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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현 Sep 13. 2022

대화 속 진심의 형태와 특성

영화 더 테이블 리뷰


[영화 더 테이블 리뷰] 대화 속 진심의 형태와 특성





1. Information

더 테이블(한국, 2017, 김종관)

카페에서 누군가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2. Recommendation

영화 속 다양한 관계들 사이에 오가는 진심을 엿보고 싶을 때



3. Appreciation review

tip.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더 테이블은 4개의 단편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로, 평범한 카페에서 순서대로 그 자리에 착석하는 4쌍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지켜보는 영화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카페 주인과 우리는 보고, 듣고 있다.

카페에 혼자 앉아 소일거리를 하다 보면 지척에서 들리는 타인의 이야기들, 그들은 나처럼 진지하거나, 슬프거나, 기쁘거나, 화가 났으며 맞은편 상대는 내게 현재 중요한 사람이거나, 한 때 중요했던 사람일 텐데 영화는 그 관계의 모양을 잘 표현했다. 그리고 4개의 단편들은 테이블 위에서 각각 다른 진심의 형태와 특성을 보여준다.


오전 열한 시, 에스프레소와 맥주에는 진심이 보이지 않는다.(정유미, 정준원)

유진(정유미)은 연예인으로, 비연예인으로 평범하게 사는 전 남자친구 창석(정준원)을 만나러 왔다. 전 여자친구와 재회한다는 의미보다 스타를 만난다는 것에 의미를 둬버린 창석은 대낮부터 맥주를 마시며 유진과는 다른 박자감을 갖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대화는 맥주 거품처럼 어디론가 계속 사라지는 것 같다. 서로가 함께하지 못한 시간의 소회를 테이블 위에 채울 법도 하지만, 상대를 향해 낯선 현상에 대한 설명과 의구심에 대한 해명만 있을 뿐이다.

유진은 대화가 심심한 듯 수동적으로 참여한다. 한 때 중요했던 사람, 자신의 평범했던 시간을 기억하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청춘의 단서와 영감을 얻는 데 실패한 것 같다. 환상이 깨졌다고나 할까. 창석은 스타인 유진을 만나러 왔기에 목적이 다분한 이야기들만 꺼내고, 왠지 처음엔 그게 아니었을지라도 서로의 진심이 어느샌가 보이지 않는다. 정유미의 힘을 뺀 생활연기는 언제나 편안하고, 덧붙여 창석 역할의 정준원 배우의 연기가 정말이지, 얄밉고 좋았다.



오후 두 시 반, 두 잔의 커피와 초콜릿 무스케이크에는 진심이 서툴다.(정은채, 전성우)

정은채가 눈이 가는 길까지 이렇게 연기하려고 계획을 한 것일까 할 정도로 그녀에게 몰입했던 이야기였다. 숨겨진 서사를 새긴 그녀의 시선은 탁월했다. 둘이 무슨 관계인지 나오고 나서야 다시 처음부터 그녀의 눈을 보게 되었다.

경진(정은채)과 민호(전성우)는 썸을 타다 하룻밤 관계를 한 사이이고, 경진은 관계의 진전을 바랐지만 민호는 인도로 돌연(계획했지만 그래도 무심하게) 여행을 떠났다가 수개월만에 돌아왔다. 경진은 무심했던 그에게 마음을 내보이기가 겁이 나고 서운하기도 해서 대화의 맥을 끊어내기 급급한 데 반해, 민호는 미안함 반, 반가움 반으로 계속 상대방의 무언가를 끌어내고, 자신의 것도 내보이기 위한 대화를 시도한다. 조금 가벼워 보이기도 한 민호의 농담들 덕분에 경진은 그나마 대화를 근근이 이어나가고, 결국 자신의 속내도 꺼내 보인다. 민호가 건네는 말들에는 감정 위주의 표현과 상대에 대한 관심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느껴져 불쾌하기보다는 진실돼 보였다. 그들은 유일하게 디저트를 주문한 사람들로, 앞으로 서로에게 중요해 질 사람들. 달콤한 데이트를 기대하며 카페를 나갔다.



오후 다섯 시, 두 잔의 라테 중 한 잔은 설탕을 녹인다. 진심은 어쩌면 거짓과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른다.

실제 모녀 사이가 아닌, 엄마와 딸을 대행하는 동업 관계이다. 숙자(김혜옥)는 대화를 통해 사기로 수감생활을 한 경력이 있음에도 아직도 사기로 돈을 벌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그녀에게 은희(한예리)는 자신의 결혼식에 가짜 엄마 역할을 의뢰한다. 서로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 비즈니스 관계임에도,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속사정이 테이블 위로 포개진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거짓으로 연기하는 두 사람이, 순간순간 서로에게 말 또는 표정으로 진짜일지도 모를 자신의 마음을 담아 전해줄 때가 있는데, 그 순간 김혜옥 배우의 연기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거짓된 결혼이 처음이 아닌 것 같은 능수능란한 은희도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대하는 방법을 몰라 진심을 가득 입안에 머금고만 있는 것 같은 그 느낌을 한예리가 응축하여 담담하게 표현해주었다.



저녁 아홉 시, 커피와 홍차는 다르다. 식은 커피는 커피가 아닌 걸까? 진심을 감출 수 있다면 그건 없던 게 될까

혜경(임수정)과 운철(연우진)은 헤어진 연인관계이지만 서로 남은 감정이 아직 정리되지 못했다. 혜경은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운철을 계속 만나고 싶어 하고, 운철은 그런 혜경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고 싫지도 않지만, 그런 삶과 사랑을 유지하는 게 버거워 보인다. 운철은 혜경이 부담스럽다. 꽃잎을 떼어버린 운철과 그 꽃잎을 소생시키고 싶은 혜경의 대화는 그래서 서로 다른 의지를 갖고 있다. 결혼을 하더라도 계속 만나자는 혜경의 당돌하고 당황스러운 주장 앞에 운철이 45도로 고개를 숙인 채 간신히 입을 떼는 듯 대답하는 것으로 봐선, 그녀를 거부하거나 비난하기가 힘들다. 그들의 관계와 그의 진심은 커피처럼 식은 것 같지만 여전히 커피의 모양을 하고 있다.  

 ** 이 단편에선 괜찮은 대사가 와닿기도 했다.

- 왜 마음 가는 길이랑 사람 가는 길이 다른지 모르겠어.

- 이런 걸 선택이라고 하는 거야. 난 선택한 거고.



영화는 8명이 표현하는 진심의 형태와 특성이 달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대화에서의 진심은 숨길 수도 있고, 삐뚤어지게 새어나올 수도 있으며, 입이 아닌 장치를 통해 표현되기도 하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완전히 다른 형태로 표현할 수도 있었다. 전혀 거짓 없는 순수한 형태일 수도 있지만 거짓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힘들기도 했고, 무르익지 못해 서툴기도 했다.

진심이란 것은 상대의 것은 모르더라도, 내 진심의 형태와 특성이 어떤지 먼저 알고 나면 그 이후의 대답을, 무드를, 순서를 선택할 수는 있다는 점이 다행이라 생각된다. 커피는 거들뿐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흘러간 테이블 위로 아름다운 마음들이 있었다.





4. Postscript


어떻게 생겨먹은지 몰라 항상 궁금하지만
진심에 표준이 있다면 오히려 곤란했겠지

“거짓이 없는 참된 마음이란, 사실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될 수 없으니
여전히 진심이라 믿고 기대하고 빚을 지며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

뭐가 됐든
마주 앉아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거만 한 게 어디 있겠어
우리 카페에서 만나



5. Blending

여러 개의 모양을 더 보고 싶어 단편소설집 상냥한 폭력의 시대(정이현, 2016, 문학과지성사)를 찾아 읽었습니다.


인물들 대부분은 자신의 진심 중 선한 성질의 것은 행여나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초래할까봐, 혼자만의 착각일까봐, 섣부른 오해이거나, 상대가 원하지 않을까봐 등등의 이유로 타인에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무관심, 타인과 동조한 비난과 냉대, 무시와 지레짐작 등 은근히 폭력적인 진심들은 위선이라는 장치를 통해 상대에게 상냥하게 전달되거나, 그것도 안되면 대부분 침묵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은 이것이 자신을 해칠 나쁜 기운이라는 것을 당장은 알아채지 못합니다.


마지막 단편소설인 <안나>는, 댄스 동호회에서 알고 지내던 안나를 아들의 영어유치원 보조교사로 다시 만나게 된 경의 이야기입니다. 경은 예나 지금이나 안나를 일관되게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대합니다. 같은 세계를 살지만 분명 서로 다르다고 믿는 경은 안나의 젊음과 성실함, 그녀의 진심을 순간순간 의식하긴 해도 절대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인연이라 여길 법한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무심합니다.

첫 만남인 댄스 동호회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경의 모습, 안나를 재회하여 나누는 대화, 영어유치원 학부모로서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장면마다 자신의 속내를 무신경과 침묵으로 핸들링하며 진심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는 일을 거둬버린 경을 보며 책 소개글이 여실히 공감됩니다.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의 세계,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한 것도 ‘없어 보이는’ 삶에 질기게 엮인 이 멋없는 생활들에 대하여


없는 게 아니라 분명 있을 텐데 글 속의 주인공들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스스로 직접 창출해 낸 인물들을 향해 “이들이 건넨 예의 바른 악수에 손을 잡으면 그 손바닥이 칼날에 베여 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작가의 말> 이 단편들을 읽다 보면 글 속 인물들의 언행에 수긍하는 점도 있지만, 이내 이렇게 지내는 것은 참 쓸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다 읽고나니 짐짓 부담스럽고 어색해도 괜찮고, 일그러지거나 부끄러워져도 괜찮으니 어떤 진심이라도 다해 무엇인가를 애타게 원하고, 간절하게 믿고 싶은 욕동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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