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당일치기 : 강릉편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여행병’은 온다. 나의 ‘여행병’은 5년 전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주에 갑자기 왔다. 아무 예고도, 거리낌도 없이. 그렇게 찾아왔다.
그렇다고 여행을 싫어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태어난 김에 세계 일주>처럼 여행예능이나 여행에 관련된 영화, 드라마도 좋아해 자주 보았다. 볼 때는 떠나고 싶지만 화면에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 끝이 나면 그 마음도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10월의 날씨는 너무나 맑았고, 하늘은 청명했다. 바닥에 떨어진 낙엽들은 모두 자신만의 색으로 빛내며 가을이 왔다고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서늘한 공기마저도 이 풍경과 어우러져 사랑스럽게만 느껴졌다. 내 마음보다는 몸이 먼저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주에 난 자주 걷고, 자주 바깥 풍경을 훔쳐보았다. 여름과 겨울의 사이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그 풍경은 시시각각 자주 변화시키며 나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금요일 낮까지도 나는 ‘여행병’이 다시 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여행프로그램을 보고 끝나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렇게 지금 이 순간의 갈망도 곧 사라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회사를 퇴근하고 나오니 하늘은 너무나 파랬고, 낙엽의 향기가 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도 쓸쓸함보단 여유로움이 가득했고, 그 모습을 보니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중간에 들른 집 앞 카페에서 핸드드립 커피를 한 잔 시켰다. 시킨 커피까지 너무 맛있어서 나는 정말 어쩔 줄 몰랐다. 높은 하늘, 화려한 낙엽들, 맛있는 커피가 한대 어우러져 이 시간을 빛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금요일이었다. 결국 결심했다. 떠나기로.
나의 목적지는 막연히 바다를 생각했고, 단순하게 ‘바다면 동해지’라고 생각하며 강릉으로 정해졌다 나를 여행지로 민 건 다름 아닌 가을 그 자체였다.
혼자 여행하는 걸 좋아해서 이번 여행도 혼자 당일치기로 떠나기로 하였다. 버스를 예매하고 몇 가지만 정하고 그다음 날, 토요일 아침에 떠났다. 수원에서 강릉까지는 차도 막혀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도착하자마자 배가 고파 일단 ‘장칼국수’를 먹기 위해 걸었다. 수원은 날씨가 쨍했지만 강릉은 곧 비가 올 것처럼 흐렸다. 장칼국수를 먹기 딱 좋은 날씨인 것이다. 걷기 시작하자 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실감 났다.
20분 정도 걸어서 장칼국수집에서 장칼국수를 먹고 그 주변에 있는 동네책방에 들렀다. 바다를 보며 읽을 책과 책을 좋아하는 소중한 분에게 줄 선물도 (선물도 책) 샀다. 언제나 동네를 지키고 있는 책방에서 책을 사면 기분이 무척 고양된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한 100번은 응원하게 된다. 다행히 손님은 많았고 나는 두 권의 책을 얼른 골라 바다로 향했다. 가방은 무거웠지만 마음은 그만큼 가벼워지고 있었다.
대중교통이 여의치 않아 (책방 사장님께 여쭤보니 버스 배차 간격이 길다고 설명해 주셨다) 택시로 ‘안목해변’까지 이동했다. 강릉에 왔으니 맛있는 핸드드립 한 잔이 꼭 먹고 싶었다. 안목해변으로 가는 길 반대편 차도에 차들이 엄청 밀려 있었다. 택시기사님은 가을이면 산으로 가야지 바다로 오냐고 갸우뚱하셨다. 그래서 내가 ‘가을바다를 보러 온 거 아닐까요’라고 하자 ‘아! 가을바다’라고 뭔가 깨닫는 듯한 반응을 하셨다. 혼자 여행온 나를 신기하게 보시며 카페 거리까지 친절하게 데려다주셨다.
카페들과 해변 사이를 걷자 강릉에 온 게 너무나 실감 났다. ‘오길 잘했다’란 생각이 백 번 정도 들었던 것 같다. 날은 흐렸지만 주말이라 사람들은 많았다. 여행지에 오니 사람들이 많은 것도 괜히 더 좋아 보였다. 많은 카페들 중 하나를 골라 산미가 있는 핸드드립을 시키고, 소금빵도 하나 시켜 자리에 앉아 아까 책방에서 사 온 백수린작가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었다. 제목부터가 너무 지금과 어우러져 나는 정말 아주 오랜만에 행복한 느낌을 받았다.
책은 집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집을 떠나 여행지에서 읽다 보니 나의 집이 그리워졌다. 나에게 여행은 원래 있던 곳을 그리워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기 위해 떠나는 것이었다. 그게 갑자기 생각났다. 지겨운 것과 소중한 것은 한 끗 차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가짐, 자세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어렵기도 하다. 그래서 나를 있는 힘껏 몰아 부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 중 하나가 나에게는 여행이다. 고단한 여행을 다녀와 내 방 침대에 누우며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는 과정까지가 나의 여행인 거다.
가을바다라고 단정 짓고 떠난 건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니 가을 바다를 본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봄바다, 여름바다, 겨울바다는 다 본 것 같은데 가을 바다는 왜 한 번도 못 봤을까? 서른여섯 인 나에게도 이렇게 처음이 있다는 것이 기쁘고 반가웠다. 그리고 내가 본 바다 중 가을바다는 정말 최고였다. 깊은 파란색의 바다는 우리를 삼킬 듯이 짙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아끼고 아껴 놓은 것을 온전히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아찔해졌다. 그 짙은 빛은 뭔가에 대한 그리움을 닮아 있었다. 아마 여름에 대한 그리움이겠지. 하지만 겨울을 준비하는 듯한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파도소리를 들으며 생명의 도약을 배울 수 있었다.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하는 모습을 보며 인간으로서 자연히 가지게 되는 자연에 대한 경건함을 겸허히 받아들인다.
나에게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앞으로 나아가는 준비자세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바다에 동동 떠있는 것 같은 부유하는 마음으로 살 것인가. 파도의 하나쯤이 되어 백사장에 내 몸을 부딪치며 앞으로의 계절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살 것인가. 나는 오래도록 가을 바다를 보며 백사장을 걷고 또 걷는다.
23.1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