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년 모월 모시에 맏딸이 유아 병아리 한 마리 들여오던 날 높은 집 난리 났네 물먹어라 밥 먹어라 모이 먹어라 잠잘 시간 없더니
구정날 시골 할머니 집에 데려갔다가 할머니 친구 담터 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올라오던 날
막내 넷째 딸 가슴에 병아리 한 마리 울고 불고 돌아다니더니 고속도로 톨 게이터에서 갑자기 창가 입김 서리 속에 병아리 한 마리 그림으로 환생하였네
애달파라 애고 서러워라 어린 병아리 두고 나는 가네 막내딸 식구들 조롱에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네 그 모습에 엄마 두 눈에도 눈물 글썽거리네.
어느 날 심심하던 차에, 옛날 인터넷 가족 카페에서 위의 글을 발견하였다. 지금도 가족 모두의 가슴에는 그 병아리가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첫째 녀석이 병아리 한 마리를 시장에서 천 원을 주고 사 왔다. 삭막한 도회지 생활에 또 다른 생명체가 아파트란 울타리에 나타났으니, 어린 가슴들 속에는 얼마나 콩닥콩닥 뛰었을까? 당장에 이름이 지어졌다. “아기천사”.
학교에 가면 그놈 때문에 선생님 말씀이 귀에라도 들어왔을까? 아파트의 좁은 공간에서 그 병아리가 목이 말라 삐약 삐약 돌아다니면, 한밤중에 8개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번개처럼 마루로 쏟아져, 튀어나왔다. 그리고서는 집게손가락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약지로 발가락을 만져 보고, 물을 먹여 보고서야 안심하고서는 하나둘 방으로 들어갔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한 녀석은 수업 시간에 졸다가 복도에서 의자를 들고 벌섰다고, 담임선생님이 전화로 알려 왔다.
또 한 녀석은 수업시간에 훌쩍훌쩍 울더라고 했다. 선생님이 왜 우느냐고 하니까, “병아리가 보고 싶어서요” 라며 대성통곡을 하더라고 했다고 전해 주었다. 급기야, 구정 때 외가에 내려가는 김에 아예 병아리를 데려갔다가 떼어 둘 작정을 하고 내려갔다. 상경하기 전에 아내는 녀석들을 달랬다. “방학 때마다 와서 보면 병아리가 무럭무럭 커서 중닭이 되고, 또 그다음 방학 때는 어미 닭이 되어 그때는 올망졸망한 병아리들을 거느리며, 엄마 닭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파트에 가둬 놓고 키우면, 그것이 어떻게 클 수가 있겠니?” 그 말에 네 명의 아이들, 여덟 개의 눈동자들은 서운해하면서도 마지못해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짧은 연휴 동안 아이들은 병아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구정 연휴가 끝나는 마지막 날, 아이들은 장모님, 즉 할머니 손을 꼭 잡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봄 방학 때 내려올 테니까, 그때까지 잘 돌보아 주십사고. 상경을 위하여 병아리와 길고 긴 아쉬운 작별을 하고, 톨게이트를 지나서 고속도로에 진입하려는 순간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막내가 등받이 밑으로 숨어서 꼼짝을 하지 않고 있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트린 것이었다. 당장 돌아가서 병아리를 데려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 이미 차는 고속도에 진입한 직후였다.
울음을 그친 막내는 창가에 입김을 호호 불더니, 입김이 차창에 붙어 김이 서리자, 갑자기 그 병아리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마치 조금 전에 두고 온 병아리가 쫓아와서 차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애석하게도 그 병아리는 애처로이 창가에 매달려, 그림으로만 우리와 함께 돌아왔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호락호락하던가? 홀로 남겨져 삐약 삐약 돌아다니는 병아리는 늘 모험과 위험에 처해 있었다. 솔개가 마을 위를 빙빙 돌아다녀 언제고 병아리를 채어갈 수도 있었다. 족제비는 늘 담벼락을 수시로 제집 넘나들듯이 넘나 들었다. 족제비는 어미 닭도 제압하는데, 병아리쯤이야 한입거리였다. 강아지 “수수” 만큼은 두 앞발로 턱을 괘고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1급 경호원처럼 지켜주고 내심 염려해 주었다. 할머니는 자주 밭일을 나가시거나, 밭에서 수확한 고사리, 고추, 마늘 등을 파시려고, 웃장이나 아랫장에 자주 외출을 하셨다. 출타 중에는 강아지 “수수”만이 병아리를 지켜줄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병아리 때문에 닭장을 별도로 마련하기에는 할머니로서는 무리였다.
마침내 할머니는 이웃집 친구 담터댁에게 이놈을 키워 달라고 주었다. 손주 녀석들이 애지중지하는 놈이니까 잘 키워달라고. 그렇게 담터 할머니에게 맡겨진 병아리는 할머니 입을 통하여 들려왔다. 모이를 잘 먹는다던가, 물을 먹고서는 고개를 쳐들고 날개를 펴고 쪼로롱 내어 달린다던가, 그런 소소한 꼼 살 나는 이야기를 전화기 너머로 할머니가 간간히 전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터댁 할머니가 집안 구석구석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행방불명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녀석은 가족 모두의 마음속에 2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아이들 마음속에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봉아!”라고 불러웠던 내 어린 시절, 개구쟁이 형이 동네 친구로부터 하얀, 어린 복실 강아지를 한 마리 얻어 가지고 집에 돌아왔다. 당장에 이름을 지었다. “메리”다. 메리는 재롱둥이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떻게 알았는지 동구 밖 다리까지 마중 나와서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면서 반겼다. 허리춤의 책보따리를 마루에 던져 놓고 마을 친구들과 놀이를 하면 조용히 앉아서 놀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중학교를 들어가고 고등학교를 들어갔다. 메리도 엄마가 되어 올망졸망 자기를 닮은 새끼를 몇 번이나 낳더니, 어느 날 신발을 벗어 놓는 디딤돌 옆에서 두 눈을 감았다. 주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것처럼 두발은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인 체 그렇게 떠나갔다.
어느 날 아버지가 우시장에서 누런색 수송아지를 한 마리 사 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매일 그놈을 데리고 뒷산에 올라 풀을 뜯어먹게 하였다. “누렁이”로 불려졌다. 어린놈이라 보리, 콩, 풀로 만든 소죽도 끓여서 먹이고, 파리도 쫓아 주었다. 여름철에는 냇가에 데리고 가서 냉천에서 쏟아 오르는 시원한 물도 마시게 했다. 아버지는 담쟁이 나무줄기를 낫으로 다듬어, 한동네 윗마을에 살고 있는 처남을 불러 연탄불에 달군 쇠 막대기로, 코를 뚫어서 코뚜레를 꿰었다. 녀석은 고개를 쳐들고 발버둥을 치다가 끝내는 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가만가만 참고 있었다. 얼마나 고통이 심했으면, 며칠 동안 여물도 먹지 않았다. 학교를 파하고 부리나케 달려와서는 이 녀석을 데리고 마을 뒷산에 소꼴을 뜯게 하는 즐거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큰 소나무 둥지에다 메어 놓고 옆의 노송 밑에서 자는 낮잠은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만큼 달콤했다.
어느 날 친구랑 각자 소에게 풀을 먹이려고 큰 산에 올랐는데, 친구가 자꾸 더 높은 데가 자기 소를 데리고 올라갔다. 그 장소가 풀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절벽 쪽은 겁이 나서 가지를 않았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 평지에 풀이 아무리 많아도 그곳이 두려웠다. 그 친구보다 한참 밑에서 소풀을 뜯게 하고 있는데, 위에서 갑자기 비명 소리가 들렸다. 조금 있으니, 저 아래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의 소가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진 것이었다. 친구는 얼굴이 하얂게 질려서는 낭떠러지 길을 달리듯이 내려갔다. 그리고서는 울면서 집으로 뛰어갔다. 결국 숨을 거둔 그 황소는 냇가에서 경찰서 허가를 얻은 도축업자의 손에 의해 해체되어 동네 사람, 이웃동네 사람들에게 팔려 나갔다.
어느덧 누렁이는 건장한 체구의 누른 황소가 되어 갔다. 논갈이 밭갈이, 물논의 쓰레기질도 곧잘 하게 되었다. 큰 두 눈을 껌뻑이며, 멍에를 등에 업고서 무논을 처벅 처벅 걸어 다니며, 모내기 전의 논 바닥 고르는 일도 능숙하게 잘했다.
바람이 몹시 부는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에 누군가가 외쳤다. “불이야!” 뒷집에서 재를 모아 놓고 거름을 재워 놓은 초가로 만든 헛간에 불이 붙었다. 소죽 아궁이에 재가 가득 차자 아궁이 재를 버렸는데, 불씨가 살아 있었던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집에 있는 물동이, 큰 그릇 등에 물을 담아서 달려왔다. 장정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줄을 서서 물을 불길을 향해 쏟아부었다. 낫으로, 쇠갈쿠리로, 쇠스랑으로 용마루를 해체하여 땅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이번에는 불똥이 튀어 누렁이가 있는 소 외양간으로 옮겨 붙었다. 소몰이 줄을 양쪽 기둥에 메어 놓았기 때문에 급히 누렁이를 밖으로 몰아내어야 했다. 지붕 위의 이엉에 불이 붙어서 불똥이 누렁이 앞 뒤로 마구 떨어졌다. 마침 그때, 누렁이 한 테로 달려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상머슴 용칠이 아저씨였다. 용칠이 아저씨는 양쪽 기둥에 메어 놓은 끈을 낫으로 끊었다. 그리고는 소를 우격 다짐으로 앞에서 잡아당겼으나, 누렁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가 외쳤다. “소 눈을 가려라! 그리고 앞으로 당겨라!” 용칠이 아저씨가 웃옷을 벗어서 누렁이의 양쪽 뿔에다 옷의 양팔 부분을 걸쳤다. 그리고는 누렁이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누렁이와 용칠이 아저씨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소 외양간이 무너져 내렸다. 동네 사람들의 필사적인 불과의 싸움으로 다행히 본채에는 피해가 없이 불길이 잡혔다. 매캐한 불냄새와 흥건한 회색과 찬 달빛만이 남고 사람들은 하나 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 집을 잃은 누렁이는 추운 겨울에는 두툼한 담요를 몇 겹 두르고 그렇게 견뎌야 했다.
마침내 봄이 돌아왔다. 누렁이 외양간을 새로 새우기 위해, 어른 허벅지 굴기의 소나무 기둥들을 실은 트럭이 도착했다. 공사를 하는 동안 누렁이는 집 밖에 있는 헛간에 임시로 메여 지냈다. 며칠 후 아침에 대 소동이 일어났다. 누렁이가 감쪽 같이 없어진 것이었다. 흉년이 몇 년 동안 계속된 탓으로 모두가 어려운 시기에, 간간히 소도둑이 이웃마을 아무개 소를 훔쳐 갔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왔는데, 설마 우리 집 소, 누렁이가 사라지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서는 십리 거리의 경찰서에 신고부터 하고, 친척 가족들은 조를 짜서 동서남북으로 수소문하며, 찾아 나섰다. 어느 조로부터도 찾았다는 연락은 없었다. 어떤 조는 우시장을 방문하여 한 놈 한 놈 훑어보기도 하였다. 밤이 되자 어떤 조는 모여서 “누렁아! 누렁아!” 이렇게 합창을 하고서는 귀를 쫑곳세워서 혹시 워낭소리라도 들리는가 들어 보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냇가의 졸졸 흘러가는 물소리, 응애응애 하는 맹꽁이 울음소리, 들판을 가득 채운 풀벌레 소리만 들려왔다.
어떤 조는 외딴집에 있는 가축 도축장을 방문하여 혹시나 하고, 의혹의 눈초리로 증거물이라도 있는가 찾아보았지만 허탕이었다. 분리 해체된 그 부위가 누렁이와 관련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뿐. 큰 양은그릇에 담긴 내장, 염통, 간 그리고, 검붉은 응고된 피, 그리고 사납게 달라붙는 파리만 있을 뿐이었다.소문으로는 소도둑들은 소를 해체하는데, 그들 전문용어로, 소를 까는데 1시간이면 해체가 끝난다는 것이었다. 이미 찾기는 틀렸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공동묘지 쪽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소위, 소를 까는 데는 그런 곳이 안성맞춤이라는 것이었다. 상엿집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슬슬 모두 지쳐 갔다. 경찰서에서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엄마는 더 실망하는 기색이 완연하였다. 그 누렁이가 어떤 소인데, 혼자서 쟁기질, 밭갈이, 논갈이, 짐을 한 달구지 가득 싣고서도, 가파른 길을 입에 거품을 씹으며, 꾸역꾸역 견디어 내며 올라오지 않았던가. 이제 곧 닥칠 모내기철에는 그 많은 일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부터,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누렁이가 대문 앞에 떡하니 나타난 것이었다. 소도둑한테 끌려가다가 도망쳐 돌아온 것인지, 목줄과 워낭이 보이지 않았다. 온몸에는 까시 나무에 찔렸는지 군데군데 피가 맺혀 있었다. 그렇게 누렁이는 주인을 찾아 천신만고 끝에 살아서 돌아온 것이었다. 왕방울 같은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