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흰 화면 위로 깜박이는 커서를 바라봅니다. 2월이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정말로 바빴습니다. 가만히 앉아 하루를 정리할 기회가 쉽게 생기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일찍 나와서 잔뜩 일들을 처리합니다! 미팅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짧은 이야기를 남깁니다. 제목이 자극적이라고요? 네. 엄청 자극적으로 써봤습니다. 매운맛 포스팅.
나는 신기하게도 남자와 여자 친구의 비중이 5:5 정도로 인구 구성비에 거의 차이가 없다. 어느정도 나이가 들며 사람들의 인맥이 동성 친구 위주로 정리되는 것이 일반적임에 비하면, 제법 특별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남자가 많은 셈이지. 특히 30대가 되며 같이 일 얘기를 하는 친구들을 동성으로만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금 하려는 이야기는 그 남녀의 비중 문제가 아니고...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친구’라는 호칭을 쓴 데는 그 이유가 있다. 단지 업무적으로나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아는 사람(acquaintance)’ 수준 말고, 정말 둘이 커피 한 잔 놓고도 두세시간 온갖 주제로 수다 떨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나의 사람에 대한 취향이 반영되고, 장기간에 걸친 사상 검증(?)이 이뤄진 사람들 이야기다. 나와 비슷한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선뜻 동의하기 힘든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남의 삶에 감 놓아라 배 놓아라 하는 진심 어린 오지랖을 피해, 마음대로 이야기하고 싶다.
친구라고 할만한 내 사람들의 절반은 남자, 절반은 여자인데 성별의 차이가 확연하다. YOLO가 청춘의 프로파간다인 세상에서, 결혼이나 육아에 적극적인 사람은 성별을 불문하고 사실 드물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남자들의 절반은 유부남인데다가, 그것도 상당히 가정적인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은 – 어디 한 번 계산해 보자 – 정말 95%는(!!!!) 출산은커녕 결혼조차 하지 않은 싱글들이다. 남자친구들이 거의 절반은 결혼한 가정적인 성향들인 데 비하면, 여자친구들은 극단적으로 편향된 집단인 셈이다.
내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나와 성격이 비슷하고 죽이 잘 맞는 여자 친구들은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나랑 비슷한 여자들이라고 함은 (1) 자기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2) 전부 일을 하고 있고 (고용된 형태든, 자기 사업을 하든 그냥 쉬는 사람은 없었다) (3) 마음껏 인생을 즐기고 싶은 성향의 사람들에 한정해 보겠다. 이 사랑하는 친구들은 나의 결혼 발표에 기뻐하면서도 조심스러웠다. 결혼으로 인해 흔히 잃을 것으로 생각되는 여자의 개인적 삶에 대한 우려는 꽤나 타당해 보였다. “이제 명절에 연휴 붙여서 해외여행 가던 시절은 다 지나갈걸. 일 년이 가족 행사로 꽉 차여져 있다더라.”라는 둥 뭐 그런 사소한 걱정들.
아기를 낳을 때는 더 심했다. (차마 나에게 말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만) “아기 낳고 일 하다가도 결국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 두게 되더라,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라던데..”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살가운 친구들이 나를 살피며 꺼낸 조심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내 기분이 혹시나 상할까 머뭇거리는 배려와 진정으로 악의 없는 감정이 느껴져서 ‘남’들의 참견처럼 불편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뭘 말하고 싶은지 이미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니까. 생각해 보니 더 소탈하게 “결혼하지 마!!!”라는 친구도 있었네, 나는 깔깔 웃었었다. 사실 우리는 모두 불투명한 미래를 마주하고 있었고, 나는 그 외침이 경쾌하게 들려서 한편으로는 좋았다. 그 때 다짐했다. 내가 결혼과 임신과 출산의 잔다르크가 될게. 진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직접 보여줄게! 하고.
내 신념은 확고했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결코 없다는 확신. 모두가 ‘이러하다’고 믿는 부분은 그 자체로 맹점이 있다. 다들 결혼하면 여자가 ‘사회적으로’ 잃는 것이 많다고 하는데 분명 샛길이 있을거야.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그리고 생각보다 그 길이 멋진 길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이유는 묻지 마시라. 그냥 나라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반항심 가득하며, 장점이라고는 낙관적인 전망으로 꽉 찬 성격이니까. 결혼도, 출산도 나를 잃는 여정이 아니라 나를 더 발견하고 삶의 폭을 키우는 일이 될 것이라는 당돌한 자신감과 막연한 확신, 희망이 가득했다.
평일 저녁 – 샴페인이나 잔뜩 마시러 가자고 같은 업계에서 일하는 친구를 불렀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이내 취기가 오르자 그녀는 나를 보고 “네 덕에 두려움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내 여자친구들은 대부분 싱글이지만 그 중에 일부는 사실 결혼도 원하고, 아기도 원한다. 다만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을 때 스스로를 잃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샤이 엄마'로, 그 마음을 쉽사리 내비치지 못하고 지내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그녀의 말이 그렇게 좋았다. 진심으로 기뻤다. "결혼을 하면, 아기를 낳고 나면 여자의 삶이 엉망이 되기 십상이라는 말만 듣다가, 네가 예전과 다름없이 일하고 – 심지어 아기의 미소에 행복해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모습을 보고 정말 힘이 되었다"라며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아기를 너무 좋아하는데 커리어 때문에 미뤄뒀던 것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던 마음에 이제 진짜 용기가 난다고 한다. 진심으로 기뻤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게 이것이지. 삶은 희생이나 교환, 유예의 대상이 아니야. 더 열심히, 더 사랑하며 살수록 더 풍부해지는 거야.
어떻게 커리어의 유지와 남편과 행복한 결혼생활, 아기를 낳고 기르는 것이 동시에 가능한가? 정말 바닥까지 냉정하게 현실적인 이야기로 넘어가 보자.
아기를 키우면서 스스로의 커리어에 집중하며 좋은 성과를 내려면 어느정도 아기 양육에 대해서 외주(?)를 줄 수밖에 없다. 이상한 워딩이지만 아기를 전문 인력 (베이비시터)에 맡기는 것이 외주지 뭐야.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는 예산상의 이슈, 둘째는 감정적인 이슈.
우선 예산 이야기부터 해 보자. 전적으로 아기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좋은 베이비시터(aka 이모님)를 만나는 것은 여러 번의 시행착오와 ‘합을 맞추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차치하더라도, 매 월 상당한 금액을 월급으로 지출하며 시터를 쓰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라는 고민을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100을 버는데 시터가 100을 가져간다면? 내가 90을 버는데 시터가 100을 가져간다면? (사실 그런 경우는 드물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의 몸값은 시터보다 대체로 높다.) 내가 밖에서 고생하며 일하고 번 돈을 고스란히 시터가 가져가는 상황이 심각하게 불합리하게 여겨진다면 시터를 쓰지 않기로 ‘결정’하게 될 것이다. 명백히 스스로의 “선택”이다. 그럼 본인이 시터에 지출하지 않고 커리어를 양보해서 아기를 키우면 된다. 그게 더 만족스럽다고 결정하면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일 해서 워킹맘으로 100을 벌고 시터에게 100을 지출함으로써 가정 경제에 0의 효과를 주는 것과, 아예 소득이 없는 전업주부가 됨으로써 0의 효과를 주는 것이 ‘단순히 cash flow의 관점에서는’ 동일하다.
한편 월급과 시터를 맞바꾼다고 할지언정 5년, 10년, 15년…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경력을 유지하며 본인의 커리어를 유지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오직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물론 이건 본인이 별로 월급이 크지 않아 시터와 임금이 동일한 경우를 가장 비관적으로 가정한 것이고, 엄마의 벌이가 100이 아닌 200, 300, 1000이라면 시터에게 100을 지출하는 것의 부담은 훨씬 덜해질 것이겠지. 여기에 커리어를 유지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엄마의 감정적인 상태를 고려한다면? 더더욱 다른 가치들이 더해진다. 내가 더 많이 벌고, 내가 더 즐겁게 일하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며 장기적으로 끊김 없는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다면 고민 없이 시터를 쓰는 것이 좋다. 이것도 본인 성향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질문했을 때, 그 가치가 더 크면 충분히 선택할만한 옵션이다.
두 번째 이슈인 감정적인 부분도 생각해 보자. 여기엔 산술적으로 명백하게 계산 가능한 예산 이슈보다 좀 더 복잡한 차원의 문제가 얽혀 있다. ‘절대적인 시간의 가치’에 대한 관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는 열 시간의 피곤하고 무기력한 시간보다 한 시간의 집약적이며 강렬하고 즐거운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면 아기와 최소 3시간동안 안고 놀아준다. 주말은 온전히 아이와 추억을 만든다. 가슴이 터질 듯 꽉 안아주고 하늘로 던지고(?) 뛰어다니는 등 육체적인 인터랙션은 물론이고 눈을 바라보며 노래를 하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그게 뭐든지 밀도있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정말로 노력한다. (통계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데, 하루종일 집에 아기와 별 인터랙션 없이 ‘공존’하는 경우보다 짧은 시간이라도 매일 적극적으로 반응하며 놀이하는 양육 사례가 아동의 정서 발달에 훨씬 긍정적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즉, 만약 내가 여자로써, 한 명의 사회 구성원으로써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해가는 느낌과 함께 아기와 덧없는 시간을 보낼 것 같다면 나는 어떻게든 일을 하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낫다. 그리고 애초에 여러가지 방어막을 치며 글을 썼듯, 나와 같은 성향의 여성으로써 삶의 새로운 단계를 고려하는 상황이라면 이 의견이 꽤나 좋은 옵션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냉정하게 말해, 나가서 일을 하게 되면 아이와 하루에 최소 12시간을 떨어져 있는다. 월, 화, 수, 목, 금- 출장이라도 가야 하면 밖에서 자고 와야 된다. 이것을 잘 인지하고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 떨어짐의 순간을 견딜 수 없고 시터와 아기 아빠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으며 불안한 마음에 일도 못 하고 스트레스만 받는가. 이건 결국 성향의 차이다.
내 동성 친구들은 (1) 자기 능력도 출중하고 (2) 나보다 더 돈도 잘 벌고(!) (3) 자신으로써의 삶을 가꾸고 유지하는 데 관심이 많은 성향의 당찬 여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친구들에게도 하나의 좋은 참조 사례가 될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 충분히 가능하지. 특별할 것은 없다. 성격상 뭐든 스스로의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고 디테일에 세심하게 열중하는 성격이라면 나 같은 어느 정도의 육아 외주(?)가 “심정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남편들을 아내에게 육아를 외주로 맡긴다! 진짜 그렇지 않은가? 밖에 아기를 데리고 나가자고 하면 아기 용품을 뭘 챙겨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근데 왜 엄마는 엄마라서 죄의식을 느끼고 모든 것을 도맡아야 하는가?
물론, 살다 보면 ‘엄마가 옆에 종일 있어줘야 애들이 안정되는데…’라던가, ‘아이고 엄마가 밖에 돌아다니며 일해서 불쌍하네,’ 같은 말들을 스쳐 지나가듯 들을 수도 있다. 아빠가 일해서 불쌍하네, 아빠가 평일 낮에 못 놀아줘서 안쓰럽네, 하는 사람들은 없는데 말이지. 먼 발치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은 물론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까지도 이런 말을 쉽게 내뱉고야 만다. 하지만 그들의 말이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저 민들레 씨앗처럼 홀홀 하늘로 흘러가도록 웃으면 될 일이다.
걱정하고 두려워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기와 커리어를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 해 줘야지. 언제나 방법은 있다. 지금의 삶은 내게 행복하고 가치있고, 풍성하다. 내려놓고, 그 덕분에 크게 얻는다. 그래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 아기 손 잡고 미팅에 함께 나서며 이게 엄마가 하는 일들이야, 소개할 날이 기다려진다. 걱정하지 말자. 무던한 성격 하나면 이 세상 오지랖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솔직한 심정을 가감없이 적었습니다만 쓰고 나니 또 조심스러운 마음이 생기네요. 혹시나 이 의견이 어떤 우열을 가리거나 강요하는 느낌이 있었다면 다 저의 부족한 글솜씨 탓입니다. 저는 모든 버전의 삶의 아름다움을 진심으로 존중합니다. 제가 정말 사랑하는 언니는 아이가 열 세살, 열 한살입니다. 언니는 커리어를 지키며 시간을 보내 왔습니다. 하지만 언니는 저에게 진심으로 온전히 전업으로 육아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아기 냄새, 그 시절의 웃음,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며, 다시 돌아간다면 일 하지 않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요. 저는 그 마음을 백번, 천번, 만번 이해합니다. 정말로 그렇거든요. 너무나 사랑스럽고 그 순간이 눈물나게 소중해서요. 사람마다 다 다른 개성이 필요하고 성격과 상황은 모두가 다릅니다. 저의 글은 하나의 의견이며, 육십억 인구의 일원으로써 수많은 변수에 의해 만들어진 특정한 샘플입니다. 그냥 그런 사람도 있구나, 하시면 됩니다. 언제나 당신의 자신의 삶을 사시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