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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초승달 숟가락

할머니의 일생

by 애바다

어느 소설가가 유복자인 아버지와 할머니의 일생을 그린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겨울밤 초승달이 얼어붙은 듯 감나무에 걸려 있었다."를 써놓고서는 다음 구절로 넘어가지 못하고 몇 날 며칠을 첫 구절에서 맴돌았다. 그리고는 홀연 그가 사라졌다. 그 의 사후에 그 작품을 구상한듯한 누런 메모지가 지하창고에서 그의 손자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었다.

어머니가 할머니방에 딸린 작은 부엌에 잔솔가지를 떼어 고구마를 삶고 있었다. 솥뚜껑에서 고구마가 익어가는,요란한 소리가 나자, 타고 있던 잔솔가지 몇 개를 아궁이 밖으로 끌어내어 불을 줄였다. 할머니의 작은방 덥히는 군불 겸 겨울밤 식구들 야식을 준비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숯불이 된 잔솔가지를 끌어 모아,놋쇠로 만든 질화로를 할머니의 작은방에 들였다. 손주들 이대 청마루 건너 우르르 할머니의 작은 방으로 건너갔다. 물레질할 때 사용하던 송곳으로 밤 껍데기에 구멍을 냈다. 구멍이 제대로 뚫리지 않은 밤을 시한폭탄처럼 “펑 “ 소리를 내며 질화로 재와 함께 노란색 방바닥으로 뛰쳐나왔다. 할머니가 질화로 속에서 밤을 구워 접시에다 올렸다. 손자들은 연신 뜨거운 밤을 호호 불며 입에 넣기에 바빴다. 밤을 다 구워 먹자,이번에는 동전 모양의 떡국을 질화로 턱에 다닥다닥 원을 그리며 올려놓았다. 떡국의 배가 불러오면 얼른 뒤집어야,타지 않았다.


할머니는 점점 줄어드는 초승달 모양의 구릿빛 놋쇠 숟가락을 방의 어디엔가 보관하고 있었다. 농사일에 식사 준비에 바쁜 어머니가 가끔씩,감자 껍질 좀 벗겨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는 방안의 대나무 반짇고리 덮게를 열고, 초승달 모양의 숟가락을 꺼내어 왔다. 소외양간 앞의 큰 볏짚단 옆이나,햇빛 잘 더는 담 밑 양지에 앉았다. 오른손에 감자를 쥐고,왼손에 쥔 그 숟가락으로 껍질을 순식간에 훑어내리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감자 살점 한 점 허투루 딸려나가지 않고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 누런 알 감자가 빈 양푼이 그릇에 금방 소복소복 쌓이는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린 손자가 어리광을 부리거나 예쁜 짓을 해도 내색을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 손자에게 살며시,못 이기는 척,미소 만지었다. 그것뿐이었다. 동네잔치에 초대받아서 가면 할머니는 중앙보다는 한적한 곳에 말 수가 적은 친한 친구 한 둘과 조용히 음식을 먹고서는,도중에 남은 음식을 보자기나 종이에 담아와서는 손주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큰 잔치에는 포장을 나무껍질로 만든 도시락을 가져왔다. 그 속에는 밥, 연근 뿌리,돼지고기,간,순대,소금,파전,김치,나물 등이 납작한 측백나무잎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노란 고무 밴드로 도시락과 나무젓가락을 고정시켰다. 언제나 마시면 소화가 잘 된다는 부채표가 그려진 활명수가 덤으로 딸려 왔다.


코 흘리게 손자가 놀이에 열중해서 누런 코가 석자나 나왔다가 후루룩 들이키면,맨손으로 손주의 코를 잡고서는"고"하면서 코를 훔쳐 내었다. 그리고서는 볏짚으로 손을 닦았다. 그 손끝이 얼마나 매운지 손자는 눈물을 찔끔 그렸다. 손자들은 다들 할머니 손끝이 맵다고 하였다. 필요한 일과를 마친 할머니는 우물가로 가서 두레박을 물을 깄고, 얼굴 목덜미 손을 씻고, 할머니의 작은방으로 들어가서는 웬만해서는 좀처럼 문밖으로 다시 나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어느 추운 겨울 감기 몸살로 몸져눕자 좀처럼 회복 기미를 보이지 않고,병세가 점점 악화되었다. 이가 없는 할머니에게는 애장품 초승달 숟가락으로 긁어서 나오는 즙을, 놋쇠 밥그릇에 담아 계란 모양의 놋숟가락으로 입에 넣어 드렸다. 그리고 얼마 뒤 저녁 무렵,밖에서 놀다가 아래채 방문을 여는 순간 할머니의 시신에 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을 장례 담당하는 사람이 코에 솜을 채워 넣고 있었다. 3일 후 고개 너머로 막내 손주를 앞세운 명정을 따라 상여가 선산이 있는 죽은 자 들이 산다는 의미의 검은곡을 향하여 넘고 있었다. 계곡 양지바른 곳에 혼자 묘를 썼다. 할아버지 없이 혼자 오래 사셨는데 왜 할아버지 묘 옆에 모시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그저 그러려니 했었다. 가족의 누구도 그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하기야 할아버지 묘에 절해 본 기억이 없으니 궁금증은 남아 있었다.


친할머니의 성격과는 정반대로 활달한 친척 할머니가,가끔씩 지나가는 말로"니 아버지가 결혼할 때,큰집에서 살림 나갈 때 커다란 장 독한 개를 받았단다. 그 장독을 껴안고서 꺼이꺼이 우는 기 얼마나 안됐던동 쯧쯧" 아버지는 유복자였다. 일제 치하 시절,3.1 운동 후 일천구백이십 년경에 조부모가 막 결혼하고 아버지가 뱃속에 있을 때,할아버지가 만주로 어떤 목적이었던지,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로는 뛰어난 두뇌와 성격이 치밀하였던 그는 독립군에 전달할 문서를 가지고 가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잃고,일제는 무덤의 위치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할머니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열여덟 살 아기 엄마는 갓난아기를 안고 인근 마을의 친정으로 되돌아갔다. 아버지는 일곱 살이 되자,할머니를 떠나,큰집으로 들어와서 큰집의 식구가 되었다. 그리고는 학교 문턱에도 못가보고 인근 마을, 큰집의 식구가 되어 입에 풀칠만 하고 고생하였으리라. 장성하여 결혼 신혼살림이라고는 큰 장독대 하나만 달랑 지게에 지고 동네 처녀였던 어머니와 혼인하였다. 다행히 외갓집이 그런대로 살아서 약간의 전답을 물려받아서 그것을 토대로 자식들을 키워 냈던 것이다. 물론 할머니도 그때부터 모시고 함께 살았다. 그때까지 모자간에는 풍전등화 같은,물가에 내어놓은 자식 같은,안타깝고 촉박한 시련의 시간이었으리라. 

친척 할머니의 혼잣말을 퍼즐처럼 듣고 나서 몇십 년 뒤에서야 비로소 의문이 풀렸다. 친할머니의 고독한 성격과 초승달 달빛처럼 어둡고 차가운 마음을. 누가 그의 말벗이 되어 줄 수 있었겠으며,열여덟 살 새색시의 마음을 헤아려 줄 수 있었겠는가? 감자 껍질 깎는 숟가락의 초승달 같은,점점 닿아지는 마음을. 초승달을 보면 할머니가 생각나고,아버지가,어머니가,그리고 할머니의 숟가락이. 또한 닳아 없어진 부분의 할아버지가. 할머니의 인생에 할아버지의 빈 공간이. 어쩌면 그 숟가락이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자,흔적이지 않았을까? 우리 할머니를 닮은 초승달이 산 위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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