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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22. 2020

플라이트 플랜

“인생은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자가용 면장을 취득하면 더 이상 ‘학생’ 신분이 아니다. student pilot에서 student를 뗀 pilot이다. 그때부턴 교관 없이 혼자서 비행할 수 있다. 비행시간을 쌓으려고 학교가 위치한 리버사이드 공항에서 두세 시간 떨어진 다른 공항으로 왕복 비행을 하는데 그때마다 플라이트 플랜을 짜서 제출해야 한다.


플라이트 플랜(비행계획서)
: 출발 공항과 목적지 공항까지의 거리와 운항 속도, 연료 양 등 각종 비행 정보를 담은 일종의 필수 서류. 조종사가 직접 계산해서 플라이트 플랜을 비행 전에 제출해야 한다.


비행기의 현재 위치와 진행 방향을 알려주는 포어 플라이트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나 관제 교신이 끊어졌을 경우를 대비해 비행을 마치고 30분이 지나도 이 플라이트 플랜을 종료하지 않으면 항공당국의 수색이 시작된다. 과거엔 조종사가 일일이 해당 정보를 측정해 수기로 적어 냈다. 요즘에는 비행기 기종과 출발 공항, 목적지 공항, 순항고도 등 간단한 정보만 입력하면 포어 플라이트란 똘똘한 프로그램이 알아서 거리와 예상 시간, 순항 속도, 구간 별로 남은 연료까지 계산해서 보여준다, 내 주변으로 날고 있는 비행기 정보까지 보여주는 내비게이션이다. 목적지 공항까지 내가 일직선으로 가고 있는지 갈지자로 가고 있는지 정확히 화면에 보여주기 때문에 내 비행 상황 정확히 알 수 있다.


우리 인생을 예측해 정확히 알려주는 포어 플라이트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필요한 기간을 입력하면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서 보여주는 그런 인생 내비게이션 말이다. 물론 비행을 하다 새 떼와 충돌해 부품 일부가 떨어져 나간다던지 계기나 엔진이 고장이 나는 등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가까운 공항으로 우회해 비상 착륙을 해야 한다. 이건 포어 플라이트가 결정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조종사의 몫이다. 마찬가지로 살다 보면 인생 계획을 수정하거나 취소하고 그때 상황에 맞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의 몫이다.


포어 플라이트 보면서 비행하는 모습

자가용 면장을 따고 한창 타임빌딩을 하던 때 연료가 애매해서 플라이트 플랜을 수정해 공항을 바꿔 착륙한 경험이 있다. 처음 가본 낯선 공항이다 보니 두려움이 앞섰다. 연료를 채우는 동안 공항 주변을 돌아봤는데 눈송이 같은 하얀 솜들이 노랗게 익은 풀들 사이로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자세히 보니 공항 주변이 온통 목화밭이었다. 그 모습이 얼마나 평화롭던지 연료를 다 채우고도 한참 동안 그 풍경을 즐기느라 공항을 떠나지 못했다.


세상에 잘못된 길은 없다. 새로운 길만 있을 뿐. 설령 낯선 길로 돌아가더라도 새로운 것을 보고 느끼고 즐긴다면 그것으로도 이미 충분히 가치 있는 시간이 아닐까. 기대하지 않고 우연하게 겪게 된 일련의 시간들이 의도치 않은 보상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나는 비행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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