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동은 강원도 양양에서 버스로 1시간 30분이나 더 올라가는 강가의 시골 산골마을에서 태어났
다. 전깃불도 중학교 입학 무렵에서야 들어왔다. 초등학교 때는 호롱불 밑에서 숙제를 하다가 머리를 태워
먹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문화적인 혜택은 없었으나, 언제나 자연과 벗하며 살아왔다. 어렵게 대학
을 졸업 후, 중동 붐이 한창인 시절이라, 경제적인 안정을 갖고자, 서울에 있는 건설회사에 취직을 하여,
그가 꿈꾸던 중동의 여러 지역을 20여 년 정도 누비고 다녔다. 틀에 박힌 회사 생활에 싫증을 느낀 그는
마침내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사표를 내고, 사업체를 차렸다. 꿈에 그리던 창업을 하였다.
목표는 번듯한 건설회사를 하나 만드는 것이었다. 하나 사업이 어디 만만한가? 처음에는 그런대로 잘
되었지만, 차츰 경쟁자가 생겨 사업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적자가 누적되니, 아이들 학비, 점심값
대는 것도 벅찼다.
마침내 빚쟁이들이 집에 까지 매일 같이 쫓아오자, 온갖 협박, 공갈에 못 이겨, 집을 팔아서 빚
청산을 하고, 월세로 지하 단칸방으로 이사를 하였다. 남은 것은 박중동의 부인과 이제 겨우
초등학교 다니는 딸 하나과 아들 하나뿐이었다. 사업을 접은 후, 닥치는 대로 일을 시작하였다.
조폭과 연계된 불법 휘발유를 거리에서 주입을 담당하는 일당 5만 원짜리 주유원을 하다가
고등학교 동창생을 만났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동창생은 그를 못 알아보았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경찰에 고발로, 유치장에 3일 구류를 살고 나와서는 그 일도 그만 두엇
다.
미용소를 전전하며 50만 원짜리 이탈리아제 미용 가위 등 이발기구를 판매하는 영업사원 할 때는 문전
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공중 전화통의 동전을 수거하는 빌딩 건물의 관리자로 일 할 때는 건물
주인이 동전수가 모자란다고 그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주었다. 친인척, 친구들에게 백두표 천지란 상표의
정수기를 파는 영업 사원을 할 때도 성과가 전무했다. 요즘 수돗물도 그냥 마셔도 되는 데, 그런 기계
를 굳이 사용하느냐 하는 소리만 들었다. 더구나 필터에 세균이 득실 거린다는 뉴스가 연일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을 새로 하든지, 보름을 못 넘겼다. 적어도 한 달은 해야 월급을 받는 그런 일이었다. 그
아르바이트성 업체의 주인들은 한결같이, 한 달이 안 되었다는 이유로 월급은 고사하고, 일당도
주지 않았다. 수습사원, 인턴, 실습사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번에는 월급이 떼일 염려가 없는 소규모의 안정적인 사업을 모색하였다. 인천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 청도에 가서, 참깨며, 인삼 등을 가져와서 팔아 보았지만, 겨우 왕복 뱃삯 정도의 수익만 나올
뿐이었다. 북한산 송이버섯도 조선족을 통하여 수입하여 보았지만, 창고에 재고만 가득 쌓였고, 점차 부
패하여 숨을 쉴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
궁리 끝에 5일장인 목련시장에서 리어카에다 배추를 인근의 밭에서 주인에게 약간의 돈을 지불 후,
직접 뽑아와서, 밤새 수작업을 하여 펼쳐 놓고 팔았다. 그러나, 첫날부터 배추값이 폭락하여 똥값이되었
다. 그가 잠시 화장실 간사이에, 그의 리어카는 내리막길에 쳐 박혀, 그의 배추들은 길바닥에 나 동댕이
쳐져 있었다. 배추들이 혼자서 여기저기를 뒹굴고 다녔다. 이른바, 강아지가 뒷다리 들고 오줌을 싸서
자기 영역을 표시하듯이, 이미 생존의 터를 선점한 이웃 리어카상들의 횡포, 구역 싸움이었다. 분기
탱천! 집에서 식칼을 가져와서 배추에도 꼽아 놓고서는, 목에 붙어 있는 가래를 캭 내뱉으면, “한 번만 더
그딴 짓거리 하면, 모두 죽인다”라고, 큰소리를 쳐 보았지만, 용만 쓰는 꼴이었다. 경쟁자들은 이미 박중동
의 마음속까지 꾀어 뚫고 있었다. 자신의 경계를 침입하는 자에게는 가차 없는 응징을 하는 조폭과 같은
밀림의 ”동물의 세계“와 같은, 하이에나 법칙이 작동되는 생존경쟁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목련시장 가축시장 골목 3층에 있는 직업소개업소를 찾았다. 마침, 거기에 50대의 정경식이란
사람을 만났다. 그도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직업소개소 업주는 박중동과 정경식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며칠간 술을 사주며 호의를 베풀었다. 술에 약을 탔는지 며칠 후 깨어났다. 이들이 술에 대취한 틈을 타
서, 둘에게 각각 1,700만 원의 차용증을 쓰게 했고, 그때부터 조폭을 동원하여, 빚 독촉을 하였다. 이들이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낙일도에 있는 새우잡이 어선 선주에게 선불금을 받고 팔아넘긴 뒤였다.
우선, 직업소개소 사장은 박중동과 정경식에게는 일당 10만 원짜리, 월 300의 좋은 일자리가 있다고
속였다. 다음날 건장한 청년 3명이, 이들을 봉고차에 태워,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을 달린
끝에 어느 이름 모를 어촌의 외딴집에 내려놓았다. 하루를 그 집에서 자고, 다음날 어떤 외딴섬으로
배에 태워 데리고 갔다. 그곳이 송광의 낙일도였다.
그들의 팔뚝에는 용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팔뚝 만이 아니라, 전신을
휘감는 용의 문신이었다. 새벽에 잠을 깨운 일당들은 박중동과 정경식을 선주에게 인계하고는
사라졌다. 그다음 날 이들은 조그마한 통통배에 태워졌다. 일명 똑딱선, 새우잡이 배, 일명
멍텅구리배였다. 10톤 정도 되는 배에 6명을 붙여서, 새우가 많은 지역에 도달하면, 그물을
내려서, 새우들이 꼼작거리기도 하도 팔딱팔딱 뛰는 그물을 온몸으로 걷어 올리는 그런 일이었다.
첫날에는 난생처음 하는 일이라, 두려웠지만 재미도 있었다. 하지만, 새우의 비늘이 튀겨 얼굴
이고 옷이고 비린내가 진동을 하였다. 태풍이 온다는 경보가 내려졌음에도 출항을 해야 했다. 선
주의 목적은 오직 돈이었다. 파도가 심하면, 먹은 것을 모두 게워 내야 했다. 축 쳐져 있으면, 그물
을 당길 때 힘을 써지 않는다고 주먹질, 발길질은 보통이었다. 그리고는 식사라고는 새우에 쉰내
가 나는 밥을 주는 것이 다였다. 가끔씩 소주가 나왔지만, 그것은 특식이었다.
선주의 말에 의하면, 자기는 소개비로 소개소에 인당 1,700만 원을 선불로 지불하여 남는 것이
없다는 이유였다. 하여 박중동과 정경식 1,700만 원어치의 일을 해야만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계산 법칙을 안일이지만, 일당이 2만 원이고, 거기에서 식사비, 장갑 등, 작업복 비등 1
만원을 공제하면, 손에 줄 수 있는 것은 1만 원 정도라고 했다. 즉, 하루도 안 쉬고 1,700일을 일
해야 계약이 종료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4, 5년은 일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때 되면, 또 무슨 핑
게를 들이밀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것도 선주가 입금된 통장을 보관하고, 계약 완료 후에 그 통
장을 넘긴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우 잡이에 걸려들면 노예와 같은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 당시에는 그런 것을 알턱이 없었다. 바다의 찬바람을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1차 탈출
박중동과 정경식은 함께 그 섬을 탈출하기로 모의하였다. 어느 비 오는 밤에 감시자가 잠든 틈을
타서 그 집을 나와서 부둣가로 냅다 밤새 뛰었다. 부둣가의 화장실에서 긴 장발의 머리를 화장실
대변기안 청소용용 솔로 물을 묻혀 빗어 넘겼다. 배를 타기 위하여 나름대로 깔끔하게 보이기
위함이었다.
하나, 우선 새우의 역한 냄새가 온몸에 배었고, 수염은 10센티나 자라,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거동 수상자나, 탈출범이 틀림없었다. 그곳에는 흉악범의 가두어 놓은 교도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를 탈려는데, 그 조폭들이 탑승구 사다리 앞에서 뜨윽 버티고 서있었다.
주민들이 신고를 하였다고 한다. 그날 저녁 숙소 화장실 뒤에서 나무 몽둥이로 어깨 가슴 엉덩
이에 불이 날 정도로 무차별하게 얻어터졌다.
2차 탈출
몇 달 후, 박중동과 정경식은 연락선 배가 출발하기 20분 전 새벽에, 택시를 용케 잡아 타고서는
낙일도 항으로 가자고 하였다. 한참을 가다가, 항구와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것이 아닌가?
“어, 어 아저씨 이방향이 항구로 가는 것이 아닌데요” 하니 택시 기사는 “이 길이 훨씬
빠른, 질러가는 길이요” 하고 냅다 달리는 것이었다. 한데, 갑자기 빵빵빵 클랙슨을
세 번 울리며 달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런데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우선 항구에 닿아서 배에 올라타야 하는
것이다. 아, 웬걸, 그 택시는 어느 2층짜리 가설 사무실 앞에 “끾” 급정지하였다. 그때,
덩치 큰 주먹깨나 씀직한 놈 셋이 2층 계단에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가” 어이
형씨들 이른 아침에 어디를 그리 빠삐 가시유?” 하더니 박중동에게 주먹을 냅다 배꼽에다
힘껏 쑤셔 박았다. 그러더니, 꼬꾸라진 등위에다 구둣발을 내어 질렸다. 또 다른 주먹
한 녀석은, 시커먼 가죽장갑을 낀 주먹을 정경식의 면상을 향해 날렸다. 그가 얼굴을
감싸자, 옆구리에 구둣발이 꽂혔다.
만신창이가 되어 조폭들들에 의해 선주 앞에 끌려 나타난 탈주자 우리 2명은, 맹세를 해야 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우선 살고 봐야 했다. 다음날, 멍텅구리선에 올라탄 그들은 더욱 심한 구박과 감시를 받아야 했다. 나머지 동료들은 그 선주에게 아주 협조적이었다. 선장과 부선장이란 작자도, 인신매매단에 의해 끌려 왔지만, 이들은 이미 노예 체제에 순응하여, 잘 적응하고 있었다. 오히려 선주와 한패 거리가 되어, 신참들에게 온갖 구박과 욕설을 내뱉었다. 이들은 또 다른 감시자들이었다.
선주과 5년 넘게 같이 일했다는 작업팀장이란 작자는 같은 처지인데도, 선주의 말에 고분고
분 따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개인적인 의식 자체가 사라져 버린, 관성의 법칙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노예제도가 이미 오래전에 없어져 버렸지만, 스스로 그들에 길들여져, 스스로
그늘을 벗어나지 않는 충직한 현대판 노예가 되어 있었다.
3차 탈출
또 다른 몇 달 후, 세우가 냉동실에 가득 차고, 약 보름 후에 섬의 낙일도 항에 큰 냉동 수송선이
을 내렸다. 박중동과 정경식은 다시 탈출 모의를 했다. 명색이 대학물을 먹은 사람이 그런 생활에
버틸 기력과 의욕이 더 이상 없었다.
어느 그믐날 3시경에 그들은 그 숙소를 나와 산길을 따라 산을 넘어 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국가의 공공 기관에 성공적으로 잠입한 것이었다. 더 이상의 조폭 무리의 추격은 없다고
안심하고 둘은 자초지종 이야기하고, 배가 오면 제일 먼저 탑승할 수 있도록 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파출소 순경은 그러게 한다고 이야기를 해 주어 더욱 안심하였다. 둘은 담배를
맛있게 피우고, 육지에 나가서 술 한잔 하면서 멍텅구리선에 탔던 추억을 안주 삼아 축배를 들 것
을 약속했다.
하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조금 있으니, 그 조폭 셋이, 시커먼 선글라스와 장갑을 끼고 떡
하니 나타났다. 그들은 파출소장을 밀치고 탈주자 2인을 밖으로 끌어냈다. 조폭들은 파출소
소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놈들은 우리 돈을 떼어먹고 달아나는 현행범이오”이라면서
“순경이 그런 것도 구별 못하면서 어떻게 민생치안 유지를 하슈? 우리끼리 일이니까 상관 마시오”
오히려, 협박을 하면서, 한술 더 떠서 본서 높은 양반한테 말해서 모가지를 댕강 날려 버리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