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장마가 그친, 구름이 낀 어느 여름날 점심을 조금 지난 오후였다. 큰집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오늘은 검은곡에 버섯 따러 갈까?” 맑은 냇가 징검다리를 건너면 솔밭 소나무 밑에 봉긋봉긋 솟아있는 송이버섯, 싸리나무처럼 생긴 하얀 싸리버섯, 앙증맞게 생긴 자그마한 빠알간 버섯 등등 이야기해주시는 동안 어느새, 대나무 소쿠리는 금방 한가득 채워졌다.
큰집 풍각 할머니는 우리 집 식구들에게 내가 지은 별칭 '풍할매'로 통했다. 옆집에서 당신 집으로 놀러 온 어린 꼬마인 나를 앞세우고, 가벼운 산책길에 나섰다. 쫄랑쫄랑 어디든지 따라다닌다고, 만날 때면 “ 아이고 우리 강생이(강아지) !” 하며 나를 안아서 뒤로 돌려 엎고 다니며, 온 동네 어른들께 자랑을 했다. 나에게만 해당되었을까? 요즘 회자되는 말이 손주 자랑하려면, 파란 지폐 한 장은 내어 놓고 해야 한다고 하지 않나?
어느 겨울날, 옆 마을 잔치집에 나를 엎고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어느 집 담벼락에서 잠시 쉬다가 오줌을 뉘이고 난 후, 시원함에 몸을 떠는 나를 보고, 얼마나 귀여운지 나의 자그마한 주먹을 입속에다 쏙 넣어 보았단다. 다들 어려운 시절에, 우리 집이라고 예외였을까? 또, 세상만사가 “갈라 먹으면 감사되고, 얻어먹으면 어사 된다”라고 하시며, 인생살이의 지혜와 관대함에 대하여, 살아 있는 생생한 문구로 가르침을 주었다.
할머니와 나는 아주 좋은 단순하지만 마음이 통하는 이야기 벗, 텔레파시가 통했다. 때로는 나의 뒤쳐짐을 안타까운 마음에 응원해 주었고, 일제 강점기에 행방불명된 남편과 외동아들이 육이오 동란 때 전사한, 그 깊고 쓸쓸함과 외로움을 어린 나를 매개로 달래셨던가 보다. 그리고 할머니는 우리 집과 동네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셔서, 무슨 이야기든지, 이야기 밑천이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비슬산 기슭 너머의 청도에서 곱게 자라, 애바다로 시집을 오실 때, 처음 시집 온 곳은 지금의 동네보다 500미터쯤 더 북쪽으로 떨어진 야트막한 산기슭에 자리 잡았었다. 물이 하도 귀해 동네 이름이 애간장을 바다같이 많이 태우는 동네라고 해서 “애바다”였다. 높은 곳에 있는 밭을 맬 때, 물가까지는 한참의 거리라, 밭일에 목마를 때는 고무신에 오줌을 받아 마셨다는 곳이다.
애바다의 생활은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제일 큰 문제는 식수 조달이었다. 조그마한 마을 공동 우물에는 언제나 뱀들이 우글거렸다. 식수를 길으러 갈 적에는 항상 긴 막대를 하나 준비해야 했다. 우물물에 있는 뱀을 긴 막대로 휙 내던지고, 물을 길어야 했다. 물을 길어 물동이를 부엌에 내려놓으면, 언제 따라왔는지, 물뱀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고 한다,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어느 여름날, 갓난아기를 안방에 모기장 안에 재워 두고, 문을 살짝 열어 주고, 밭일 나갔던 아주머니가 돌아와 보니, 아기가 없어졌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여우는 말할 것도 없고, 늑대가 대낮에도 돌아다니는 정도였으니, 늑대가 물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차츰 지금의 아랫마을로 단체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낙동강 전선이 시시각각 위협을 받아 육이오 동란 중 피난길에 청도 고개를 아장아장 걸어 오르는 빨간 치마와 색동저고리를 입은 세 살 난 큰누나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두고두고 말씀하셨다. “빨간 치마를 입고 색동저고리를 입은 것이 어찌나 눈에 밟히든지, 이제 가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누나가 하도 새초롬하여 자주 놀렸다는 이야기는 길이길이 회자되었다. 하도 잘 토라져, “니 누고? 와이리 잘 삐끼노? ” 이러면 눈을 꼽추 세우고서는 ”와? 내, 삐꼼 사람이다. 와?” 그 삐꼼 사람이 지금은 손자들이 주렁주렁 달린 칠십 중반의 할머니가 되었다.
어린 내가, 뭔가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 눈물을 흘릴 때면, 눈높이로 옆에 앉아 눈물을 치마로 닦아 주거나, 등에 업고 마을 산책을 하던, 그런 기억이 이 글을 써게 만들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커서는 책보자기를 선물로 주셔서, 등에, 허리에 책을 싸서, 둘러 매고 등하교 길에 뛰어다니면 필통 속의 연필 지우게가 합창을 하던 그런 추억이 아닐까. 어느 날 책보자기를 잃어버리고 나서, 내가 얼마나 상심했던지! 그리고 할머니 집 대문에서 뛰어나오다가, 황소 머리에 머리를 부딪혀 쓰러진 나를 안고서는 오히려, 옆동네 소 주인을 큰소리로 나무랐다. “나무 동네 앞을 지날 적에는, 마, 소 고삐를 단디 잡고 댕기소!”하고 소 주인을 쏘아 부치며 나무랐다.
전후 얼마 후라, 국민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끼리, 마을 여기저기에, 방망이 수류탄, 총알, 탄창 등이 무수히 많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가 다치기도 하였다. 홍수 때는 널실대는 개울물에 몸을 던져, 낙동강 강가까지 헤엄치며 따라 내려가다가, 소용돌이에 빠져 겨우 빠져나온 무용을 자랑하기도 하였다. 자라면서, 씨름을 좋아해서, 옷의 어디엔가는 따져 있거나, 찢어져 있었다. “항상 몸조심하거래” 당부의 말씀은 꼭 따라다녔다.
어느 따뜻한 봄날 할머니랑 우리 집 식구가 리어카로 낙동강가에 소풍 겸 소먹이 풀을 잔뜩 베어 싣고 왔다. 시간이 갈수록 가을의 낙엽처럼, 할머니의 외로움과 쓸쓸함은 점점 깊어만 갔다.
"충절의 집"
할머니의 집 대문 문기둥에 어른 손바닥 두 장 크기의 양철판에 양각으로 새겨진 글씨다. 군대 간 하나뿐인 아들이 전사한 할머니 집에, 나라에서 붙여준 이름이다. 그리고 그 쓸쓸함과 외로움도 그 팻말에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원호청에서 다달이 약간의 위로금이 나왔지만, 그날은 더욱 외로움과 쓸쓸함이 마당 한 귀퉁이 우물의 깊이만큼이나 어두워졌다.
그러한 날은 검은곡에 있는 조그마한 밭에 갔다. 검은 계곡이란 이름처럼, 산의 음지 계곡에 있는 청석이 있는 거친 비옥하지 않은 밭이다. 그 밭에는 당신보다는 살아생전의 남편과 아들이 좋아하는 작물들이 계절에 따라, 옥수수, 부추, 완두콩, 참외, 수박등, 온갖 종류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었다. 손에 이끌려 간 내가 밭 옆에 개울가에서 청개구리, 참가재, 송사리, 메뚜기를 잡아 놓고 놀고 있으면, 밭 한 고랑을 메고 와서는 땀에 젖은 적삼을 벗어 놓고 가슴을 드러내고 찬물로 몸을 적시던 그런 곳이었다.
그리고는 긴 담배대에 풍년초 봉지에서 엽초 담배를 조금 꺼내어서, 엄지손톱 만한 곳에 올려놓고서 꾹꾹 채우고, 성냥불을 붙였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면서. 연기와 함께,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한 번은 참깨의 긴 고랑 밭의 김을 쭈그려 앉은 자세로 메고 있었단다. 고랑 끝 즈음에 왔을 때 앞이 조금 이상하여 고개를 들어 보니, 여우가 똥그란 눈을 떠고서 앞발을 들고 있었단다. 놀라 뒤로 나자빠져 정신을 잃으면, 여우가 가슴을 헤집고, 간을 꺼내 먹는다는 말이 있었다. 할머니는 아 글쎄, 순간적으로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젓가락 모양으로 만들어, 여우 두 눈을 푹 쑤셨단다. 여우는 깨갱깽깽 하면서 도망을 갔다고, 이런 말을 들려주셨다.
검은곡 가는 고갯길 옆에 상엿집이 있었다. 밤이면, 귀신 불이 돌아다녔다. 인근에 공동묘지가 있었다. 육이오 동란 중에 낙동강 전선에서 밀고 당기는 격전지가 되어 무수한 전사자가 생겨나 국군이고, 인민군이고 가리지 않고 묻혔다. 할머니는 아들의 낙동강 전선에서 전사란 통지받았을 뿐 시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장렬히 산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할머니에게는 그 공동묘지중의 하나에 아들이 묻혀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여 몇 달이고, 팻말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단다. 대부분이 무명용사의 묘지였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 윗목에는 언제나, 조그마한 나무 상위에 물그릇과 밥, 국, 그리고 여러 가지 과자, 특히 튀밥이 놓여 있었다. 아들과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리라. 그때는 차마 그런 생각을 못했다. 나는 내가 놀러 갈 때마다 나에게 줄려고 놓은, 나를 유혹하는 먹거리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집 마당은 항상 정갈하게 쓸려 있었고, 복숭아나무, 감나무 그리고 봉선화, 수선화, 모란은 할머니의 벗이었다. 서쪽으로 나있는 봉창문 쪽에는 무화가가 담에 기대어 자라고 있었다. 저녁이면, 귀뚜라미, 땅속 지렁이, 이름 모를 벌레들이 낮은 소리를 내며 울었다. 깊은 밤이면 조용히 소리 내어 우는 산고양이, 산에서 내려온 짐승들이 많았다.
세월은 흘러 머리에 하얀 서리가 내리고, 몸져눕는 일이 잦아들었다. 여름 방학 어느 날 오래간만에 방문한 나에게 주름 진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고 말씀하셨다.
"참 히안 하제.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집 마당에만 내렸더라" 할머니는 그것이 당신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들의 눈물이라고 생각하셨을까?
할머니는, 내가 도회지에서 공부할 때, 어느 날 조용히 여생을 마치셨다. 검은곡 당신이 외로울 때면, 가만히 가서 밭을 매시고, 적삼을 벗고 찬물로 몸을 깨끗이 씻은 다음 상념에 잠기시던, 그 밭 가장자리에 묻히셨다. 어느 사이에, 충절의 집 팻말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 삭막한 초 겨울에, 항상 온화하고 따스한 할머니 같은 사람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행운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직장일에 바쁜 아들 내외를 대신하여, 세 살짜리 손주 녀석을 세수시키고, 안 먹으려는 녀석 밥 억지로 몇 숟갈 떠 먹이고 어린이 집에 보냈다. 빈 도시락, 빈 간식 통, 기저귀, 손수건, 물통을 챙겨서 가방에 넣고 유모차에 태워서. 나의 현재의 수고로움은 이미 내가 받았던 할머니, 부모님의 노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조족지혈이다.
자식 키울 때는 정신없이 해쳐 나오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법칙을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가지며 손주 돌보면서 발견해 본다. 자식들에게는 세세하게 보살펴 봐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그래서 후세 사랑은 조건 없이 한 칸 건너뛰기로 표현되고 대물림된다고 하는가 보다. 징검다리 사랑이라고 할까? 미래 내 손주의 손주들, 우리 모두의 손주들도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어느새 절기상 대설이 지나가고, 곧 동지가 다가오고 한 해가 마무리된다. 풍 할머니 머리 위에 내렸던 하얀 백발도, 나의 머리 위에도 흠뻑 하얗게 내렸다. 코로나로 어려운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 모두에게 풍 할머니 같은 사랑이 듬뿍 내리기를 기원해 본다. 언제나 어김없이 수고하시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