구 삼전도(三田渡)에 설치된 수항단(受降壇)에서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례(降禮)를 한 뒤, 한강을 건너 환도하였다. 청나라는 맹약(盟約)에 따라 소현세자·빈궁(嬪宮)·봉림대군 등을 인질로 하고, 척화의 주모자 홍익한·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잡아, 2월 15일 철군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완전히 명나라와는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收養) 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贖還) 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贖價)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속가는 싼 경우 1인당 25∼30냥이고 대개 150∼250냥이었고, 신분에 따라서 비싼 경우 1,500냥에 이르렀다. 속환은 개인·국가 모두 그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큰 일이었다. 여기에 순절(殉節) 하지 못하고 살아 돌아온 것은 조상에 대해 죄가 된다 하여, 속환 사녀(士女)의 이혼 문제가 사회·정치문제로 대두하였다.
1645년 10년의 볼모 생활 끝에 세자와 봉림대군은 환국하였으나, 세자는 2개월 만에 죽었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봉림대군)은 볼모 생활의 굴욕을 되새기며, 북벌(北伐)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해 설욕 기회를 놓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