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변하겠지만

by 김이현

오늘의 브루잉(brewing) : 영화 ‘호프스프링스’




20살인 아빠와 18살인 엄마는 라디오를 통해 만났다. “청진리에 사시는 oo 씨가 보낸 사연과 신청곡입니다”라는 DJ의 말을 따라 아빠는 엄마에게 편지를 보냈고, ‘혼자 듣고 싶은 노래입니다’라는 엄마의 사연이 궁금했다고 한다. 엄마는 아빠의 편지를 받고 나서 이렇게 무턱대고 편지를 보내온 사람도 자신처럼 분명 감수성이 깊고 낭만적일 거라 생각해 바로 답장을 했고, 그렇게 연애를 시작했다.


둘은 사랑하여 결혼을 했지만 농사를 지어 온 아빠네 집에서 그만 가난한 어부의 딸이면서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엄마를 탐탁지 않게 여겨 어린 엄마의 시집살이가 고된 날이 많았다. 어부셨던 외할아버지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후, 그 집의 막내로서 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하고 공장에 보내졌던 엄마에게 할머니는 유독 다정하지 않았고, 자신만 믿고 온 아내인데 라는 생각에 더 이상 그녀의 설움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던 아빠는 엄마와 1살 배기 딸을 데리고 포항에서 대구로 이사를 했다. 아무도 바다의 정체를 알려주지 않아 그것을 무서워하지 않은 흰나비들은 확실히 낭만적이고, 충동적이고, 겁이 없었다.


젊고 가난한 부부가 바다로 나왔을 때에는 심해보다 깊은 막막함과 첫째가 있었다.

가진 게 없는 20대 초반의 남녀가 도시에서 둘이 먹고살기도 빠듯할 텐데, 그래서 사랑이 뜨거웠을지언정 그것이 돈이 되진 못했다. 어쩌다 자식이 하나 더 생겼지만 아빠는 성격 상 영업을 잘하지 못해 회사를 자주 옮겼고, 벌어 들이는 것보다 나가는 돈이 많았단다. 엄마는 1살이 된 둘째를 6살인 첫째와 주인 할머니에게 맡긴 채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했다. 내가 우리 가정의 실태와 현주소를 어렴풋 알아챈 10살쯤에는, 부모는 자식을 키우는 역할만 있을 뿐 서로는 사랑하면 안 되는 사이인 줄 알았다. 그 정도로 아빠와 엄마는 많이 싸웠다. 인심이 곳간에서 나는 법이니 연중 불쾌했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비난할 때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고, 어렸을 때 나는 천둥을 머금은 먹구름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가끔 들릴 때가 있었다. 부모님은 점차 가계를 안정적으로 꾸려갔고, 딸들만은 최선을 다해 키워내느라 서로는 서로를 3순위, 4순위로 밀어냈다. 어린 나는 차라리 돈이 없어도 좋으니 두 분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랐다.


결혼한 지 30년이 훌쩍 지나 이제 좀 힘이 꺾였구나 하던 때 아빠는 암 진단을 받으셨고, 엄마는 내 옆에서 기절하듯 주저앉았다. 나만이 정신줄을 부여잡고 의사의 말을 듣고 있을 무렵 엄마의 첫마디는 “너희 아빠 불쌍해서 어떡해”였다.

아빠의 병세가 회복되고 암 완치 판정을 1년쯤 앞둔 때 엄마는 자식의 자식들을 연이어 돌봐야 했다. 큰 딸이 뒤늦게 낳은 쌍둥이를 돌봐주며 골병이 들어갔고, 아빠는 우리들에게 엄마를 자꾸 괴롭히면 자식과도 연을 끊겠다고 하며 “너희 엄마 불쌍하지도 않냐”라고 했다.

두 분은 연애와 결혼을 후회하지 않는다 했고, 서로가 서로를 불행하게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며, 이제 와 그 점이 미안해서 하나라도 더 해주려고 노력한다.





오늘 추출할 영화는

오랜 세월 속에 사랑을 잊은 듯 하지만 그럼에도 작은 용기로 지켜내는 연대, 영화 호프스프링스이다.


호프스프링스
미국, 코미디
2013.04.04, 100분


메릴 스트립이 보여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1995)에서의 연기, 일생에 단 한번 오는 감정을 마주한 성숙한 어머니이자 아내의 모습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는데, 영화 호프스프링스에서 보인 연기가 이전의 모습과 묘하게 겹치기도 하고, 전혀 다르게도 보이며, 누구나 품을 수 있는 표정으로 아무나 낼 수 없는 표현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사랑의 형태가 오든 그녀의 연기와 그녀는 사랑스럽다.


결혼 30년 차를 지나 서로 룸메이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부부 케이(메릴 스트립)와 아널드(토미 리 존스)의 부부관계 회복기를 그린 이 영화는, 사실 잘 다루기 힘든 황혼기 이후의 부부간 성생활을 다룬 의미 있는 작품이다.


황혼기 이후의 사랑은 그렇게 관심을 끌만한 재목이 아니다. 나의 이 젊음이 무한으로 이어질 거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랑 이야기는 굳이 재미있지 않을 것이고, 반대로 나의 늙어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그러한 시간은 온다.


케이와 아널드는 자녀들이 독립한 후 비로소 부부만의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기대했지만, 아널드는 일과 골프 tv에만 관심이 있고 서로 각방을 쓰고 있으며, 케이는

이따금 아널드의 관심을 받고 싶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삶이 참 무료했다. 그들은 행복하기 위해 연애와 결혼을 했고, 자식을 낳아 최선을 다해 키웠으며, 일과 가정을 잘 꾸려갔음에도 모든 걸 이룬 후에는 행복이 그 어디에도 없는 느낌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부부상담클리닉 광고가 우연히 눈에 들어왔고, 상담소가 있는 거대한 어촌마을 ‘호프스프링스’로 부부는 날아간다.

비록 시작부터 원만하진 않았지만 상담이 진행될수록 남편의 욕구와 환상을 알 길이 없던 아내와, 아내가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인지 들여다볼 여유가 없던 남편은 서로 그들 사이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와는 상관없이 여전히 조금씩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된다.


젊은 시절의 뜨거운 사랑, 열정으로 충만한 그 시작이

1부터 10 사이의 숫자와, 검정과 흰색 사이 색깔과, 봄과 겨울 사이의 날씨를 지내고 나면 그 모습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안다는 것이 곧 허무하거나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변하듯 관계 속의 감정과 열정도 변하게 마련이고 다만 그 사이에 놓인 숫자와 색깔, 계절을 함께 지나는 순간-


함께 헤아리고, 서로의 고유함을 채우며, 더울 때는 바람을, 비가 오면 우산을 나누는 그 순간이 애틋한 것이다.


나중에 행복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그저 지금 내가 한걸음 한마디 한순간 더 용기 내어 행동하는 지점에서 시작되고, 그렇게 서로에게 그어진 선을 넘으면 우정이 사랑이 되듯 사랑도 연대가 된다.