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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몽유도원도

아버지의 설날

by 애바다

온 식구가 새벽 5시쯤에 일어나 세수하고 10리쯤 떨어져 있는 비슬산 기슭 원산리, 큰집 댁으로 제사를 지내려 가는 날이다. 특히 오늘따라 아버지도 태어나고 자란 곳 원산리 가는 길이라 마음이 들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는 유복자라, 할머니 뱃속에 있을 때, 불행하게도 할아버지가 안 계셨다. 일제 강점기 1920년 어느 날 홀연히 행방불명되었다. 할머니와 함께 참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셨으리라 짐작이 된다. 그렇지만, 내색을 안 하셨지만, 친척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셨다. 결혼 후 큰집에서 살림을 내어 주었는데, 아버지가 장독 하나 껴안고 울고 있더라고 했다.

샛별이 하늘에 반짝인다. 아버지가 소죽 쑤는 아랫채 부엌 아궁이에서는 매콤한 연기가 올라 올라온다. 이어서 타닥타닥 타는 솔나무 가지, 참나무, 가시나무 잔가지 타는 소리가, 냄새가 매콤하게 난다. 굴뚝에는 연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마음은 벌써 원산리에 가 계실까?


할머니는 작은방에서 동백기름으로 머리를 매만지고 있다. 언제나 조용하고 말이 없으시다. 무슨 말씀이 많이 필요하랴. 무수한 사연을 가슴에 담아 두고 계시는 것이다. 할아버지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계시겠지. “영감, 오늘도 나는 이렇게 당신만을 생각하고 있소. 어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요”


어머니와 누나는 제사상에 쓸 나물, 쌀을 씻기 위해, 우물 속으로 두레박을 내린다. 돌로 쌓은 우물 속을 내려가며, 호박돌들에게 몇 번 부딪히고 나서야 두레박은 물에 첨벙 잠긴다. 이어서 쌀이 커다란 양푼이에서 쓱싹쓱싹 씻겨져, 커다란 대나무 소쿠리에 담긴다. 형들은 소죽, 돼지죽을 주고, 간밤에 함박눈에 소복 내린 마당에 빗자루로 길을 내고 있다.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불을 밝힌다. 모두들 설 대목 시장에서 산 옷이나, 신발에 관심들이 가 있다.


자, 출발이다. 모두 얼굴에 맑은 기운을 가득 담고 있다. 남자들만 다섯 명이다. 여자들은 남아서 차례 제사상을 준비한다. 눈 덮인 잔 자갈이 깔린 신작로를 따라 걸으면 20분 거리에 큰집 가는 도중 첫 마을에 10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에 작은집이 있다. 연기가 피어오른다. 역시 차례상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대체로 우리 집보다 5살 위 정도다. 아버지와 5촌 숙부 나이 차이만큼이다.


이제 남자들이 5명 추가 합세다. 대군이 된 것이다. 나이 든 어른들은 정치 이야기, 경제 이야기가 화제다.

어린아이들은 끼리끼리, 눈길에서 뛰어가다가, 눈 뭉치로 눈싸움을 하거나, 서로의 목덜미에 눈을 집어넣어 장난을 친다.


50호쯤 되는 평촌마을의 큰 느티나무를 지나서, 양철 지붕 정미소가 있는 곳에 이러면, 참새들이 후루룩 날아오른다. 참새들이 방앗간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번에는 사과밭이다. 멀리서부터 과수원 개가 사납게 짖어 댄다. 탱자 울타리 밖으로 태풍에 떨어져 흘러 굴러온 썩은 사과들이 듬성듬성 떨어져 있다.


폭이 200미터 정도 되는 큰 냇가가 있다. 비슬산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인 것이다. 물이 맑다. 여기는 모래 성분이 많아서 땅콩 농사가 잘된다. 국도와 냇가가 만나는 지점은 큰 다리가 놓여 있다. 교각 밑에는 거지들이 3가구 정도 살고 있다. 가마니를 이은 것으로 방풍막을 했으나, 그 추위는 어찌 막고 사는지 어린 마음에 걱정이 된다. 동네 탱자나무 위를 기어 다니는 구렁이를 잡아서 이곳에 갖다 주면, 1원에서 3원 정도의 돈을 쳐 준다. 거지왕 김춘삼의 관할 지역이라서 손대면 큰일 난다고 하여, 모두들 조심한다.

버스 차표를 파는 가게 쪽 다리 근처에는 장터가 있다. 5일마다 열렸는데, 그렇게 활기찰 수가 없다. 겨울철 농한기에 그 장터에서 가설 야외극장이 열리는데, 밤이면 인근의 청춘 남녀, 처녀 총각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버스 매표소에서 국민학교 쪽으로 가면, 원산리가 까마득히 보이기 시작한다.


마음이 급하여 바로 옆에 있는 국민학교를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다들 원산리만 보면, 유전인자 DNA가 잠시도 한눈을 팔도록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자석의 끌어당기는 힘처럼, 모두의 마음이 바빠지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원산리를 향하여, 벌써부터 어른들을 앞질러 달음박질친다. 이윽고 다다른 큰집 마을에 이르러면,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몽유도원도가 펼쳐진다.

야산 중턱에 20여 가구 초가집을 덮고 있는 하얀 눈 세계, 설국이 펼쳐진다. 이 집 저 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동백꽃 울타리에 얹힌 눈이 소담스럽다. 초가집 지붕 끝에 길게 뻗은 고드름을 뚝떼어 입속을 넣고 부셔 먹어 본다.


추석에는 화려한 단풍이 온 마을을 감싸고 대추가 오솔길에 굴러 다니고, 밤나무에 밤이 탐스럽게 달려 있다. 그 마을 뒷산은 단풍으로 더욱 황홀한 경치를 보여 준다. 큰집 뒤 작은 연못에는 연꽃이 만발해 있고,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연못의 송사리나 소금쟁이가 부지런히 꼼 살 거 린다.


드디어, 아침 9시쯤, 큰집에 들어서면 20여 명의 대식구가 되어, 갓난아기부터 노인까지 대화합이 이루어진다. 상위에 조상님들에게 드릴 음식과 과일이 가득 차려지면, 향불이 오른다. 어린아이들은 아예, 제사상에서 멀리 떨어진 흰 눈이 덮인 마당 위의 멍석, 덮석에서 절을 올린다. 윗 마루에서는 무슨 상황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그냥 추측할 뿐이다. 즉, 앞에 사람들이 절하면, 따라서 손을 바닥에 대고 절하고, 일어나면 따라서 일어날 뿐이다. 앞사람의 엉덩이에 절을 하는 꼴이다.


차례 제사가 끝이 나면, 맛있는 제사상의 음식을 먹고 이야기 꽃을 피운다. 식사 후의 포만감은 가래떡만큼이나 푸짐하다. 아버지는 연어가 회귀하듯이, 여우가 태어난 굴을 찾듯이, 원산리에 돌아온 것이다.

원산리! 어린 내 심장도 콩닥콩닥 따라서 뛴다.


약 수십 년 전 코 흘리게 시절이 생각납니다. 아버지도 벌써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흘렸습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모든 분들, 가족과 함께 즐겁고 행복한 설날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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