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파동 그리고 미디엄 인간
글을 쓰기 전, 주변을 정리하는 건 의도하지 않은 의식이 만들어 낸 습관 중 하나다. 예전에 학생일 때 시험공부를 하기 전, 책상을 정리했던 것처럼 간단하고 잡생각이 사라지는 가벼운 노동은 무언가를 집중하기 전에 하면 좋은 효과가 생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인데, 그 노동을 의식적으로 하다 보면 내가 쓰려는 게 좀 더 구체화되는 바라던 순간이 찾아온다.
나는 어김없이 주변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수건을 끌어 모아 빨래 바구니에 던져 넣고, 환기를 하며 집을 왔다 갔다 불안한 사람처럼 청소하고 다닌다. 돌아다니다 눈에 영양제가 보이면 닥치는 대로 먹기도 하고, 벽에 고정해 놓은 철봉에 갑자기 매달리기도 한다, 그러다 목이 말라 책상에 물을 떠 놓으니 떡하니 혼자 놓여 있는 물 잔이 조금 처량해 보여 서랍에서 컵받침을 찾는 나를 다른 의식의 내가 보고 조금 한심해한다. 그래서 지금은 찾은 컵받침 위에 컵을 올려두고 가벼운 엉덩이를 의자에 내려놓아 마음을 먹고 타자를 치는 중이다.
난 무언가를 뱉고 싶어 한다. 혹은 무언가를 흡수하고 싶어 한다. 내 마음속에 많은 것이 떠다닌다. 그리고 그중에 하나를 건지기 위해 열심히 낚시질을 하고 있다. 진짜 낚시처럼 이건 혼자만의 싸움이기 때문에 절대 아무도 도와줄 수가 없다. 내 마음속 호수인지 냇물인지 모를 작은 웅덩이의 표면은 너무나 고요하고 물의 동그란 파동조차 없다. 하지만 난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쓰고 싶다.
이번 연도 내가 집착했던 게 있다는 걸 고백한다. 맥시멀리스트인 내가 미니멀을 성공시키기 위해 갖가지 노력과 집념을 보여온 것이다. 그래서 성공했느냐. 당연히 원래 맥시멀리스트인 나이기에 실패했다. 노력을 넘어서서 사람 자체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처음에 안 쓰는 걸 나누어주고 너무 낡은 건 버리고 하는 그 과정과 점점 가벼워져가는 나의 옷장과 방을 보며 뿌듯했던 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과도기적인 부분이 없어지자 나는 갑자기 너무나도 허전해졌고 내 영혼이, 조금은 형채가 있고 진했던 영혼이 투명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캐스퍼!) 방에 오면 설명할 수 없는 허탈감과 허무함이 나를 덮쳤고, 나는 맥시멀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인가 하며 좌절했다.
그런 날들이 꽤 오래 지속되었고, 반복되었다.
그러다 올해 그렇게 뜨거웠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왔다. (그렇다 아직 가을인 것이다) 저녁에 제법 쌀쌀해져 노루를 산책하기 좋은 온도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노루를 데리고 밤 산책을 자주 나갔는데, 어둡지만 뭔가 포근한 가을밤, 입은 잠바 위를 맴도는 차가운 온도가 기분 좋다고 느꼈을 때, 미니멀도 아니고 맥시멀도 아닌 ‘미디엄’의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디엄’ 리스트
뭔가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지는 이름이다. 극과 극이 아닌 딱 중간의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굳이 과녁의 중간을 맞출 필요는 없다. 화살을 날린 것이 중요하지. 그 화살이 중간이 아닌 곳에 맞더라도 동그란 과녁은 모두 과녘인 것이다. 나는 맥시멀이었다가 미디엄이 되었고 그건 커다란 변화였다. 나는 어찌 되었든 화살을 날린 것이다. 내 손으로 당겨서 말이다.
말이 너무 거창하지만, 그냥 ‘물건을 버렸는데 너무 허탈했다’를 조금 있어 보이게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가장 나중에 정리한 것은 책이었다. 우선순위를 매기기도 힘들었고, 버리기도 쉽지 않은 물건이었다. 하지만 자리도 많이 차지하고 모이면 무겁기도 해서 꼭 해야 하는 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래서 꽤 많은 도서를 버렸는데, 지금은 버린 책 중 기억나는 후회되는 책들도 꽤 많다. 역시 많은 생각을 하고 버렸어야 했나 보다. 나름 15년은 고민한 것 같은데 더 고민했어야 했다. 일단 안 읽은 책들 중 나중에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버렸고, 읽은 책들 중에서는 더 이상 나를 두근거리게 하지 않는 내용이나 작가의 책들을 버렸다. (내가 유일하게 백 프로 남겨둔 건 ‘헤르만 헤세’와 ‘하루키’와 ‘정세랑’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스다 미리’이다. 나의 좁디좁은 독서의 폭이여) 대신 현존하는 새로운 책들을 꽂을 자리가 많이 생겼으니 그 빈자리를 보며 파이팅을 외쳤다. 혼자만 알 수 있고, 이루더라도 혼자만 느낄 수 있는 이런 짓거리를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 타고난 오타쿠 기질이 있는 사람인 거다. 나는.
나는 올해 화살을 날렸고 물 위의 파동과 닮은 과녁의 어중간한 위치에 얼추 맞았다. 하지만 그 큰 원 모두 과녁이고 화살은 어디든 꽂힐 자격이 있기에 어중간하다고 슬퍼하지 않는다. 미디엄의 인간, 나는 그런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라 꽤 마음에 든다.
23.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