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만 바닷가에 서동이란 마을이 있었다."선영아! 밥 먹으러 와라" 갯가에서 바지락 캐는데 열중하고 있는 나를 엄마가 큰소리로 불렀다.
남쪽에서 바다 갯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섬진만의 갈대들은 이리저리 길을 비켜주며 순응하였다. 결코 맞서는 법이 없었다. 동천과 서천이 바닷물과 만나서 넉넉한 영양분을 공급하여 생명을 지켜주고 있다. 짱뚱어와 바다게들은 갈대 밑을 파고들어 안식처를 마련했다. 햇빛에 반사되는 파도는 때로는 아기 울음소리를 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 정상에 우뚝 솟은 배바위는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듯,의연하게 굽어 보고 있었다. 가끔 바람 방향이 일치하면 선암사 절간의 법고 소리,풍경소리가 들려오고,저녁때는 하루를 마무리하는 스님들의 타종식이 어김없이 진행되었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만의 앞에는 용이 승천할 때만 가 볼 수 있다는 아기 섬이 있었다. 갈 때 밭의 수로를 따라가서 고기잡이를 나섰던 어선들이 풍랑을 만나 천국 같은 그 섬에 서한달 여 피신하며,쉬었다가 고향에 돌아와 보니,벌써 아내와 자식들은 저세상의 사람들이 되어있고, 낯선 사람들이 살고 있더라는 전설이 서린 섬이다. 그 아기 섬의 하루는 인간 세계의 십 년이라고 노인들은 들려주었다.
엄마는 자그마한 체구에 동그란 얼굴에 예뻤다. 할머니를 잘 모시는 효부라고 동네 사람 칭찬이 자자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네 아낙에게는 커단 란 박아지에 쌀을 담아 몰래 집까지 갔다 주기도 했고, 처자들의 고민 상담도 자기 일처럼 해주고, 도와줬다. 조용하던 서동 마을에 아버지는 무슨 이유인지 엄마와 사사건건 말다툼을 걸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같이 미련하고 살림도 못 사는 여자와는 못살아!"
"그러는 당신은 뭐 똑똑한 줄 알아? 밥만 먹으면,느티나무 그늘 밑에 누워서 잠이나 쳐 자는 주제에!"
하기사 그 말도 맞는 것 같았다.
할머니는 가끔씩 어린 나를 안고서는 나의 머리를 쓰다 듬으면서 말을 이었다.
"없는 집구석에 자식 하나 돈 들여 상업고등학교에 보내 놨더니, 구급 공무원 시험에도 못 붙고,농사일도 안 하고 매일 빈둥빈둥 논다."
몇 년을 허송세월 하며 빈둥빈둥 놀던 아버지가 어떤 연유로 섬진 평야 땅부자집 최 씨 댁 집사로 들어갔다. 십리길 안에서 최부자 땅을 안 밟고서는 갈 수 없다는,토지가 워낙 많아 전답을 인근 농민들에게 이른바 도제,즉 세를 놓고 있었다. 그 토지 관리와 세를 징수하는 일을 아버지가 했다. 월급으로 일 년에 열두 섬을 받는다고 했다. 일 잘하는 상머슴이 일 년에 열섬 받았으니 상당한 고액 월급쟁이였다. 최 씨 집안에는 머슴들, 밥하는 식모, 이불 옷 빨래 수선을 하는 침모, 아기 돌보는 유모, 재정을 맡아보는 집사 등 여러 사람들이 일하고 있었다. 출근 며칠 후,최부자집 문 단칸방에 사는 삯바느질일, 침모 일을 하던 처녀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전형적인 순박한 농촌 농부였던 엄마에 비해,그녀는 세련되고 이목구비가 또렷해 갸름한 계란형의 미인형 얼굴이었다. 처녀는 자기 아버지를 콜레라로 잃고,모녀가 최 씨 집의 식모와 옷을 만드는 일을 문칸방에서 생활하며, 배를 안 굶을 정도로 침모살이를 하며 겨우겨우 살고 있었다. 물에 물 탄듯한 물렁물렁 여린 심성의 아버지를 끈질기게 유혹하였다. 최부자 집 대문에 붙은 그 방은 아버지가 드나들 때면 항시 열려 방안이 다 보였다. 그리고 때때로 나직한 청량한 목소리로 수심가가 흘러나왔다.
약사 뭉혼으로 행 유적이면 문전 석로가 반성사로구나 생각을 허니 님에 화용이 그리워 나 어이 할까요 강산 불변 재봉춘이요 님은 일거에 무소식이로구나 생각사 사로 세월 가는 것 등달아 나 어이 할까요 일락서산에 해 떨어지고 월출 동령에 저 달이 솟누나 원제 원제나 유정한 님을 만나여 백년동낙을 할거나
"애원하듯 떨며 천천히 조르듯이 떠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즉,혼이라도 꿈에 다녀간 흔적이 있으면 문 앞의 돌길이 반은 모래가 되겠다는 노래다. 어느 기생이 선비와 못 다 이룬 사랑을 노래했다는 이야기라고 전해지고 있다.
방문 앞에는 계절에 따라 매일 다른 꽃들이 화병에 꽂혀 있었다.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바느질을 하는 모습 하며,고운 노랫소리에 아버지는 끝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할머니에게,어머니가 아들을 못 낳는다는 핑계를 대며,후처를 얻어야 된다고 하자,할머니가 노발대발했다. 하나 아버지는 외동딸인 나 하나로 만족 못한다는 것이었다. 불행히도 그 당시에는 미개한 사회라 일부다처제를 인정하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 본처 외에 후처를 둔 첩 제도가 허용되던 시절이었다.
"이노무자슥아 니가 사람이가? 니가 살고 있는 것이 누구 덕인데,니처가 얼매나 마음씨가 고운 사람인데 니가 그럴 수가 있노? 앞으로 니를 자식으로 안 볼끼다"
아버지는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핑계를 들이대며,몇 달 할머니를 설득한 끝에,결국 아버지는 최부자집을 사이에 두고 코스모스길,십리 거리에 두 집살림을 시작하였다. 아버지는 서동 집에서 분가하여 면사무소가 있는 다른 집에서 또 다른 살림을 차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며칠씩 번갈아 가면서 이번은 서동, 다음번은 면소재지 새엄마 집에서 숙식했으나,점점 서동 엄마 집으로 오는 횟수가 줄더니,차츰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가 가끔씩 다녀갔다. 엄마의 얼굴에는 항상 수심이 가득하였다. 어느 날 솔나무 가지가 타닥타닥 소리 내며 타는 부엌 아궁이 앞에서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조용히 울먹이고 있었다. 엄마의 검은 눈동자에 흰점이 비치기 시작하더니, 시력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새엄마에게서 정말로 아들이 태어났다. 할머니가 속으로 기뻐했다. 어느 날 나에게 아버지는 남동생을 가끔 돌보고,학교도 코앞이니,새엄마 집으로 와서 학교를 다녀라고 했다. 새엄마 집에서는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어느 봄날,나는 마치 장날 팔려고 날개깃을 새끼줄로 묶어서 짐자전거 뒤 짐칸에 실어 놓은 암탉같이,아버지의 짐자전거 뒤에,책과 가방을 안고 짐칸에 올라탔다. 그렇게 엄마 집을 떠나게 되었다. 엄마는 애써 나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불쌍한 엄마를 두고 학교와 가깝다는 이유로 엄마와 할머니를 떠난다고 생각하니,어린 나였지만 말도 안 되는 이사였다. 엄마에게 얄팍한 이유로 배신감을 주는 그런 몹쓸 짓을 한 것이었다. 떠나는 어느 봄날 오후,눈이 점점 나빠진 엄마는 탱자나무길 담 모서리를 한 손으로 짚고서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고 찡그린 눈으로 혼자 그렇게 서 있었다. 비포장 신작로 길 위를 움직이기 시작하는 자전거 뒤 짐칸에서 뒤 돌아보았을 때, 엄마는 현기증이 나는지 담에 기대어 한복 치마저고리에 쪽진 머리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가끔 장날이면 엄마는 장터에 나를 데리고 가서 펄펄 끓는 가마솥에서 퍼 담은 국밥을 사 먹이고,학교 생활의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았다. 학교 교정 은행잎 떨어지는 나무 밑 벤치에서,마음고생이 심한 나의 헝클어진 머리 위의 머리핀을 매만지고, 새로 예쁘게 땋아 주면서 나직한 목소리로 단심가를 읊조렸다.
"내 안에 날 차마 버리지 못해 얼굴에 부딪히는 바람처럼 울었죠. 그댈 위해 나를 버리시는 게 하늘에 뜻이라도 난 원망하지 않아요. 부디 잊지 말아 줘요. 내 사랑보다 더 큰 세상 가졌으니,그대도 나처럼 눈물 흘리나요. 모든 게 다 꿈이었어요. 그대가 가야 할길 과 내가 가야 할 길이 서로 다름을 난 알았죠. 그대가 세상에 나와 같이 머무는 한 그대만이 소중한 사랑인걸 아시나요. 그대는 왜 나를 힘든 외로움 속에 가둬 두려 하나요. 바라만 본거죠. 가질 수 없는 사랑 그것마저 운명인가요. 나를 잊지 말아 줘요. 내 사랑보다 더 큰 세상 가졌으니 그대도 나처럼 눈물 흘리나요. 모든 게 다 허무해져요. 그대가 가야 할 길과 내가 가야 할 길이 서로 다름을 난 알았죠. 그대가 세상에 나와 같이 머무는 한 그대만이 소중한 사랑인걸 아시나요. 그댈 위해 나를 버리시는 게 하늘의 뜻이라도 그댈 원망하지 않아요."
엄마의 얼굴이 점점 여위어 갔다. 엄마가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불러 보라고 해서 나는 섬집 아기 노래를 불렀다.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엄마가 섬 그늘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파도가 데려다주는 그리운 엄마 품에 안기어 폭 안기어 잠드는 꿈을 꾸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봅니다." 노래를 다 부르고 엄마 목을 꼭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와,목이 마르다며 물을 마시러 분수대로 뛰어갔다가,일부러 운동장 한 바퀴를 돌고 와보니,엄마는 벌써 보이지 않았다.
새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아버지에게 이곳을 떠나 애들 공부를 위해서라도 큰 도회지로 떠나자고 조르기 시작하였다. 대구는 분지 형태의 도시라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 뜨거운 여름날에는 바람 한 점 안 불었고,겨울에는 도시 전체가 얼어붙는 도시였다. 엄마와 한번 멀어지기 시작한 엄마와의 물리적인 거리는 흐르는 세월 따라 점점 멀어져만 갔다. 엄마는 그 도시를 낯설어했고,친척 자식들 결혼식 등으로 어쩌다 오면 당일 밤차를 타고 다시 내려갔다. 새엄마는 겉으로는
"형님! 주무시고 가세요!"
라고 아양을 떨었지만 속마음은 달랐다. 아버지도 그러한 것 같았다. 그 도시의 거리를 걸을 때는 하얀 흰 고무신이 버선발에서 벗겨지고,차멀미가 난다며 가끔씩 휘청거리기도 했다. 그러면 쪽진 머리의 비녀를 다시 매만졌다. 엄마는 서쪽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는 서동,그곳이 좋다고 했다.
내가 그 도시에서 제일 공부 잘하는 아이들이 다니는 여자고등학교 입학하여,검은 치마에 흰띠가 다섯 줄씩 양쪽에난 교복을 입고 서동에 갔을 때 엄마는 무척 기뻐했다. 이학년 어느 날,아버지가 허둥지둥 시골에 빨리 내려가 보자고 했다. 전보가 왔다는 것이다. 친척들이 서동에 모여 살고,선산도 서동에 있어 선조들 제사상 차리기는 언제나 엄마 몫이었다. 엄마가 할머니 제사상 차리기 위해 떡방앗간에서,원동기의 힘을 떡가루 만드는 기계에 전달하기 위하여 피댓줄을 걸어서 돌리는데,그 피댓줄을 제대로 못 본 것이었다. 그곳에 옷이 걸려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쳐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면사무소 옆의 병원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친척 아주머니들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버지와 내가 병실에 들어서자,어머니는 간신히 의식을 차리고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선영이를 잘 부탁해요" 그것이 엄마가 남긴 마지막 남긴 말이었다. 엄마를 선산에 모시는 날 비가 몹시 도왔다. 땅도 울고 바람도 울고 하늘도 울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당연히 선산의 엄마 묘소 옆에 모셔졌다. 어색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집에는 나와 새엄마 그리고 점점 양아치 짓을 하는 이복 남동생,이렇게 셋이서 살게 되었다. 몇 년 후 새엄마가 죽자 문제가 생겼다. 새엄마를 화장 후 절의 극락전에 유골을 모시겠다고 하자 새엄마 친척들이 들고일어났다. 당연히 아버지 묘소 옆에 모셔야 한다고 벌떼같이 일어난 것이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엄마 친척이나,친가 쪽에서 한사코 반대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죽고 나서 까지 엄마를 괴롭힐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정리가 되었다. 새엄마는 극락전에 별도로 모셔졌다. 이번 주말에는 남편과 함께 섬진만 서동 선산에 모셔진 엄마와 아빠의 묘소를 둘러보기로 했다. 엄마는 아기 섬에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