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준영 Jul 24. 2020

 Yes, sir!

“기술보다 인성부터”

릭은 계기비행 책임 교관이었다. 정확히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짐작하건대 6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추정됐다. 그는 이혼 후 전 부인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위자료로 준 뒤 도베르만 한 마리를 키우며 학교에서 제공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학교에 처음 들어왔을 때 다른 한국 학생들로부터 그에 대한 정보를 꽤 들었다. 릭이 존경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국, 대만, 태국 등 아시아 학생들은 언제나 그를 “sir”하고 부른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치프 교관인 랜든에게도 sir을 붙이지 않았다. 계기 과정을 시작하면서 나 역시 그에게 sir 하고 불렀다. 그는 누구보다 비행하기를 귀찮아했다. 게으른 성격 탓에 비행을 피했다. 처음엔 비행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중에 그와 계기 평가 비행을 나갔을 때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비행 내내 연신 “히호”하며 괴상한 소리를 질러댔다. 나이 60 넘어 그런 감탄사를 학생 앞에서 내뱉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나는 그날 비행을 진심으로 즐기는 릭을 봤다. 정말 행복해 보였다. 


릭의 평가 대기 리스트

언제나 그랬듯 그는 날씨 핑계 탓을 늘어놓으며 비행을 꺼렸다. 그와 비행 한번 나가려면 상당한 기다림이 필요했다. 학교 계기비행 평가관은 릭이 유일했다. 그가 평가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다 보니 대기 리스트에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적체 현상이 빚어졌다. 심할 땐 한번 비행하는데 2주씩이나 기다려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나도 일주일을 기다리다 첫 평가를 보게 됐다. 그날 아침 릭이 날 불러 말했다.

 

“준, 가서 날씨 알아보고 프리플라이트하고 있어.”

“예썰!”


웬일로 그가 별다른 핑계 없이 금방 비행 나갈 듯 말하자 나는 한껏 들떴다. 기상 예보관에게 날씨를 확인하고 웨이트 앤 밸런스를 작성한 뒤 프리 플라이트까지 모두 끝냈다. 비행 예정 시간이 10시였는데 10시가 넘어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도 코빼기가 보이지 않자 나는 교관 사무실에 직접 가서 그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이 날 붙잡고 서로 말렸다.


웨이트 앤 밸런스(Weight and balance)
: 운항 전 항공기 내 화물과 승객, 연료 등의 무게를 계산하여 중량 한계(weight limit)를 초과하지 않는지 파악하고 항공기 균형이 제한치(CG limit)를 벗어나지 않는가를 계산하는 것.



웨이트 앤 밸런스 BE-76

“준, 가지 마. 릭 할아버지는 보채는 거 정말 싫어해.”

“응. 너 지금 가면 네가 아무리 비행을 잘해도 무조건 탈락이야.”

“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릭이 원래 그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허둥댔다. 하는 수 없이 앉아서 계속 기다리기로 했지만 답답했다. 두 시간이 흘러 12시가 돼서야 릭은 교실로 찾아와 내게 변명을 했다.


“오전에 너무 컨디션이 안 좋았어. 미안해. 점심 먹고 와서 오후에 비행 가자.”

“예썰!”   


화가 났다. 불평을 늘어놓으며 학교 친구들과 공항 인근의 한 쇼핑몰에 가서 햄버거로 대충 끼니를 때우고 학교로 돌아왔다. 약속한 비행시간은 1시였지만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1시 반쯤 릭이 밖에서 밥과 농담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약속시간을 확인시켜주려고 복도로 나왔다. 그런데 그는 날 보고는 아무 말 없이 얼른 사무실로 들어가 버렸다.

 

“썸 타는 남녀처럼 밀당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 상황이야?”


얼마 전 릭의 계기비행 테스트를 통과하고 사업용 과정을 시작한 J가 이 상황을 지켜보고 말했다.


“형. 기다려요. 기다리면 복이 옵니다.”

“아니 아무리 기다려도 그렇지. 이건 아니잖아요.”

“릭은 원래 그런 사람이에요.”


화창한 날씨에 비행을 안 하고 멍하니 교실 안에서 그를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사실에 짜증 났다. 


‘이럴 것 같았으면 오전에 크로스컨트리 비행이나 다녀올걸.’


대략 3시 반쯤이 지났을 때 릭은 내가 있던 교실로 얼굴을 내밀었다. 학생들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다 교실 안쪽 구석에 앉아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미안해. 안에서 행정 서류 챙기다 보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다음에 비행하자. 지금 집으로 이륙(take-off) 해도 돼.”

“예썰!”


역시나 예우를 갖춰서 대답했지만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집으로 테이크 오프(이륙) 해도 된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그냥 기다리지 말고 집에 가란 소리죠.”


옆에 있던 S가 대답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허탈함에 헛웃음을 쳤다. 아침부터 그와 비행하기만을 기다렸는데 온종일 대기만 하다가 그냥 집으로 가란 말을 내뱉는 무책임한 그가 미웠다. 화창했던 하루를 통째로 날려버린 생각에 화가 났다. 다음날 릭은 학교에 오자마자 날 찾았다. 결국 그와 비행을 나갔고 첫 스테이지 평가에서 한 번에 통과했다.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왜 J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이 릭을 기다리라고 한 지 이해했다. 비행을 하면서 그는 평가한다기보다 학생의 비행을 유심히 관찰한 뒤 문제점을 지적하고 고쳐주려고 했다. 나는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썰”을 외쳤고 호응했다. 전날 컨디션이 안 좋아 비행을 안 한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릭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랜 기다림 끝에 릭과 평가 비행을 나가는 모습


유독 김치를 좋아한다던 그의 말에 김치를 선물해 준 한국 학생이 있었는데 그 역시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불평등하다고 생각될 수 있지만 어쨌거나 미국도, 학교도 다 사람들이 모여 지내는 곳이니까 기본적인 예절과 매너는 중요했다. 인성이란 게 실력만큼 중요하단 생각을 부쩍 하게 됐다. 예절 아닌 ‘예썰’을 좋아하던 릭 역시 학생들에게 기술보다 조종사로서의 인성을 먼저 가르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자가용 면장과 계기 자격, 사업용 면장을 취득하기 위해선 각각 3번의 학과시험과 비행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학과 시험에 대비한 학교 수업은 대략 2~3주씩 소요됐는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7시간가량 진행됐다. 미국의 한 대형 항공사에서 오랫동안 기장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밥이 세 개의 이론수업을 모두 맡아 진행했다. 밥은 어딘가 몸이 불편하고 건강이 쇠약해 보였다. 그는 이런저런 약이 가득 담긴 흰색 봉투를 늘 들고 다녔는데 나이 때가 비슷한 릭에게 가끔씩 약을 나눠주기도 했다.

40년 경력의 베테랑 조종사 밥

밥은 말을 상당히 천천히 했다. 또 귀가 잘 안 들리는지 학생들의 질문에 두 번 이상 물어보기도 했다. 대만인 룸메이트와 가끔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눴는데 우리가 만약 항공사에 들어가서 비행을 오래 하면 밥처럼 건강을 잃게 되는 것 아니냐며 우려의 대화를 나눴다. 실제로 북극항로를 지나는 국내 항공사 승무원들의 우주방사선 노출로 인한 피폭 심각성이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되고 있다. 승무원들 가운데 암이나 백혈병, 희귀병에 걸리는 사례가 보고되면서 발병과 피폭의 관련 및 보상 여부를 두고 업계와 의학계에선 여전히 논쟁 중이다.


느긋하고 차분한 성격 탓에 밥은 제 시간 안에 수업을 못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의 반발은 심했다. 특히 강의를 진행하다가 자신이 항공사 조종사로 근무하며 겪었던 일과 연관되는 주제가 하나라도 나오면 밥은 수업을 중단한 채 학생들에게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했다. 본인 스스로 몰입하다 보니 얘기는 언제나 길어졌고 정해진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주말 보강수업이 잡혔고 학생들은 싫어했다. 나는 밥의 이야기에 푹 빠져 들었다. 수업 내용보다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가 훨씬 더 재밌었다. 9.11 테러 당시 미국의 모든 공항이 셧다운 되면서 텍사스 공항에 발 묶여 며칠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의 아시아나항공 착륙사고 조사 뒷이야기 등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생생한 스토리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조종사로 40년을 살아왔으니 어쩌면 그는 땅보다 하늘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밥은 가까운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늘 부드러운 말투에 얼굴엔 온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권위 의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의 모습에 진정한 베테랑의 여유를 느꼈다.



이전 17화 Keep scanning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