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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영 Jul 24. 2020

베테랑 조종사

“선배로부터 배워라”

자가용 면장과 계기 자격, 사업용 면장을 취득하기 위해선 각각 3번의 학과시험과 비행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학과 시험에 대비한 학교 수업은 대략 2~3주씩 소요됐는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7시간가량 진행됐다. 미국의 한 대형 항공사에서 오랫동안 기장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한 밥이 세 개의 이론수업을 모두 맡아 진행했다. 밥은 어딘가 몸이 불편하고 건강이 쇠약해 보였다. 그는 이런저런 약이 가득 담긴 흰색 봉투를 늘 들고 다녔는데 나이 때가 비슷한 릭에게 가끔씩 약을 나눠주기도 했다.

40년 경력의 베테랑 조종사 밥

밥은 말을 상당히 천천히 했다. 또 귀가 잘 안 들리는지 학생들의 질문에 두 번 이상 물어보기도 했다. 대만인 룸메이트와 가끔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눴는데 우리가 만약 항공사에 들어가서 비행을 오래 하면 밥처럼 건강을 잃게 되는 것 아니냐며 우려의 대화를 나눴다. 실제로 북극항로를 지나는 국내 항공사 승무원들의 우주방사선 노출로 인한 피폭 심각성이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되고 있다. 승무원들 가운데 암이나 백혈병, 희귀병에 걸리는 사례가 보고되면서 발병과 피폭의 관련 및 보상 여부를 두고 업계와 의학계에선 여전히 논쟁 중이다.


느긋하고 차분한 성격 탓에 밥은 제 시간 안에 수업을 못 끝내는 경우가 많았다. 학생들의 반발은 심했다. 특히 강의를 진행하다가 자신이 항공사 조종사로 근무하며 겪었던 일과 연관되는 주제가 하나라도 나오면 밥은 수업을 중단한 채 학생들에게 에피소드를 들려주곤 했다. 본인 스스로 몰입하다 보니 얘기는 언제나 길어졌고 정해진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주말 보강수업이 잡혔고 학생들은 싫어했다. 나는 밥의 이야기에 푹 빠져 들었다. 수업 내용보다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가 훨씬 더 재밌었다. 9.11 테러 당시 미국의 모든 공항이 셧다운 되면서 텍사스 공항에 발 묶여 며칠간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미국 연방교통안전위원회의 아시아나항공 착륙사고 조사 뒷이야기 등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생생한 스토리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조종사로 40년을 살아왔으니 어쩌면 그는 땅보다 하늘이 더 편할지도 모르겠다. 밥은 가까운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늘 부드러운 말투에 얼굴엔 온화한 표정을 머금고 있었다. 권위 의식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의 모습에 진정한 베테랑의 여유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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