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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현 Dec 20. 2022

나는 너에게 필수 영양소가 될 수 있을까

영화 소공녀 리뷰


[영화 소공녀 리뷰] 나는 너에게 필수 영양소가 될 수 있을까





1. Information

소공녀(한국, 106분, 전고운)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 친구만 있다면 더 바라는 것이 없는 3년 차 프로 가사도우미 ‘미소’, 집만 없을 뿐 일도 사랑도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현대판 소공녀의 하루살이 이야기(네이버 영화)



2. Recommendation

기호와 취향으로서 위스키를 처음 접할 때 같이 하면 좋을 영화와 책



3. Appreciation review

tip.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의 위스키에선 첫맛에 바닐라, 플로럴 향미가 느껴진다. 그로부터 사흘 뒤, 같은 위스키지만 마음의 상태는 다를 때, 그날따라 왠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그날의 일은 오직 나만이 감당하고 싶을 때는 담배연기가 스모키를 빙자해 잔에 가득 들어찬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영화 속 미소(이솜)가 매일 마시는 위스키는 기분에 따라 어떤 향이 났을지 궁금하다.


** 미소 서식지(microhabitat)와 필수 영양소

생물이 살아가는 매우 작은 규모의 일정한 자리,

microhabitat(출처:wordrow)

영화의 영어 제목이다.

그리고 그녀에겐 절대 놓을 수 없는 필수 영양소 같은 확고한 취향들이 있다.


향미가 있어 기호를 만족시키는 것, 자극성과 마취성 그리고 방향성이 있는 쾌감의 흥분물질로 흔히 ‘기호품’이라고 한다. 많은 이들이 커피, 담배, 술, 청량음료, 초콜릿 등을 즐겨 누리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영화 속 미소도 위스키와 담배를 놓지 못한다. 그리고 행복을 주는 남자 친구 한솔(안재홍)도 있다. 누군가에겐 그것들이 단지 기호취향으로 분류되지만 그녀는 위스키, 담배, 남자 친구라는 삼각대를 자신만의 세계로, 서식지와 영양소로 탄탄하게 구축하여 팍팍한 서울생활을 이어간다. 난방도 돌리지 못하는 한겨울 자취방 잠자리에서 남자 친구와 사랑을 나누려 하면 살에 눌어붙은 내복 5벌을 넘게 벗어야 한다. 미소가 행복과 자유를 누리기 위해 극복하고 탈피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다.


구멍 난 쌀독에서 쌀이 새듯 미소의 지출에서 줄줄 샐 수밖에 없는 게 미소의 담배와 위스키 값이다. 우선 담뱃값이 2000원 올라 4,500원이 되었고, 월세가 5만 원 올랐다. 미소는 지출의 변화를 줘야만 했다. 위스키 12,000원을 건드리지 않는 대신 집을 포기하는 결심을 한다. 이 지점에서부터 다소 엉뚱하고 황당한 미소의 시점으로 영화를 보게 된다.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현대사회 시스템 속 인물 군상과 그들의 노고, 그들에 섞여 때론 염치없어도 나름 사랑스럽게 스며드는 미소가 보이기 시작한다.


미소는 스스로 집을 버린 것을 여행이라 생각하고, 가장 뜨거웠던 시절을 함께한 대학 동아리 밴드부원들을 한 명씩 찾아가 빌붙을 계획을 짰다.

베이스를 담당한 문영(강진아)은 대기업 사원으로, 점심시간 틈을 타 영양주사를 맞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고, 그런 그녀에게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했던 미소는 ‘스탠더드 하지 않다’는 조언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키보드 현정(김국희)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다정하지 않은 백수남편과 사는 게 녹록지 않다. 혼자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우는 듯 웃는 듯 미소를 반갑게 맞이해줬지만 오히려 고달픈 현정의 삶을 곁에서 지켜본 미소가 그녀의 가사를 도와주고 다시 집을 나오게 된다
드럼 대용(이성욱)이는 넓은 집에서 생활하며 든든한 직장도 있고, 꽤 잘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데도 그러지 못했다. 대용은 결혼 직후 이혼을 했고, 주택대출 잔금 때문에 신혼집이라는 지옥에 남겨져 있었다.
보컬 록이(최덕문)는 처음부터 살갑게 미소를 맞이해주었다. 알고 보니 수년 째 결혼 적령기여서 미소의 연락을 받자마자 흑심이 생긴 것 같다.
기타 정미(김재화)는 고급 주택에 우아하게 살고 있었고, 예전에 진 빚을 갚는 거라며 미소를 환대해주었다. 완벽히 분리된 2층이 있어 미소가 언뜻 가사를 도우며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 자연스러워 보이는 정미 모습이 찜찜하다. 결국 정미는 눈치를 봐야 하는 삶 전체가 불편하고 답답한 모양이었는지 미소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여  ‘한심하고 염치없다.’라며 그녀를 쫓아 보냈다.

집을 포기한 미소가 빌붙기 위해 찾아간 그들은 어딘가 모르게 슬펐다. 집과 돈이 없는 미소가 불행한 건지 안정적인 주거환경이라는 시스템 속에 있는 그들이 불행한 건지 가치판단이 모호해졌다. 사실 불쌍한 건 미소지만, 더이상 뜨겁지 않은 밴드부원들의 현재 모습도 더 낫다고 볼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미소는 스스로에 대해 알고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소설 소공녀(미국 소설, 버넷)처럼 가족은 없지만 약해지지 않고 겸손하고 성실한 생활을 해 온 미소는, 미미하지만 소소한 자신만의 확실한 행복을 선택하고 그것을 타인에게 설득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그 행복에 대한 비난을 받을 때도 무너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소는 자신의 행복을 선택하고 책임지기에 타인의 삶도 또한 조용히 존중하고 이해하는 모습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감독은 미소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 소공녀라는 개념으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모티프로 삼아 재치 있고 알차게 구상하면서도 취향을 보여주지 않은 사람들의 노고까지도 이야기에 녹아들게끔 노력하였다.


자신을 지지해주던 삼각대 중 남자 친구 한솔이 ‘조금 더 사람답게 살기 위해’ 기약 있는 이별을 고하고, 위스키의 값마저 오르며 미소는 어딘가 단단히 결심한 채 여행은 다시 시작되고 영화는 끝난다. 삼각대를 구축했던 그녀의 삶이 휘청거렸을까. 미소의 삶에 꼭 필요한, 그녀의 서식지와 필수 영양소를 응원한다.







4. Postscript


해롭지만 않아도 좋겠다
안 그래도 몸과 마음이 힘들던 너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명분과 실리가 겹쳐
앞뒤 사정을 묻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은 채
“난 너를 다 알아.”
“너도 날 다 알겠지.”
판단하고 마는 특별하지만 이따금 해로운 사이
너는 너여야 했는데
너는 나여야 했던 것 미안해
그래도, 서로의 안녕한 생장에 꼭 필요한 사람
조금 유해하기도 하지만
언제나 우린 필요한 서로를 찾자



5. Blending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지은이: 무라카미 하루키(이윤정 옮김)
출판사: 문학사상
에세이: 위스키 성지의 그 맛과 아름다운 풍토가 하루키의 언어 속에 촉촉이 녹아든 에세이(머리말)


영화 소공녀, 또는 위스키와 함께 할 책으로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무라카미 하루키)을 추천합니다. 위스키를 마신다고 하면 지인들이 보내는 특별한 호기심에 부응하고 싶어 관련 용어와 역사들을 블로그와 유튜브로 공부하며 외워보기도 했습니다. 진입하기 어려운 주종이란 생각이 들지만, 영화 소공녀와 하루키의 에세이는 조금 더 우리에게 가깝게, 유니크한 기호로, 감성적으로, 삶에 자주 또는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의 순간’으로서의 위스키를 보여줍니다.


유명한 작가가 여행 에세이를 쓰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입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와 마찬가지로, 지은이도 단순히 떠나고자 하기보다는 목적 있는 여행, 추구하는 여행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은이는 기술적인 면의 위스키 소개가 아닌, 그 지역을 여행하며 위스키의 향취를 풍기는 사람들과 고장의 인상적인 모습을 글로 옮기고자 노력했습니다.(머리말)


싱글몰트(발아한 보리로만 만들어진) 위스키의 성지: 아일레이(스코틀랜드)

p.30 위스키를 제일 먼저 제조한 것은 아일랜드인이지만, 아일랜드에 가장 가까이 위치해 있으면서 원료가 골고루 갖춰져 있던 아일레이 섬이 싱글몰트의 성지가 되었다고 한다.
p.32 싱글몰트의 세계도 와인처럼 퍼스낼리티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래서 스카치에는 얼음을 넣어도 되지만 싱글 몰트에는 얼음을 넣어선 안된다. 적포도주를 차게 해서 마시지 않는 것과 같다.
p.68 라프로익 증류소 매니저 이안 핸더슨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싱글 몰트는 햇수가 오래될수록 맛있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거든. 다만 개성의 차이에 지나지 않아.”

오래된 것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지만 잃는 것도 있다는 매니저의 철학이 와닿습니다. 오직 취향의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술도, 사람도 각자 겪은 시간의 종류에 따른 퍼스낼리티가 존재합니다.


물이 다른 펍의 고장: 아일랜드

p.83 술잔 옆에는 물이 담긴 작은 주전자가 딸려 나온다. 수돗물이다. 어설프게 미네랄워터 같은 걸 내놓진 않는다.
p.85 이 고장 사람들은 대체로 위스키와 물을 반반씩 섞어 마신다.
p.98 이렇게 인구가 적은 나라에서 이토록 펍이 많은데도 용케 운영이 된다는 게 놀랍기 그지없지만, (중략) 어지간히도 술을 마시는 모양이다. 모두들 그만큼 기호가 분명한 모양이다.

지은이는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술잔을 내밀고 그걸 받아서 조용히 목 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언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한정된 틀이 아닌 그것은 심플하고, 친밀하고, 정확하다고 합니다.


기호와 취향을 찾고, 그것을 공고히 하려는 노력은 누군가에게 충고/조언/평가/판단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시스템으로부터 긴장을 놓게 하고 휴식하게 하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위 두 영화와 책은 삶이 곧 목적 있는 여행이고, 나를 만나는 과정이며, 그 여정에는 기호와 취향을 깨닫는 과정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존재하는 모든 주변의 퍼스낼리티를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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