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린쯔잉 Jan 05. 2022

누구세요? 당신은

10년 만에 여권 갱신하기

올 것은 반드시 오고야 만다. 이 말은 진리다. 


대한민국 외교부가 언제부터 이렇게 친절해졌는지 6개월 전부터 여권 기한 만료를 알리는 문자를 발송해왔다. 10년 전에 만들어놓은 여권이 어느새 만료를 앞두고 있었던 거다. 2022년이라는 sf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 날이 이렇게 불현듯 다가오리라고는 실감하지 못했다. 2022는 어쩐지 영원히 닿지 못할 소실점 같은 숫자였다. 더구나 예기치못한 코로나에 이어 오미크론까지 지구촌의 국경을 닫아걸게 했던 바이러스의 창궐 탓에 서랍 속의 여권은 더이상 제 구실을 못할 것만 같았다.


6개월이란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렸다. 늘 그렇듯 미적거릴수록, 내키지 않을수록, 더 빨리, 더 기습적으로 그 날은 도래하는 법이다. 여권 만료 일주일을 남겨놓은 시점에서 문득 갱신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떠올린 나는 황급히 시청 여권과를 찾아갔다. 최근 6개월 이내 촬영한 사진이 필요했지만 서랍 깊숙한 곳에서 가로 3.5 세로 4.5 여권과 동일 사이즈의 사진을 찾아냈으니 이것으로 갈음할 셈이었다. 건강검진만큼이나 귀찮고 피하고 싶은 일이 증명사진 촬영 아니겠는가. 

솔직히 말하면 지갑에 늘 넣고 다니는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속의 나는 모두 지금의 내가 아니다. 심하게는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머물러있다. 그나마 3년 전에 갱신한 운전면허증 사진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나이 든 지금의 관점에서 보니) 말갛고 윤기 흐르고 심지어 앳된 모습이기까지 했다. 

세상에! 대체 세월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날은 마침 영하 7도의 혹한의 날씨였다. 두터운 패딩에 털모자까지 쓴 나는 살짝 떨리는 마음으로 여권과 창구 위에 증명 사진을 꺼내놓았다. 마치 장물을 들고 전당포 앞에 선 초범처럼 긴장한 표정을 마스크 안에 감추고.  여권과 직원은 내가 내민 사진을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사진은 안 돼요.


아. 3년 전 사진이라는 걸 들켰구나. 싶었지만 나는 순순히 인정하기가 싫어서 조금 더 우겨보기로 했다. 

네? 가로 3.5 세로 4.5 사이즈면 되지 않나요? 

사이즈는 맞는데 얼굴 비율이 더 크게 나와야 해요.


사진 속의 나는 쇄골과 목선의 긴장감이 아직 남아있었고 흐트러지지 않은 v라인의 턱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마스크 속의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일단 거부당한 이유가 다른 데 있음을 알고 크게 안도했다. 

그러나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잔인한 조명 아래 현재의 늙음을 여실히 스캔당하는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시간 내로. 

집에 돌아와 노트북을 켠 내 손은 사진관이 아닌 미용실을 예약하고 있었다. 외국 여행을 다녀보니 세상에 부질없는 것이 여권 사진을 연예인 프로필처럼 찍는 일임을 알면서도 막상 10년 만에 여권 사진을 새로 찍는다고 생각하니 은근히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코로나 은둔시기에 모처럼 히피펌을 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모발 관리없이 질끈 묶고만 다녀서인지 머리칼이 엉키는 것은 물론이고 부스스하기 짝이 없었다. 더구나 새벽잠을 설친 지 오래라 몇 달 사이에 부쩍 퀭해진 눈매며 동절기의 건조한 실내 탓에 입가의 팔자주름까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대단한 프로필 사진을 찍을 것도 아니면서 미용실에 들러 사자처럼 엉킨 머리카락을 가볍게 자르고 고데기를 해주겠다는 원장님을 만류하며 최대한 미용실에 다녀온 것 같지 않게 드라이만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침에 옷장을 뒤져 신경써서 골라입은 블라우스가 영하의 날씨 덕분에 핏기없는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만들었지만 둔해보이는 터틀넥이나 스웨터를 입을 수는 없었다. 

3년 전에 갔던 사진관은 폐업으로 사라졌고 모처럼 실크 블라우스에 드라이까지 하고 나니 젊은 시절 특별한 사진을 찍고 싶을 때면 들렀던 *바*바 사진관이 생각났다. 미용실까지 다녀온 김에 기왕이면 제대로 찍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욕망의 전차에 올라타고 말았다. 여권 사진 한 장을 손에 넣으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었지만 기왕이면, 멀리 나온 김에, 나중에 두고두고 써먹어야지. 라는 마음에 강남까지 향했다.


고풍스러운 사진관 벤치에 나를 앉힌 사진사는 오른쪽 어깨를 내리고 고개는 살짝 숙이고 왼쪽으로 살짝 시선을 돌려보라고 주문했다. 자꾸만 흘러내려 오른쪽 눈썹을 가리는 머리칼을 귀에 꼽고 나서야 사진 촬영이 시작되었다. 

완벽을 향해 달려온 나의 하루가 2,3분 만에 끝이 났고 나는 초조하게 사진을 기다렸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참혹했다. 세로 4.5센티 사진에서 얼굴이 3.5 비율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기위해 오늘 하루 나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것이다.

덜덜 떨며 입었던 브이 넥 라인의 우아한 소라색 블라우스는 사진에 1도 보이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드라이한 부드러운 컬은 귀뒤로 납작하게 눌려있었다. 

가로 3.5 세로 4.5 반명함판 사진 속에는 3.5센티에 달하는 얼굴만 펭수처럼 동동 부각되어 있었다.

의도했던 모든 디테일은 프레임 밖으로 밀려나고 사진 안에는 관공서적 관점으로 봤을 때 가장 간결하고 명확한 현재의 내가 있었다.  

그렇게 나는, 2022년 새해벽두의 내 모습을 영원히 사진에 박제해두었다.

하지만 여권 사진 촬영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늘의 나를 갱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2032년의 내가 본다면 오늘의 나는 또 얼마나 젊고 애틋할런지. 그것만 생각하기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